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86화 (286/608)

제286화

내게 준 서클렛도 그렇고, 돌이켜보면 라피스는 은근히 수집가 기질이 있는 편이었다. 황실의 보물에 마신전의 보물도 갖고 있는 녀석이 유니콘의 눈은 노리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짐작이 틀리진 않았는지 그가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얼굴로 대답했다.

“구하려고 해 본 적은 있어. 결국 못 구했지만.”

“헉, 네가 구하려고 했는데 못 구했다고?”

“일단 매물이 있어야 구하든가 말든가 하지.”

“정말 엄청 귀한가 보네.”

그의 자산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디 가서 돈이 부족해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는 아닌 건 분명하다. 정 안 되면 힘을 동원하거나 훔치기라도 할 녀석이었다(서클렛의 출처에서 이미 전적이 있다시피). 그런 녀석이 못 구했다니.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한때 어느 거부가 집요하게 사들였다고 하더군. 그 이후로는 추적이 불가능했어. 보통 유니콘의 눈은 보석으로 활용하는 편인데, 그자는 전부 흡수하는 데 쓴 모양이야.”

“전부?”

“전부. 보석으로 활용했다면 이렇게까지 흔적이 남지 않을 리가 없거든.”

하긴, 보석은 어떤 경로로든 결국 다른 사람에게 유통되기 마련이다. 평생 끌어안고 살았더라도 죽어서까지 소유하지는 못할 테니까. 어딘가 묻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귀한 걸 전부 묻었다고 보느니 차라리 흡수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으음, 취미가 고약한 사람이네. 그걸 먹어서 뭘 하려던 거지?”

“알 게 뭐야. 젠장, 하나만 있어도 가공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야, 퍼런 엘프. 특별히 내가 배려해 주지. 눈 한 개만 내놔.”

“저리 꺼져, 도마뱀.”

시벨리우스가 경멸하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라피스의 눈도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도마뱀? 겁을 상실했냐? 지금 내가 엘이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것 같아?”

“그러는 너야말로.”

제2차전을 알리는 서곡이 울렸다. 이번엔 나도 따로 경고하지 않았다. 나는 생긋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촤아악!

경쾌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여장을 풀기 무섭게 본격적으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짐작한 바대로 상당히 거센 폭설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몰아치는 눈발에 영내 사람들의 모든 외부 활동이 중단됐다. 눈은 바닥에 닿는 족족 그대로 쌓였고,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 반나절이 지났을 땐 마을 자체가 눈에 묻혀버린 것 같았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사방에서 운디네와 슈리엘들이 뛰노는 광경이 보였다. 이러다 눈이 그칠 즘엔 터널을 뚫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신을 놓은 듯이 내달리고 있는 정령들을 향해 가볍게 경고의 눈짓을 보냈다. 어지간하면 내버려 두는 편이지만 눈 때문에 전쟁이 너무 길어지는 건 곤란했다. 이 심란한 저택 안에서 온종일 갇혀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요즘 잠자리가 뒤숭숭한 것 같아.”

“너도 그래? 나도 요즘 좀…….”

“자고 일어나도 개운한 기분이 안 들지 않아? 항상 피곤을 달고 사는 기분이야.”

“맞아, 맞아. 정말 그래.”

“몸이 허해진 걸까?”

복도를 걷고 있는데 멀찍이서 백작저의 고용인들이 잡담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예상대로 다들 알게 모르게 사념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진행이 그리 빠른 것 같진 않은데 언제쯤 본격적으로 이상 현상이 나타날지 궁금했다. 아마 완전히 심화되어 불거지려면 몇 년은 더 걸릴지도 몰랐다.

이사나와 다른 일행들에겐 이런 쪽 사정은 아직 알리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사연인지, 누가 얽혀 있는 건지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가주인 바논 백작부터 고용인들까지 백작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의심스럽지만, 반드시 내부인의 짓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지금은 말해 봤자 괜한 분란만 조성하는 꼴이 될 게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사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대공 쪽에서 알리사를 공격했었던 이후부턴 경계심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워낙 내색하는 편이 아니라 처음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 들어 알리사의 안전을 당부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한발만 늦었어도 아찔했을 순간을 겪은 만큼 충분히 예민해질 만도 했다. 황태자 앞에선 알리사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거라고 의연하게 말했지만, 실제론 전쟁에서 이만 빠지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을 터였다.

