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으아, 너무 많이 먹었다. 난 잠시 밖에 나가서 소화 좀 시켜야 할 것 같아.”
“아,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먹겠어.”
“그럼 주방에 가서 더 내올 필요 없다고 말하고 올게.”
“난 화장실.”
“아! 나도 같이 가, 이릴 언니.”
아무리 즐거운 시간이라도 무한정 이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쯤 떠들고 나자 자연스레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대화를 중단한 용병들이 각자 다른 용건을 지니고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일어나서 떠나간 자리엔 신관 남자와 매튜만이 남았다. 다섯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사라지니 시끌벅적하던 사위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그때서야 트로웰은 쓰고 있던 매튜의 가면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실까, 엘뤼엔?”
“…….”
웃으며 묻는 말에 조용히 자작을 이어가던 신관 남자―엘뤼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 가득 응대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순진한 인간 용병들이야 우연히 만났다는 설정에 속아 넘어갔는지 몰라도, 그는 트로웰이 일부러 찾아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령왕들 중에서도 땅의 왕은 어느 세대나 가장 상대하기 귀찮은 존재였다. 그의 등장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로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샴페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나 찾아봤다가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덕분에 여기까지 발걸음 했다고. 아직 재회할 예정은 없었는데 말이야.”
그가 자신의 잔을 엘뤼엔이 들고 있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다지 질이 좋은 유리는 아니었는데 제법 맑은 소리가 울렸다. 엘뤼엔은 더는 외면하지 못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저들이 말하던 매튜라는 녀석이 설마 너인 줄은 몰랐는데.”
“아, 그러고 보니 처음 들어봤겠구나. 네가 소멸한 후에 만든 거니까. 제법 괜찮지? 내 유희 명.”
“글쎄. 그보다 갑자기 취향이 너무 바뀐 거 아닌가? 네가 인간들 사이에 섞여 용병질이라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군.”
“뭐, 나답지 않은 일이라는 건 인정해. 그보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못 들었는데?”
“…….”
“공사다망하신 형벌의 신이 지상엔 무슨 용건이실까. 정령왕 시절에도 유희와는 담쌓고 살던 분이 이제 와서 팔자 좋게 유람 중인 건 아닐 테고. 설마 엘을 찾아가는 중에 길이라도 잃었어?”
“……별로.”
“정색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인가 보네?”
트로웰의 눈동자가 노골적으로 반짝거렸다. 그것을 본 엘뤼엔이 잠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이내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공간이동이 불안정해진 것뿐이다.”
“그게 어디가 ‘뿐이다’야. 상당히 치명적인 문제잖아. 어쩌다 그렇게 됐어?”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 치워. 그저 사소한 방해 요소가 있어서 그런 거다.”
“널 헤매게 할 정도면 그저 사소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말꼬리 물고 늘어지지 마라, 트로웰. 이게 재밌어 죽겠다는 건 알겠는데, 난 네 장난에 응해줄 생각 없다. 더 자극하면 말로만 끝내지 않아.”
냉담하게 대꾸한 뒤 입안에 술을 털어 넣는 엘뤼엔을 보며 트로웰은 피식 웃었다. 그가 하는 경고가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령왕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친절하게 미리 경고해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그의 온건한 반응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접할 때마다 참 신기했다. 트로웰이 보기엔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는 건 오히려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놀리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트로웰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궁금한 건 진심이야. 네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곳에 있다는 게 아무래도 좋은 느낌은 아닌 것 같거든.”
“…….”
“최근 들어 보이는 것들이 불안정해지고 여러 갈래로 갈리기 시작했어. 아크아돈에 쓸데없는 개입이 일어나면 나타나는 현상이지. 네가 이곳에 있는 것도 그와 관계있는 거 맞지?”
그 질문을 끝으로 잠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엘뤼엔은 대답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정령왕보다 상급신의 지위가 더 높은 건 사실이나, 아크아돈에선 입장이 달랐다. 이 세계를 다스리고 관장하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정령왕들이었다. 한때 물의 왕이라 불렸던 자로서 그 권한과 책임감을 모르지 않았다. 이 땅에서 정령왕들이 모르게 진행할 수 있는 일 따윈 없었다. 어차피 그가 엘을 만나려 했던 이유 중엔 이런 상황을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트로웰에게 먼저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왕이 아크아돈으로 넘어왔다. 악신으로의 각성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고 하는군.”
