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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84화 (284/608)

제284화

“시조님은…… 겉모습은 인간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건조하게 건네지는 음성에 시벨리우스가 힐끗 눈동자만 굴려 아셀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엘프인 그의 외모를 유니콘과 비교하여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무시하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시벨리우스 쪽에서 대꾸가 이어졌다. 아셀은 흠칫했다가 다시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분은 은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

“파란색 눈동자도 아니었죠.”

“그렇군.”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시조님의 혈족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잘라 말하는 어조는 얼어붙을 것처럼 냉담했다. 그러나 냉담한 반응은 시벨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믿으라고 한 적 없어.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봐, 난 너랑 이런 대화를 하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아. 그 정도는 알아서 눈치채줬으면 좋겠는데?”

싸늘한 시선에 아셀이 움찔거리다 입술을 악물었다.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쥐다가 힘없이 몸을 돌렸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지켜보는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너무 심하게 말한 거 아니냐고 한마디 해줄까 하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닌 척해도 그 역시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 보는 건 어때?”

슬며시 물었더니 시벨리우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흐리게 웃었다. 어떤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는 건지 이해했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말했잖아, 엘. 형님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 심지어 몇 세대나 지난 후의 후손이라니. 그냥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지.”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거잖아?”

“유니콘의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흥미롭긴 해. 하지만 그것뿐이야. 모르는 녀석이랑 별로 얽히고 싶진 않아.”

“흠. 그럼 나랑 얘기하는 건 괜찮아?”

“응?”

“아셀이 한 말을 들으니까 나도 좀 궁금해졌거든. 형이랑은 별로 안 닮았나 봐?”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시벨리우스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그가 한참만에야 망설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외모가 닮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말했다시피 형님에 대해선 기억나는 게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태어났을 땐 형님도 은발에 푸른 눈동자였을 거야.”

“태어났을 땐 이라니?”

“룬의 혈통……그러니까 우리 일가는 전부 은발에 푸른 눈동자만 타고나거든. 근데 형님은 마을을 나갈 때 룬의 힘을 폐했다고 들었어. 아마 그래서 색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흐음. 그러고 보니 그 룬의 혈통이라는 건 대체 뭐야? 처음 들었을 땐 귀족 같은 개념인가 보다 했는데. 룬의 힘이라는 게 따로 있는 걸 보면 단순히 계급인 것만은 아닌 것 같네?”

그 용어를 처음 접했던 건 시벨리우스가 봉인에서 풀려나온 직후, 카노스로부터였다. 정확히는 루카르엠으로 변장하고 있던 때의 그에게.

「끊어진 줄 알았던 룬의 혈통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때 루카르엠이 지었던 호기심 어린 표정과 감탄이 담긴 눈빛을 기억한다. 시벨리우스가 날선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던 것도. 그 순간엔 단순히 마족이라서 경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그가 하는 말 자체에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 같다.

당시 들은 바에 의하면 유니콘 일족은 룬의 혈통을 잃었기에 구색만 갖추고 있는 상태라고 했었다. 덕분에 시벨리우스가 그들 일족에게 꽤 중요한 존재라는 건 알았는데, 그 뒤로 더 자세하게 물어보진 못했다. 그럴 기회도 없었고, 시벨리우스도 일족에 관한 언급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사실 지금도 물어보는 게 조심스럽긴 했다. 다행히 시벨리우스의 얼굴에서 불쾌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대신 조금 난처해보였다.

“으음, 뭐라고 설명하지. 본질은 같은 유니콘이긴 한데, 룬의 혈통은 타고나는 성향이 약간 달라. 조금 더 특이한 자질을 지닌다고 해야 하나.”

“하이 엘프처럼?”

“응, 맞아. 그런 식이야.”

바로 이해한 것이 기뻤는지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같은 엘프 일족이긴 하지만 조금 다른 피를 지닌 하이 엘프. 그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콘 일족들 사이에서도 좀 더 특별한 개념을 가진 존재들이 따로 분류되는 것 같았다.

“유니콘은 원래 날개가 없어. 날개를 지니는 건 룬의 혈통뿐이지. 과거엔 정의의 신 루세프와 천군의 지휘관을 태우고 다니는 역할을 했다고 해. 그래서 천마라고도 불렸어. 마족들은 빈정거리는 의미에서 혈마라고 부르지만.”

“아. 아스가 그렇게 불렀던 것 같은데.”