당시 정황에 의하면 대공의 기사들은 알리사의 정체를 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했다고 했다. 카터스의 황태자를 통해 분란을 일으키려는 계획과는 별개로, 대공 쪽에서 알리사를 제거할 생각이 있었다는 거다. 적군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를 최우선으로 노리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전략이다. 알리사가 여신의 딸이라 불렸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던 사고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하면, 대공이 또 암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택의 수상한 사정까지 알게 되었다간 이사나는 이곳에서 지내는 내내 단 한 순간도 맘 편히 쉬지 못할 거다.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밝혀질 때까진 대공과 결부 지어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을 테니까. 사방의 모든 것이 알리사를 위협하는 무기로 느껴질 터였다.

알리사가 대공의 표적이 된 것엔 내 공헌(?)이 가장 큰 만큼, 나 또한 책임을 깊이 통감했다. 지금까지는 위험해져도 내가 전부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생각하던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눈을 잠깐 뗀 몇 분 사이에도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 존재였다. 다소 관조하는 기분으로 임해 왔던 전쟁의 무게가 새삼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사나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약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백작 일가에게서 수상한 기색을 느끼진 못했다. 가주인 바논 백작은 처음 느꼈던 점잖은 인상 그대로, 우직하게 맡은 책임을 다한다는 느낌이었다. 의례적인 선에서 예의를 차리는 태도이긴 했지만 소홀하게 대하는 부분도 없었다. 오히려 과하게 환심을 사려는 태도보다는 이쪽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게다가 우리 쪽과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군요. 대공 쪽의 주장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습니다만, 그의 실체가 그렇게 추악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스텔스 영내에서 묵게 된 첫날.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이사나가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을 때, 바논 백작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입을 뻐끔거리다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백작.”

“아뇨,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리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옵니다, 폐하.”

“놀라지 않아 탄식이 나온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걸 대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는 백작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폐하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마신의 교단은 꽤 오래전부터 횡포가 심했습니다. 마신의 신성제국이라는 명칭을 앞세워 영주들 위에 군림하려 들었지요. 지방 영주들 중에선 마신의 교단을 싫어하는 자들이 꽤 될 겁니다. 대공의 반란은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사실 저는 신관인 대공이 섭정을 할 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된 순간 더는 황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관이란 모름지기 신을 섬기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게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지요. 대륙 역사 어디에도 교단에서 황권을 넘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마신의 교단은, 가져서는 안 될 야욕을 품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그런 행태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바논 백작은 진심으로 분노했고, 한편으로는 후련해했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신의 교단에 대한 반감이 이번 일과 맞물리면서, 그 스스로 그들을 증오할 당위성을 찾은 것 같았다. 일단 그것만 봤을 땐 우리한테 해가 될 자는 아니었다.

“엘 님!”

“……!”

뒤에서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한창 다른 곳으로 흘러가던 의식이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돌아보았더니 알리사가 씩씩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알리사. 가급적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게다가 왜 혼자 있는 거야? 시벨은 어디 가고?”

지난 사건 이후, 나와 시벨리우스는 알리사를 절대 혼자 다니게 하지 않았다. 내가 없을 땐 시벨리우스가, 그가 없을 땐 내가 반드시 곁을 지키기로 한 상태였다(라피스의 협조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처음부터 제외다). 지금은 식사 시간이라 나 혼자 빠져나왔던 참이었고, 그동안 알리사의 곁은 시벨리우스가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당연히 옆에 붙어 있어야 할 그가 보이지 않았다. 사유는 매우 황당했다.

“아까 마커스 백작님의 부관들한테 잡혀갔어.”

“뭐?”

“마커스 백작님은 관청 쪽에서 지내잖아. 오늘 나온 점심이 굉장히 맛없었나 봐. 시벨 씨가 만들어 준 크림 수프를 드시고 싶다고 울었대.”

“…….”

“시벨 씨는 끝까지 안 가겠다고 버텼는데 내가 갔다 오라고 억지로 보냈어.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나 지금 혼자 있는 거 아냐.”

“혼자가 아니긴 뭐가 아니……아.”

정령을 소환한 상태도 아닌데 무슨 억지를 쓰는 건가 싶어서 얼굴을 찌푸리다가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알리사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먹물처럼 새카만 빛을 머금은 예리한 자태의 장검을.