“……마신은 뭘 한 거야?”
“봉인해 두긴 했는데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아직 금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풀리는 건 시간문제겠지.”
“최악이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쁜 소식에 트로웰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정령의 눈을 사용해 마왕의 위치를 찾아내 보려는 의도였다.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땅의 하급 정령들이 눈에 담기는 것들을 그들의 왕에게 전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들 중에서 그가 찾는 것은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어.”
“그렇겠지.”
처음부터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던 엘뤼엔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신은 주신과도 겨룰 수 있는 존재다. 아직 완전한 각성이 이뤄지지 않았다 해도 이미 상급신에 가까운 힘을 소유하고 있을 터였다. 엘뤼엔조차 그가 숨어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급 정령들의 시야 정도는 얼마든지 속이고도 남았다.
“금제의 효과는 얼마나 갈 것 같아?”
“길어 봤자 5년 이내. 제물을 취해 힘을 흡수한다면 더 빨라질 거다. 하지만 최소 천 명 이상은 필요해.”
“천 명이라……. 필요조건까지 갖춰야 할 테니 그렇게 바로 채울 순 없겠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일단 아이들이 모이는 장소를 수색해 봐야겠군. 그쪽은 우리가 알아볼게.”
“그래.”
때마침 흩어졌던 일행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난 사이에 싸늘해져 있는 분위기를 보고 샴페인 용병들은 슬쩍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유를 묻고 싶어도 둘 다 말을 걸기 어려운 상대이다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다른 대화를 시작하는 걸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먼저 운을 뗀 건 이릴이었다.
“저기, 있지. 우리들 말이야.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조금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어. 근데 이게 왠지 마신의 교단에서 퍼트린 소문 같단 말이지.”
“무슨 소문?”
마신의 교단이라는 말에 엘뤼엔과 트로웰의 시선이 이릴을 향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에탄 마을 아이들의 실종 사건에 개입한 이후, 샴페인 용병단은 마신관들을 극도로 경계하게 됐다. 또 어디선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마신관과 관련된 정보는 일부러 찾아다니며 수집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부대 복귀가 더 늦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신의 교단과 관련된 소문이 돈다고 하니 신경이 저절로 곤두섰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예상을 조금 벗어나는 내용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라는 거, 들어봤어?”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
“그게 뭔데?”
어리둥절해하는 일행들의 반응에 이릴과 쉐리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 역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이라 당황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웬 주술 같은 것이 유행처럼 떠돌고 있대. 달밤에 의식을 진행하면서 주문을 외우면 아름다운 마녀가 나타난다나?”
“뭐야, 그 낯간지러운 동화 같은 이야기는. 그래서 그 마녀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무슨 소원이든 전부다?”
“응, 그렇대. 돈이든 명예든 목숨이든. 간절히 원하는 거라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하더라.”
“참나, 말도 안 돼. 이런 시국에 별게 다 유행이네. 아니, 이런 시국이니까 더 유행하는 거려나. 근데 그걸 마신의 교단에서 퍼트렸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런 종류의 미신 같은 거야 흔한 편이잖아.”
사람을 현혹하는 전설이나 미신은 사특하게 여겨지는 부류지만, 늘 꾸준하게 떠돌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원이 이뤄진다는 종류는 너무 많은 편이었다. 새로운 내용이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고, 출처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웠다. 마이티가 그 점을 지적하자 이릴은 어깨를 으쓱였다.
“응, 그게 말이지. 그 주술에 묘한 조건이 붙어 있거든.”
“묘한 조건?”
“주술을 완성하려면 마신관이 필요한 모양이야. 의식 중에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려야 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게 마신관의 피여야 한다나?”
“아하? 그러니까 결국, 마신관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룰 수 있는 소원이다?”
“그런 셈이지.”
“허참, 이제 별짓을 다 하네. 마신의 교단에 대한 평판이 하도 나쁘니까 그런 식으로 쇄신을 시도하는 거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껴져?”