“맞아, 그 망할 꼬맹이. 누가 마족 아니랄까봐 어린 주제에 못된 것만 타고나서는.”

투덜거리길 잠시, 시벨리우스는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외향도 그렇지만, 룬의 혈통은 약간의 특이 능력을 갖고 있어.”

“영안과 주술 능력 외에 또 다른 거 말이야?”

“응. 간단히 말하면 신의 힘을 가져오는 능력이랄까.”

“신력 같은 건가?”

“조금 달라. 단순히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신을 몸에 받아들이는 거거든.”

“……!”

신을 몸에 받아들인다니. 아무래도 접신 같은 능력인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라 굉장히 놀라웠다. 지금까지 시벨리우스는 그런 능력에 대해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으니까.

당황한 내게 그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룬의 혈통, 간단히 줄여 ‘룬’이라고 불리는 그들 일가는 그 육신 자체가 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때 타고난 자질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신과 시간의 한계가 정해지는데, 그들을 창조한 ‘정의의 신 루세프’ 만은 제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즉, 유니콘 일족에게 룬이란, 그들의 창조신과 연결되는 통로이자 매개체인 셈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굉장히 뛰어난 룬이었다고 들었어. 상급신을 받아들이고도 며칠씩 지내는 것도 가능했다지. 그래서 그 힘을 스스로 폐하고 사라졌을 때 다들 충격이 컸다는 것 같아.”

“버릴 수도 있구나.”

“응, 별로 쉽지는 않지만. 몸을 많이 망친다고 알고 있어. 다시는 날개도 쓸 수 없게 되고.”

“왜 그렇게 한지는 모르는 거야?”

“정확히는 몰라. 아마, 인간 여성을 사랑하게 됐었다는 것 같아. 그 여성과 혼인하려고 했는데 일족들의 반대가 너무 커서 그냥 본인이 일족을 떠나는 걸 택한 거지.”

“아.”

“하지만 아까 그 녀석이 그때 그 인간 여성과의 사이에서 시작된 후손은 아닐 거야. 형님이 사랑했다는 인간은 아이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니까. 그 후에 인간족이 한번 멸망하기도 했다니, 나중에 또 다른 인연을 찾은 거 같아.”

정황을 짐작해보는 시벨리우스는 왠지 불만에 찬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일족을 떠나 홀로 인간 세상을 떠돌아다녔을 형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시벨?”

“유니콘은 일생 단 하나의 반려만 갖는 일족이야. 하지만 형님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야.”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지독하게 허탈했다. “그것도 일족을 버렸기 때문일까?” 그의 시선이 공허함을 담고 허공을 훑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끔찍한 적막에 잠길 것 같아 나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 시켰다.

“아, 그, 그렇지! 시벨, 너도 룬인 거잖아? 그럼 너도 접신 할 줄 아는 거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는데 막상 묻고 나니 궁금하긴 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엘뤼엔이나 카노스가 그의 몸에 빙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색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연락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기대감을 담고 바라보자 시벨리우스는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살짝 피했다. 이어진 대답이 뜻밖이라서 나는 다시 당황했다.

“난 못해.”

“어…… 그, 그래? 전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네.”

“아니. 룬이라면 다 가능한 일이긴 해. 일반적으로는.”

“어? 그런데 왜…….”

“그러게 말이야. ……난 이상하게 안 되더라고.”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본능적으로 그의 오래된 상처를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래서 형님이 정말 싫었어.”

* * *

진군이 다시 시작됐다. 바람도 불지 않고 구름 한 점도 없는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무르익어 가는 겨울이 잠식한 계절, 온도는 날이 갈수록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한층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병사들의 옷은 두꺼워졌다. 모포를 두르고 수시로 불을 쬐게도 했다. 그런데도 동상 피해가 속출했다. 이젠 야영은 엄두도 낼 수도 없었다. 이보다 온도가 더 떨어지면 정말로 전쟁을 잠시 중단해야 할지도 몰랐다.

자신만만하게 체류를 선택한 황태자는 그리 까다로운 동행자는 아니었다. 장시간의 진군도 잘 견뎠고 이동 중의 단출한 식사에도 무난히 적응했다. 단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이 모든 일들을 할 때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이가 따라붙는다는 것이었다. 장갑 같은 부산물을 챙기는 건 물론, 물 한 잔도 스스로 따라 마시는 법이 없었다. 옆에서 챙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런 대접을 받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 고고하고 우아한 귀족의 표본이었다.

