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82화 (282/608)

제282화

“스왈트 제국의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카터스의 라온휘젠입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황태자의 태도에선 숨길 수 없는 권력자의 도도함이 묻어났다. 뼛속까지 남위에서 군림하기만 하던 자가 지닐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상태도 무척 좋아 보였다. 반대로 뒤쪽에 시립한 아셀 일행들은 얼굴이 전부 거무죽죽했다. 눈 밑이 퀭한 걸로 보아 간밤에 한숨도 잠들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아마도 원인 제공을 했을 한 사람으로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제는 여러 가지로 결례가 많았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황태자. 무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치료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분명 평화로운 대화인데 한기가 드는 것은 왜일까. 그런 생각을 한 건 나만이 아닌지 아셀 일행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그들이 황태자의 뒤를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알리사의 호위 자격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상태였다. 아셀 일행과는 바로 맞은편인 자리라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기가 편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셀 일행은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러자 나직한 어조의 음성이 떨어졌다.

“너 어제 무슨 사고 쳤냐.”

“…….”

날카롭게 내려다보는 붉은 시선의 주인은 라피스였다. 평소엔 이런 자리에 죽어도 함께할 녀석이 아닌데, 새로 나타난 일행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오늘따라 집요하게 따라붙은 참이었다. 정작 평소 주어진 역할에 성실하게 임해 온 시벨리우스는 오히려 공석이었다. 식사 준비가 한창인 시간이라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아무래도 취사병들에게 붙잡힌 것 같았다.

“그냥, 다친 황태자를 치료해 줬을 뿐이야.”

“저건 아무리 봐도 겁먹은 얼굴인데. 제 주군을 치료해 준 은인을 대하는 태도가 저렇다고?”

“……그 전에 알리사를 찾아내느라 물의 기억을 쓰긴 했지.”

“하?”

“그 이전에는 땅도 좀 파고. 지진도 좀 일으켰나.”

“아예 정체를 다 밝히지 그랬냐?”

아니, 나라고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냥 시기에 따라 필요한 능력을 썼을 뿐인데 그게 미묘하게 얽혀 들어가서 왕창 꼬였을 뿐이다. 당장 한시가 시급한데 몸을 사리느라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번만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부분도 많긴 했지만.

급격하게 뜨끔해져서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있자니 나를 대하는 라피스의 눈길이 더욱 하찮아졌다. 무척이나 한심해하는 표정이라 나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뭐, 굳이 드러내지 않는 거지, 반드시 숨겨야 하는 건 아니거든?”

“아, 그러셔? 소중하디소중한 네 인간 계약자의 입장을 그렇게 배려하실 땐 언제고?”

어제는 시벨리우스가 그러더니. 이것들이 왜 돌아가면서 이사나를 걸고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가볍게 흘겨보았더니 라피스도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시선을 던졌다. 잠시 의미 없는 눈싸움이 이어졌다.

“그건 국내 여론 형성 때문이고. 저 사람들이야 외부인들이잖아. 어차피 본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인데 의심을 하면 어떻고 알아보면 좀 어때? 그리고 어젠 이사나도 감안하고 있는 것 같았어. 어느 정도 과시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

“흐응, 저거한테 말이지.”

라피스로부터 ‘저거’라고 불린 황태자는 현재 뚫어질 만큼 빤히 알리사를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알리사가 노골적으로 어색함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반응 자체를 즐기는 얼굴이었다.

“어제는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대, 그런 외모였군.”

감상하듯 살피던 황태자가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 그래서 뭐, 요? 불만 있어, 요?”

흠칫 놀란 알리사가 모호한 존댓말로 쏘아붙였다.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다들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단 한 사람, 황태자만은 웃었다.

“아니. 그대, 눈동자가 굉장히 아름답다. 노을로 물들인 것 같은 주홍빛이군. 그대와 잘 어울려.”

그는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화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이어진 칭찬에 알리사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잠시 멍해졌다가 황급히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고 황태자는 다시금 미소 지었다. 마치 이 공간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으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내 옆에 있는 붉은 도마뱀에게서 몹시 자주 접하곤 했던 바로 그 향기였다.

