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89화 (289/608)

제289화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노는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거라 생각하면 된다. 단지 상황이 흘러가는 꼴을 보니 쉽게 해결하기는 틀렸다. 어지간히 흉흉한 사건이라도 되도록 원만한 방향으로 진행하려 했건만. 백작가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거짓말의 여부까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가장 나쁜 흐름인 것만은 분명했다.

‘일단 사건부터 수면 위로 올려야 한다는 말인데…….’

눈앞에 펼쳐진 가시밭길이 벌써부터 생생하게 느껴졌다. 일방적으로 살인 사건이 있었다고 해 봤자 믿을 리가 없고, 평범한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사념을 증거로 삼을 수도 없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눈에 보이는 흔적을 찾아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았다. 까마득하게 많은 방부터 시작해서 지하실과 수로까지 낱낱이 살펴봤지만 어느 것에도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전부 다 사념으로 가득하니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수상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숨겨진 비밀 공간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수사 드라마 같은 걸 많이 봐둘 것을. 가해자는커녕 피해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건은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하는 건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실종자가 있었다면 그걸 토대로 단계를 밟아 나가기라도 할 텐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일을 그만두고 떠난 사람도 없다는 듯했다. 피해자가 내부인이 아닐 가능성은 커졌지만, 조사 범위만 넓어진 셈이었다.

이러다 스텔스 영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란 사건은 전부 다 조사해 봐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인구수가 많은 영지는 아니지만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낼 수 있는 규모는 아닐 거다.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겠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적당히 넘길 수 없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머릿속을 환기할 겸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뭐든 기분을 전환할 만한 일이 필요했다.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택에서 일하는 아이인 듯, 소년은 자기 몸집보다 큰 나무통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걸음을 애쓰고 있었다. 통 안엔 장작용 나무들이 빈틈없이 꽉꽉 들어찬 상태였다. 척 보기에도 어린애가 들기엔 과한 양이었다. 다가가서 들어줬더니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도와줄게. 어디까지 가면 돼?”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탓일까.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던 소년이 한발 늦게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괘,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는데…….”

“무거워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데 무슨 소리야. 들어다 줄 테니까 목적지만 말해.”

“하지만…….”

“괜찮다니까. 그래서 어디로 간다고?”

“그, 그럼…… 주방까지요.”

“좋아. 가자.”

마침 수상한 공간을 찾아 저택 구석구석을 뒤져본 참이라 주방까지 가는 길도 훤히 알았다. 웃으며 앞장섰더니 소년이 머뭇거리며 뒤를 따랐다.

“저어, 나리는 기사이신가요?”

“응? 아닌데. 내가 기사로 보여?

“그렇진 않지만…… 힘이 엄청 세신 것 같아서요. 그거 가볍게 드는 사람 처음 봤어요.”

“후후, 내가 힘이 조금 세긴 하……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

“힘 진짜 세시다고요.”

“아니, 그 전에. 기사냐고 물었을 때 날 뭐라고 부르지 않았어?”

“……나리?”

“……!”

나도 모르게 걸음이 우뚝 멈췄다. 내가 알기론 ‘나리’라는 호칭은 보통 남성에게 붙여진다. 왠지 감동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서 무언의 압력을 느꼈는지 소년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저, 저어?”

“나 귀족 아닌데. 그런 호칭 쓰지 않아도 돼.”

“네? 귀족 같으신데…….”

“정말 아냐.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

“……어, 그럼…… 형……?”

“……너 정말 좋은 애구나.”

“……네?”

“아무것도 아냐. 하하, 짜식!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는걸!”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그 한 가지가 생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이너스로 치닫고 있던 바논 백작저의 평가가 단숨에 대폭 상향되는 순간이었다. 기특한 기분에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자 소년은 당황하면서도 수줍어했다.

“여기, 이쪽에 놔주시면 돼요.”

백작저의 주방은 지하로 내려가야 나오는 구조였다. 안에서 분주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소년과 함께 나타난 나를 보고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한 채 소년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주방 가장 안쪽에 있는 큰 화덕의 뒤편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옮겨 놓은 듯한 마른 장작과 다양한 불쏘시개 거리가 쌓여 있었다. 한구석에 의자와 모포가 늘어져 있는 걸 보아 일꾼들의 휴식 공간이기도 한 것 같았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근데 이걸 매일 옮기는 거야?”

“매일은 아니에요. 채워둔 장작이 반 이상 떨어질 때만요. 근데 요즘은 날이 추워져서 장작이 빨리 떨어지는 편이라서요. 거의 매일 하긴 해요.”