“……파이어 버스터네?”

―오호호호호홋!

그 순간, 익숙하고도 달갑지 않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알리사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네, 바로 접니다! 엘 님께서 그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을 계속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제가 그리우셨나요? 아아,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제가 이곳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셨다거나, 그런 애가 있었다는 것도 까먹으셨다거나. 그런 서운하고 섭섭한 일이 있었을 리는 물론 당연히 없겠죠. 왜냐면 저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정령검이니까! 숭고하고도 위대하신 이프리트 님의 힘을 계승한, 기적의 산물! 말 그대로 보배롭고도 경이롭고도 아름답고도……!

“알리사, 그거 집어 던져버려도 돼.”

“정말?”

―아아아아앗! 안 돼요! 싫어요! 입 다물게요! 던지지 마세요! 제 완벽한 몸에 흠집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비명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알리사가 좋다 말았다는 표정으로 들어 올렸던 팔을 내렸다. 나는 질린 기분으로 파이어 버스터를 바라보다가 알리사에게 어떻게 된 거냐는 시선을 던졌다.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알리사가 울상을 지었다.

“이사나 씨가 갖고 다니래.”

“……저런.”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만했다. 내가 알기로 그간 파이어 버스터는 그 끊임없고 가공할 수다 때문에 아공간 배낭 속에 봉인(?) 처분을 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알리사의 안위를 염려한 이사나가 결국 다수의 희생을 감수하기로 한 모양이다. 파이어 버스터를 봉인 해제하게 만든 원인이자 동시에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한 알리사는 절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엘 님이 이사나 씨 좀 설득해 주면 안 돼? 난 싫다고 했는데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대. 안 가지고 다니면 나한테 사람을 붙여서 클모어로 다시 내려보내겠다지 뭐야?”

“와, 이사나가 그렇게까지 말했어? 진짜 단단히 결심했구나.”

“감탄할 일이 아냐! 지금 이게 말이 돼? 내 몸은 나 혼자서도 건사할 수 있어! 내가 왜 이런 푼수 같은 검을 갖고 다녀야 하는 거야?”

―잠깐만요! 지금 말 다했어요? 푼수라뇨! 고귀한 정령검에게 존경심을 담아 부르지는 못할망정! 뚫린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네요?

“고귀하긴 얼어 죽을!”

―어머어머, 이 여자가 말하는 것 좀 봐? 나라고 너 같은 애송이랑 같이 다니는 게 좋은 줄 알아요? 몇 번이나 거절해도 용사님이 자꾸만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이 결정한 거라고요! 가여운 소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셈치고 큰마음 먹고 받아들여 줬더니!

“누가 받아들이래? 난 네 은혜 같은 거 바란 적도 없거든? 네가 있으면 오히려 머리만 아파진다고! 너도 나랑 다니는 거 싫을 거 아냐? 이사나 씨한테 다시 데려다 줄 테니까 이런 거 못 하겠다고 말해!”

―아뇨! 안 됐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이 파이어 버스터! 한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신의의 검이니까요! 게다가 난 당신과 다르게 배포가 남다르거든요!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좁쌀처럼 옹졸하고 편협해도 그걸 너그럽게 수용할 만한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옆에 붙어 있어 드리겠어요! 이제 당신은 계속 머리 아플 일만 있겠네요? 아이고, 안타까워서 어쩌면 좋아요?

“아씨, 난 정말 얘 싫어! 어떻게 좀 해줘, 엘 님! 응?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사나 씨가 엘 님 말은 듣잖아! 응?”

정신없이 쏟아지는 목소리들에 오히려 내 머리가 아파졌다.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볼을 긁적거리다가 알리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 알리사. 이번엔 나도 이사나의 손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아.”

“엘 님까지!”

“그렇게 정색하지만 말고 차분히 생각해 봐. 우린 아직 전쟁 중이잖아. 몸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아. 그건 너도 동의하지 않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얘는 좀…….”

“파이어 버스터는 그냥 평범한 검이 아냐. 결정적으로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 네 목숨을 몇 번쯤은 구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귀물이지. 난 이 검을 네게 준 이사나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할 것 같은데? 이사나를 위해서라도 파이어 버스터와 잘 지내보면 안 될까?”

“…….”

알리사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이어 버스터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보다, 이사나가 자신을 위해 마음을 쓴다는 사실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알리사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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