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87화 (287/608)

제287화

“그래, 잘 생각했어. 파이어 버스터, 알리사를 잘 부탁한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싸우지 말고 잘 좀 지내봐.”

―엘 님께서 친히 당부하시는 말씀인데, 어쩔 수 없죠. 저도 노력하겠어요. 이 꼬마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조금 고까운 정도는 참고 넘겨볼게요. 전 이 꼬마와는 달리 어른이니까요.

“그, 그래.”

“웃겨, 정말! 누군 너 마음에 든대? 고까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하? 그러니까 본인이 꼬마라는 점은 인정한다는 거군요? 그런 점에서는 점수를 주겠어요.

“@#$^@#$%!”

……저기, 얘들아. 노력한다고 말한 지 아직 1분도 안 지났거든?

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한 소녀와 한 물건(?)을 보며 나는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얼마 전엔 다 큰 성인 남자들이더니, 이번엔 꼬마들이다. 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사이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엘뤼엔이 친구는 가려 사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쯤 되면 오히려 내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불화의 화신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거나. 스치는 생각을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어서 마음이 착잡했다. 아무래도 사념보다 나를 먼저 정화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덜컹.

낡은 나무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실내로 들어섰다. 남자의 어깨와 머리엔 하얀 눈덩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행색이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입구에 서서 눈을 털어내는 남자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제게 쏟아지는 호기심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실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탁자 앞이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일행들이 남자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가, 그의 금발에 가득한 물기를 보고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직도 내리고 있어?”

“아아, 틀렸어. 한동안 더 내릴 기세야.”

“젠장, 지금도 많이 쌓였는데. 며칠간은 여기서 꼼짝도 못 하겠네.”

붉은 더벅머리의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다른 일행들도 나란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쯤엔 출발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틀린 것 같았다.

남성 넷에 여성 둘로 구성되어 있는 일행은 대부분 가벼운 무장을 한 채였다. 한눈에 봐도 용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차림이었다. 그들은 황제군의 본대로 복귀하러 가는 중인 샴페인 용병단 일행이었다.

당초 2~3주 정도로 예상했던 일정이 기상 악화가 연이어지면서 이젠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해졌다. 내리기 무섭게 쌓이기 시작한 눈은 통행자들의 발목을 묶기에 충분했고, 샴페인 용병단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그나마 이번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에 여관을 잡아 다행이었다. 지난번엔 산 한복판에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조난당할 뻔했다. 간신히 빈 동굴을 찾아들어 가 눈을 피하긴 했지만 떨어지는 식량을 걱정하느라 내내 초조해해야 했다.

내친김에 그들은 종업원을 불러 술과 음식을 더 주문했다. 이 기회에 많이 먹고 체력이나 비축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이미 한차례 엄청난 양의 음식을 주문한 상태였다. 탁자 위엔 아직 식지도 않은 요리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고, 앞으로 나올 음식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들이 또 주문을 추가하자 여관 주인은 반가우면서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미리 선불을 내지 않았다면 음식값을 제대로 지불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돼지고기 부추볶음은 내 거다!”

“꺼져. 내가 시킨 거거든?”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으아아! 내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접시 하나를 두고 아이들처럼 싸우는 일행들을 보며 휴센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 철부지들을 이끌고 이 험난한 여정을 지속하고 있는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평생 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거란 불길한 예감도 함께 들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맞은편 왼쪽 가장자리를 향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비규환과는 상관없이, 묵묵히 잔 하나만 들고 있는 남자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잔에 담긴 맑은 액체는 휴센이 알기로 목이 탈 만큼 지독한 화주였다. 그는 그걸 마치 맹물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지켜보는 저의 목이 더 타는 것 같아 휴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걸신이 들린 것처럼 입 안에 음식을 밀어 넣고 있는 일행들 사이에서, 홀로 고요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남자는 그 외모 자체만으로도 매우 이질적인 존재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휴센만이 아닌지 아까부터 주위에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만 돌아봐도 이쪽을 힐끔거리는 눈동자가 쉽게 발견됐다. 그 모두가 남자를 훔쳐보는 시선들이었다. 이런 걸 피하려고 일부러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도 그다지 큰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휴센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눈길이 가면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좇게 된다.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휴센 역시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붓으로 정성껏 그려낸 그림 같았다. 벌꿀이 흐르는 것 같은 금발은 금사처럼 반짝거렸고, 피부는 진주로 빚은 듯이 희었다. 옅은 푸른색을 머금은 눈동자는 희귀하다고 알려진 블루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이렇게 생겼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솔직히 말해 휴센은 자신의 심미안이 꽤 높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가까이로는 동료인 매튜도 그렇고, 한동안 어울렸던 엘까지. 현실감이 없는 아름다움은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참이었다. 그렇기에 더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을 떠올려 보면 남자의 외모도 크게 놀라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뭐지?”

무엇보다 심장을 떨어지게 만드는 건 그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성엔 의미 없는 한마디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매력적인 음성이 아름다운 외모에 더해지면 더욱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그가 내뱉은 단 한마디의 울림에, 한참 음식에 집중하고 있던 일행들의 동작이 일시 정지됐다. 먹을 땐 눈앞에서 몬스터가 쳐들어와도 꼼짝도 하지 않는 일행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의 한마디엔 다들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는 것이다.

‘근데 왜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는……이런.’

일행들의 멀뚱한 시선을 받고 나서야 휴센은 남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느라 방금 전의 질문이 자신을 향해 건네진 것이라는 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휴센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으며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어, 사제님은 또 술만 드시는군요. 혹시 형벌의 교단에는 그런 교칙이라도 있는 겁니까?”

“교칙?”

“엘도 묽은 죽이나 음료 위주로만 먹었던 것 같아서요.”