“그렇구나. 힘들겠네.”

“이게 제 일인걸요. 그래도 백작저는 품삯도 후하고, 이만하면 일하기 편한 환경이에요. 사람들도 다들 친절하구요. 마을에 나가면 다들 얼마나 절 부러워하는데요.”

소년은 진심으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도 어린 아이가 의젓하게 대답하는 게 대견했으나 마음이 좋진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아동보호법에 걸리고도 남을 텐데, 여기선 대우받으며 일하기만 해도 행운이라니. 이럴 때면 새삼 인권 발달의 차이를 느끼고 만다. ……저만한 나이의 알리사를 전쟁터에서 활약하게 내버려 두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주인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세요. 마님과 아가씨들도 모두 상냥하시고요. 셋째 아가씨는 종종 저한테 과자 같은 걸 나눠주기도 하셔요.”

내가 안쓰럽게 바라보는 걸 백작을 탓하는 거라고 여겼는지, 소년은 열심히 주인 일가를 두둔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여기까지 온 용건은 끝났으니 이제 다시 돌아갈 차례였다. 그런데 무심코 스쳐본 광경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장작과 함께 들어 있는 잡동사니 중에 조금 뜻밖의 물건이 섞여 있었다. 두께가 제법 두터운 책들이었다.

“저건 누가 읽으려고 놔둔 거야?”

“네? 아, 아뇨. 저것도 불쏘시개용이에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한 듯 소년이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책을 들여다봤다. 아크아돈은 종이 가격이 꽤 비싼 편이다. 당연히 책도 비싼 편에 속했다. 구하기 힘들 만큼 귀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불쏘시개로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버려진 책들은 테두리에 금박까지 입힌 고급 종이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 정도면 필요 없어졌더라도 되파는 쪽이 훨씬 이득일 것이다. 바논 백작은 꽤 검소한 편으로 보였는데, 비싼 물건을 이렇게 함부로 처분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의외였던 건 따로 있었다.

“……성서잖아?”

살짝 들춰보니 빼곡한 글자가 펼쳐졌다. 내용 대부분이 교단의 교리와 성인(聖人)들의 저술을 기록한 것이었다. 얼핏 훑어보기만 해도 어느 교단의 성서인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마신 카노스의 성서였다. 그 밖에도 여러 형태의 책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굳이 내용을 살펴볼 것도 없었다. 표지에 대놓고 마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마신교에 굉장히 실망한 것 같더니. 성서까지 전부 다 처분한 건가?’

책은 대부분이 상당히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험하게 구른 지 오래된 흔적으로 짐작하건대, 이미 우리가 오기 전에 처분한 걸로 보였다.

“이거, 백작님이 버리라고 지시한 거야?”

확인을 위해 슬쩍 물었더니 소년이 망설이는 얼굴을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감한 사안이라 그런지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형은 황제 폐하 편 맞죠? 지금 황제 폐하는 마신의 교단이랑 싸우고 계시구요.”

“어? 으음, 결과적으로는 그렇긴 한데…….”

“역시.”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소년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요즘 가는 곳마다 마신의 교단에서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그래서 주인님은 마신에 관한 건 전부 싫어하시게 된 것 같아요. 책장에서 마신의 성서를 비우고 몽땅 태워버리라고 하시더라고요.”

“으음, 굳이 태울 것까지야. 그냥 다른 사람한테 줘도 될 텐데.”

“다른 사람이 마신을 섬기는 것도 싫으신 거죠. 마님과 아가씨들한테도 그렇고, 저희에게도 금하셨어요. 성서를 빼돌리면 큰 벌을 받을 거라고 해서 건드린 사람도 없어요.”

“그렇구나…….”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더러워진 성서를 바라보았다. 바논 백작의 입장에선 이사나를 위한다고 한 일일 텐데, 그게 왜 이렇게 씁쓸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마신의 교단이 타락한 건 사실이고, 나 역시 마신관들이 싫긴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가 마신을 떠난 걸 확인하는 건 또 별개의 느낌이었다. 장난스럽게 웃던 카노스의 얼굴을 떠올리니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

“……교단이 나쁜 거지, 마신을 싫어할 것까진 없지 않나.”

“헉! 주인님 앞에선 절대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크게 진노하실 거예요.”

“비슷한 일이 있었나 보네?”