“제 용건은 이미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시선은 여전히 알리사에게 고정한 채로, 황태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 반려를 데리러 왔습니다.”

누가 라피스의 동류 아니랄까 봐 직구로 핵폭탄을 터트리는 것마저 똑같았다. 사방에서 (심지어 그 일행들조차)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 저 사람이랑 좀 안 맞을 것 같아.”

“좀 재수 없는 녀석이긴 하네.”

응, 널 닮아서.

남의 일처럼 중얼거리는 라피스에게 한마디 덧붙이려다 참았다. 저 녀석 성격에 그런 말을 들었다간 ‘더 재수 없는 게 뭔지 보여 주겠다’며 당장 사고를 치고도 남을 테니까.

“반려라…….”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이사나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가 차분한 시선으로 알리사를 바라보았고, 알리사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태자가 말하는 반려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는 알드레프 경을 말하는 겁니까?”

알고도 묻는 건 그저 확인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같은 경우엔 견제에 더 가까울 터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라피스 류가 될 조짐을 드러낸 자답게, 황태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알리사에게 시선을 돌려 이사나를 응시하는 게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그녀와 전 운명의 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제 반려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인. 이런 험난한 전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음성 또한 표정만큼이나 단호하고 거침없었다.

“참전은 그녀의 결정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허나 폐하께서 진정으로 그녀를 위하신다면, 어린 소녀에게 지금 이 환경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도 살펴주셔야 합니다.”

“……확실히, 소녀의 정서에 좋은 환경은 아니죠.”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제 나라 카터스엔 그녀를 위해 마련된 성이 있습니다. 안전하고 아늑하고, 마음껏 누리며 지내기에 부족한 부분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잠시간 지독한 적막이 흘렀다. 이사나는 짧게 숨을 내쉰 후, 다시금 알리사를 응시했다. 그녀의 의사를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알리사는 세찰 정도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제야 빈틈없던 황태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아셀 일행도 덩달아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보다시피, 알드레프 경은 싫다고 하는군요.”

“폐하께서도 그녀가 이런 곳에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셨습니다.”

“네, 동의합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진행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자.”

“그건, 황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하, 황제가 할 말이 아니라.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그렇다면……!”

“기대에 어긋났다면 미안합니다, 태자. 난 그녀 앞에서는 한 번도 황제였던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그게 황제인 내 권위를 상하게 한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황태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전 이사나의 그 말이 상당히 충격이었던 듯했다. 알리사는 완전히 감동한 얼굴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아마도 나 역시 비슷한 표정일 것이다. “어떡하지, 라피스? 우리 이사나가 너무 멋있어!” 속삭거렸더니 라피스가 옆에서 혀를 끌끌 찼다. 팔불출 고슴도치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 강렬하게 내리꽂혔다.

말 한마디로 단숨에 우세를 차지한 후에도 이사나는 여전히 차분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그렇기에 더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다소 여유로웠던 황태자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사람들은 모두 숨죽이고 두 권력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운명의 별이라 했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태자는 모르고 있겠지만 얼마 전 카터스 제국에서 사람이 찾아왔었습니다. 황실 수석 마법사인 올리반 폰 다니멜이었죠. 실종된 본국의 황태자를 찾는다며 내게 도움을 구하더군요.”

황태자의 얼굴이 굳는 것과 동시에 뒤에 있던 아셀 일행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 일행을 바라보았다. 실종이라니. 어쩐지 황태자의 일행치곤 조촐하다 싶더라니, 황성에 알리지도 않고 가출했던 모양이다. 훤칠한 청년의 모습인 데다 말투 또한 고압적이라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는 이사나와 동년배라고 했었다. 즉, 아직 성인이 아닌 것이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날 다니멜도 한참 동안 어느 전설에 관해 떠들다 갔습니다. 제왕의 별과 반려성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지금 태자가 말하는 반려가 그와 관계가 있는 것 같군요. 태자도 자신이 제왕의 별을 타고 태어났다 생각합니까?”