사실 그게 정상적인 모습이긴 했다. 그는 황족이었고, 날 때부터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온실 같은 궁궐에서 한평생 고운 대접만 받고 자란 존재였으니까. 척박한 행군에 불만 없이 따라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되레 시중인이 없는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적응한 이사나가 지나치게 털털한 셈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사나는 나와 둘이 다니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이미 시중을 필요로 한 적이 없었다. 그땐 친위대와 막 떨어져 모든 것이 생소했을 텐데도 눈치껏 주변의 분위기에 알아서 맞췄던 것 같다. 지금까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요 근래 황태자의 모습을 보고나니 이사나가 얼마나 손이 가지 않는 성격이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지나치게 요구사항이 없어서 문제가 된 적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황태자가 제아무리 귀족적인 행동을 한들 우리 쪽에 피해를 주는 형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모습이 그다지 불편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오히려 이제껏 주위에 없던 타입이라 조금 신선했다. 당장 눈앞의 친위대도 그렇고, 선발대 안에도 귀족이 몇 있긴 했지만, 그들은 군인에 가까운 편이라 그런지 황태자가 지니고 있는 만큼의 태가 나진 않았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황태자는 마치 귀족으로 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시선이나 손짓, 걸음걸이,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기품이 넘쳐흘러서 누가 보기에도 높은 신분이라는 게 보였다. 실제로 황태자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를 대할 땐 확연히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모습들을 구경하는 것이 꽤 재밌었다.

황태자가 시중을 필요로 할 때, 옆에서 그 역할을 맡는 이는 대부분 아셀이었다. 첫날 이후로 그와는 다시 대화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건너 건너 들려오는 정보를 통해 신상을 조금씩 파악하게 됐다. 당연히 귀족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평민이었다. 황태자와는 아카데미에서 인연을 맺었는데, 그를 마음에 들어 한 황태자가 여러 차례 권유하는 것을 받아들여 보좌관이 되었다고 했다. 아직 졸업 전이라 임시직이지만, 별 탈이 없으면 졸업한 후에 정식 임명이 내정되어 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다 틀렸습니다. 태자 전하가 아카데미를 몰래 빠져나와 이곳에 있다는 게 황실에 알려지면 전 그날로 당장 잘릴 겁니다. 목이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아셀의 목소리가 한탄을 담고 흘러나왔다. 황태자 일행은 이사나 바로 옆에 배치된 상태였고, 그 지점은 알리사의 부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다 보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대화 내용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자넨 아직 어린데 태자 전하를 모시느라 고생이 많겠군.”

“고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전하가 사람을 얼마나 많이 부려먹는데요. 제 능력을 좋게 봐주시는 건 고마운데 아주 등골까지 빼 드시려고 하시니, 얼마나 고초가 큰지 모릅니다. 아무튼 전 목숨이 위험해지면 바로 망명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님들, 미리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진군을 시작한 며칠간. 내가 아셀에 대해 파악한 점에서 가장 의외였던 건 그가 꽤 넉살이 좋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사나의 친위 기사들과 쉽게 친해졌다. 몇 사람과는 벌써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황태자의 다른 일행들이 딱 선을 긋고 저들끼리만 어울리는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그가 주로 어울리는 건 술자리였다. 날이 추워질수록 기사들은 체온을 덥히기 위해 술을 가볍게 마시는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아셀도 꼭 끼어들어 얻어 마시곤 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한 애주가인 것 같았다. 그의 신상에 대한 정보들도 주로 그런 자리에서 흘러나왔다.

“주량이 제법인 걸? 이 술은 도수가 꽤 높은 편인데.”

“술을 꽤 일찍 접했거든요. 어지간해선 잘 취하지도 않습니다.”

“몇 살부터 마셨기에?”

“시작은 아홉 살쯤 이었던가요? 제대로 마시기 시작한 건 열두 살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홉 살? 세상에, 정말 빠르군. 그때부터 술 맛을 알았단 말이야? 난 그 나이 땐 너무 써서 입에도 대지 못했는데.”

“하하, 저도 맛으로 먹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맛이 아니면?”

“으음, 뭐랄까. 이걸 마시면, 조금 덜 귀찮아졌거든요.”

술이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아셀의 얼굴에 얼핏 씁쓸한 표정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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