“성서를 버리실 때요. 한나 아줌마가 율리아 아가씨를 생각해서라도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만류하셨다가 저택에서 쫓겨나실 뻔했어요. 마님의 유모여서 무사하셨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그때 일이 생각난 듯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조금 의아해져서 물었다.

“율리아 아가씨가 누군데?”

“셋째 아가씨요.”

“아아, 너한테 과자를 나눠준다는 아가씨 말이구나. 그 아가씨를 위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고?”

“네, 셋째 아가씨는 장차 마신관이 되실 거거든요. 그게 꿈이세요.”

“허어?”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버지는 마신관을 싫어하는데, 딸은 바로 그 마신관이 되고 싶어 한다니. 왠지 들을수록 점점 이야기가 색다른 방향으로 튀는 것 같다. 나는 백작과 함께 인사 나왔던 세 명의 소녀들 중에서 가장 어렸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고,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긴 자매들 중에서도 제일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딱히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었다.

“백작님과 그 아가씨 사이는 어때?”

“좋아요.”

“……그래?”

부녀가 종교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자기 자식한테는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하는 건가. 하긴, 셋째 딸은 이제 겨우 열 살 정도의 나이였다. 아직은 뭘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시기다. 철부지 어린 소녀의 꿈이니 엄격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여긴 걸지도 몰랐다.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될 것 같은 복잡 미묘한 기분이라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성서를 다 갖다 버리는데도 아버지와 잘 지내는 걸 보면, 애초에 딸 역시 그리 깊은 마음은 아닌 것 같지만.

“근데 바논 백작님도 보기보다 꽤 무모하시네. 마신의 교단은 교인 관리에 엄격하잖아. 이렇게 성서를 함부로 처분하는 걸 누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에이, 우리 중에선 그럴 사람 없어요. 다들 백작님을 존경하는 사람들뿐이니까요. 솔직히 우리들도 백작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마신관들은 정말 하나같이 무례하거든요. 가끔 기도해 주겠다고 방문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상하는데요. 백작님한테 대놓고 돈을 요구한 적도 많고요.”

“……그건 확실히 싫을 만하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 이야기가 유행했을 때도 여기 사람들은 아예 관심 끄고 살았어요. 다들 마신의 신전에 줄줄이 찾아갔는데 말이죠.”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

“모르세요?”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듯, 소년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놀라는 반응을 보니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인 듯했다. 나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데?”

* * *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미색의 천장엔 나무 장식과 더불어 금박을 입힌 문양이 일정한 간격으로 채워져 있었다. 평소 잘 살피지 않는 부분이다 보니, 같은 공간에서 며칠째 묵는 건데도 제대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잘 짜인 천장은 샹들리에가 없이도 충분히 화려한 멋을 냈다. 건축가가 누군지 몰라도 꽤 공들여 디자인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과연 백작가의 저택다운 위용이었다.

좀 더 유심히 감상하려는데 불쑥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더니 시야를 가로막았다. 눈동자부터 머리카락까지, 차지하고 있는 색감마다 전부 강렬한 붉은색이다. 라피스구나. 멍하니 생각을 잇기 무섭게 싸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너, 아까부터 누워서 뭐하는 건데?”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하다. 나는 멀뚱히 마주 보다가 대꾸했다.

“……숨 쉬어.”

“……지금 장난하냐?”

안 그래도 붉은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품으니 불꽃이 튀는 느낌마저 들었다. 저걸 보고 청색인 라피스 라줄리를 떠올릴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쟨 정말 이름을 잘못 지었다. 볼 때마다 거듭 하게 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나는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왜 또 시비야.”

“시비는 네가 걸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뭘.”

“그게 아니면 지금 네 행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보시지. 나갔다 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운 녀석이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에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개인 공간이 없는 건 이래서 문제다. 누구나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같이 쓰는 방은 그런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는 환경이니까. 라피스처럼 아무 데나 드러눕는 철면피는 아니라서 방으로 오긴 했지만, 대놓고 방해를 받고 보니 과연 이곳밖에 없었는지 뒤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차라리 정령계로 돌아가 있을걸. 그 생각을 바로 떠올리지 못하고 이제야 깨달은 내가 개탄스러웠다.

“그냥. 별거 아냐. 잠깐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그래.”

“잠깐 좋아하시네. 지금 세 시간째 그러고 있거든?”

“……벌써 그렇게 됐나?”

가만히 눈을 깜빡였더니 라피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경계하는 시선이다. 짜증 나는 짓은 저가 더 많이 하는 주제에, 마치 나를 문제아처럼 취급하는 태도를 보니 속에서부터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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