묵묵히 듣고 있던 헤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가 돌아보며 의견을 구하는 것에 모두가 동조를 표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게다가 이건 아무리 봐도 마신관들과 접촉하게 하려고 수작 부리는 거잖아. 의도가 너무 수상하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대체 뭘 낚으려고 이런 포석을 까는 거지?”
“……이미 대답이 나온 것 같은데요.”
한창 토론으로 떠들썩해진 공간에 건조한 음성이 울렸다. 낮은 중얼거림이 시작된 곳엔 트로웰이 있었다. 단지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조금 전까지와 똑같은 표정, 똑같은 분위기이건만 이상하리만치 그에게서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샴페인 용병들이 조용히 숨을 죽일 때였다.
쾅!
가까이에서 조금 높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술을 털어 넘긴 엘뤼엔이 빈 잔을 탁자 위에 강하게 내려놓으면서 낸 소리였다. 흠칫 놀라 돌아본 샴페인 용병들은 이번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그의 눈빛이 더 위협적으로 가라앉아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직감적으로 그의 심사가 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 엘뤼엔은 드물게 짜증이 솟은 상태였으니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의 입가가 살짝 비틀어졌다.
“잔머리를 굴리는군.”
* * *
눈발은 약해졌지만 험악한 날씨가 계속됐다. 몇 날 며칠 갇혀 지내는 상황이 계속되자 일행들은 각자 할 일을 만들어 몰두했다. 체스를 둔다거나, 개인 훈련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실내 활동이란 게 다 그렇듯이, 대부분 정적인 것들뿐이었다. 신세를 지는 처지다 보니 대체로 얌전하게 지내는 편이라 일부러 그런 종류만 택하기도 했다. 덕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도 저택 안은 온종일 조용했다.
각자 개인 활동에 빠져 있을 때면 나는 홀로 빠져나와 저택을 탐방했다. 무료함을 때우기 위한 산책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제론 잔류 사념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처음엔 정말 심심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꽤 진심으로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저택 안에서 사고가 난 적은 없었단 말이죠? 실종자도 없었고요?”
“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어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여인은 올해로 이 저택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도 돌아다니며 몇 사람을 더 떠 봤지만 전부 똑같은 결론만 내려졌다.
“……일단 사건이 은폐된 건 확실하구나.”
이미 그럴 거라 예상했던 일이라도 기분이 착잡했다.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건 정말 싫은 일이었다.
“간악한 마신의 교단이 이 땅을 멋대로 하는 걸 더는 방관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돕게 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대공을 무너트리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엊그제 바논 백작이 이사나에게 사병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를 비롯하여, 그와 교류하고 있는 근방 영주들 몇까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는 것 같았다. 그들 대부분이 대공과 마신 교단의 횡포에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로, 날이 좋아지는 대로 관련 회합이 있을 예정이었다.
덕분에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그냥 스쳐 지나는 곳이라면 모를까. 앞으로 한배를 탈 거라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좀 더 심도 깊게 파고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 누가 언제 죽었는지, 죽인 사람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죽였는지도.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현재 바논 백작 부인은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제 막 3개월에 접어들었다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단다. “예쁜 딸이 셋이나 있으니까 이번엔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백작 부인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을 때, 바논 백작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또 그렇게 말하는구려. 그대와 나의 아이라면, 난 아이의 성별이 무엇이든 상관없소.”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여주면서. 귀족들은 대부분 정략혼을 한다던데, 금슬이 상당히 좋은 부부였다. 젊은 축인데도 벌써 아이가 넷이나 되는 걸 보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어쨌거나 임산부를 위해서도 이 저택의 상황은 해결해 두는 게 옳았다. 태아는 형태가 불완전한 상태라 사념의 영향을 받기가 더 쉬웠다. 상황을 두고 보겠다고 마냥 내버려 둘 수 없게 됐다. 태어날 아이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제대로 사건을 알아보고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정화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난 내가 생각해도 고생을 사서 하는 타입 같아.”
라피스가 오지랖 넓다고 구박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 하지만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걸 억지로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언젠가는 모든 일에 초연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찝찝함이 남는 것보다 몸이 피곤해지는 쪽이 훨씬 더 편했다. 이게 변할 때까진 그냥 이런 팔자려니, 체념하고 살아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