“아아.”

의아해하던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그런 체질이고, 난 그냥 이게 취향일 뿐이다.”

“그, 그렇군요. 어쨌든 술만 드시지 마시고 다른 음식도 좀 더 드시지요. 빈속에 그렇게 독한 술만 드시면 몸이 많이 상하실 겁니다.”

“몸이 상해? 재밌는 걱정을 하는군.”

무심하기만 하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담겼다. 휴센은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멍청한 걱정이긴 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이제까지 내내 술을 주식으로 삼던 남자였다. 몸에 문제가 생겼으려면 진작 생겼을 것이다.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그를, 다른 일행들은 한심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한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들도 멀쩡한 정신으로 남자와 말을 섞을 자신은 없었다. 그나마 침착한 성정을 지닌 휴센이라 저 정도에서 헛소리가 그치는 것이다. 이릴의 경우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날씨가 매우 좋은데 이런 날엔 몬스터의 멱을 따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한참 동안 횡설수설했다. 쉐리와 마이티는 얼어붙어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편하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대할 땐 다들 입꼬리가 과장되게 치켜 올라갔고, 지진이 일어나듯 동공이 흔들거렸다. 심지어 함께한 날이 벌써 몇 날이건만 아직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언젠가 한 번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은 있었으나, 대답하기 귀찮다는 시선이(실제로는 그냥 무심히 쳐다본 것뿐이었지만) 돌아온 이후로는 아무도 다시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나치게 소심한 태도라는 건 알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대할 때면 마치 엄격한 어른 앞에서 선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자리에 없는, 그들의 동료인 매튜도 말을 붙이기 어려운 느낌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왠지 그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으면 꽤 볼 만한 사태가 벌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쯤이면 엘더 시 근처 아닌가? 매튜와 헤어졌던.”

매튜를 떠올렸더니 연상 작용으로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휴센의 중얼거림을 들은 쉐리가 지역을 가늠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네. 바로 이웃한 지역이야.”

“가는 길에 한번 들러 볼까? 얼굴 본 지 오래됐잖아.”

대규모 의뢰가 잦은 편은 아니기에 용병단이라 해서 항상 단체로 활동하진 않는다. 오히려 각자 개별 활동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 사람만 따로 떨어지게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튜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만,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휴센은 단장으로서 염려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제님, 괜찮으시다면 중간에 잠시 들러 봐도 되겠습니까? 지나는 방향이라서 일정을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가는 길이라면 상관없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남자가 선선히 허락하자 휴센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머지 샴페인 용병들도 오랜만에 동료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근데 단장, 벌써 꽤 시간이 흘렀잖아. 아직 매튜가 그곳에 있을까?”

“으음, 그런가?”

“엘더 시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거든. 벌써 지겨워지고도 남았을걸? 이미 떠나지 않았겠어?”

“응, 그러게요. 거기엔 없는 것 같네요.”

“……!”

그 순간, 그들의 대화 속에 돌연 귀에 익은 음성이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휴센과 샴페인 용병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들 앞에 후드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방금 막 들어온 건지 조금 전의 휴센처럼 눈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그가 후드를 젖히자 가장 먼저 새카만 흑발이 흐트러졌다. 초콜릿처럼 달콤해 보이는 피부,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를 발견한 일행들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튜!”

“세상에! 이게 누구야? 매튜잖아!”

귀신이라도 본 듯 격렬한 반응에 매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등장이었기에 휴센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매튜, 네가 왜 여깄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요? 근처에 의뢰가 있어서 들렀는데,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발이 묶였거든요. 이쪽이 더 가까워서 그냥 넘어왔는데, 여기서 낯익은 얼굴들을 다 보네요. 다들 이런 곳에서 뭐해요? 황제군 이동 경로는 아닌 것 같은데.”

느긋하게 일행들을 돌아보던 매튜의 눈길이 문득 어느 한 군데를 향했다. 일행 중 유일하게 앉은 채인 신관 남자가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못 보던 얼굴도 있고.”

아주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응시하는 눈빛이 왠지 묘한 것 같다고, 휴센은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순간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제대로 본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정이 생겨서 본대와 떨어졌다가 복귀하는 중이었어. 이분은 중간에 인연이 닿게 된 형벌의 사제님이셔. 엘과도 아는 사이시래.”

“아, 그래요?”

다시 남자를 돌아본 매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잘 웃는 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휴센은 살짝 숨을 삼켰다. 엘과 아는 사이라는 것 때문일까? 평소보다 태도가 부드러운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매튜라고 해요.”

“…….”

하지만 신관 남자 쪽은 아니었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매튜를 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번에야말로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샴페인 용병들은 실망한 얼굴이 됐다.

“모처럼 만인데 저도 합석해도 되나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합석하는 데 우리 허락이 왜 필요해? 자, 어서 이리 와서 앉아. 그러고 보니 식사는? 음식 더 주문할까?”

“아니에요. 먹고 왔어요. 저도 술이나 시켜주세요.”

매튜가 자리 잡은 곳은 신관 남자의 바로 옆이었다. 안 그래도 화려한 남자 옆에 만만치 않게 화려한 소년까지 더해지자 존재감이 두 배가 됐다. 샴페인 용병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휴센은 매우 복잡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면 재밌는 광경이 연출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마치 최후의 날이라도 찾아온 듯한 비장한 기분마저 들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한동안 떨어져 있었기에 그만큼 쌓인 이야기들이 많았던 참이었다. 매튜 쪽에서 먼저 지난 안부를 물어오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샴페인 용병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흥겨운 분위기에 술이 더해지면서 자리는 빠른 속도로 무르익어 갔다. 그동안 신관 남자는 홀로 동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랬기에 새삼스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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