“여러 천문학자와 점성술사들이 거듭해서 확인해 준 사실입니다. 카터스 제국의 천문학이 그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는 건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신뢰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저, 전하!”

뒤쪽에 서 있던 아셀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미치셨습니까!” 라고 외치고 싶은 걸 온갖 힘을 다해 참는 얼굴이었다. 다른 제국의 황제 앞에서 제 자신을 드높이는 것으로 모자라 학문 수준까지 언급했으니 경악할 만도 했다. 이사나도 이번만큼은 차가운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제위가 내정된 태자라고 하나 황제인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다니. 태자의 자신감이 도가 지나치군요. 내가 우습게 보입니까?”

“폐하의 기분을 언짢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으나 말투도 그렇고, 표정 또한 전혀 위축된 기세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이사나의 신분이 더 높지만 라온휘젠 태자 역시 강국의 황제가 될 몸이었다. 심지어 나이마저 비슷하니 연륜이나 역량에서 차이가 날 것도 없었다. 황태자의 입장에선 기죽을 이유가 딱히 없긴 했다.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런 전설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내가 판단한 건 태자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본국과 충분한 의논을 거치지 않은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것, 차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만큼 태자가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태자가 단지 운명이라는 이유만으로 권한을 행사하려는 것도 좌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도도한 황태자도 지금 이사나가 하는 말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을 다문 그를 향해 이사나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스왈트 제국 황제인 내 이름을 걸고, 알리사는 그녀의 의사를 가장 최우선으로 존중받을 겁니다. 그녀가 원하는 한, 강제로 이 땅을 떠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 결정에 폐하의 사감은 없습니까?”

“내 사감?”

“폐하가 그녀를 칭하길,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전 어릴 때부터 제왕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 별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말했다시피 난 그런 전설에 관심 없습니다.”

“아뇨,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와도 아주 상관이 없는 얘기가 아닌 것 같으니까요.”

“……?”

“혹시 프라워스 전쟁에 대해서 아십니까?”

“2백 년 전, 카터스 제국과 알폰프 제국 간에 벌어졌던…….”

“네, 맞습니다. 꽃의 여신 프라워스 이름에서 따온, 말 그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었죠.”

뜻밖의 역사 이야기에 모두의 시선이 황태자의 입을 주시했다. 그의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폐하께선 관심 없다 하셨지만, 반려성과 제왕의 별은 항상 꾸준히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하나의 반려성에 두 개의 제왕의 별이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 선대였고, 다른 쪽은 알폰프 제국에서 촉망받는 재상이었지요. 프라워스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한, 철혈 재상 오비스 말입니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왜인 것 같습니까?”

“…….”

그거야 이번 세대의 제왕의 별도 둘이니까.

황태자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답을 중얼거리며,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반려성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부터가 범상치 않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사나는 조금 굳은 얼굴이었다. 명석한 녀석이니 방금 전 들은 말의 의미쯤은 금방 파악했을 것이다. 그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알리사를 바라보았다. 알리사는 영문을 모를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였다.

“반려성이 이미 고향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연적을 통해 설득하려 하다니, 확실히 이번 일은 제가 어리석었군요. 제왕의 별이 두 개일 때 선택은 반려성의 몫이죠. 그녀가 당연히 제 것이라는 생각에 먼저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걸 잊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한 황태자가 알리사를 응시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그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자조적인 미소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폐하는 그녀가 원하는 뜻을 존중한다 하셨습니다. 그럼 그녀가 저와 함께 가겠다고 하면 그때도 그냥 보내주실 겁니까?”

“……그게 알리사가 바라는 일이라면.”

“그 대답, 부디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맞닿은 두 남자의 시선에서 전기가 튀는 것 같았다. 시선으로 무언가를 벨 수 있다면 진작에 둘 다 넝마가 되었겠다 싶을 만큼. 이미 주고받는 말도 무기나 다름없어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겉으로는 서로 예의를 갖춰야 하는 관계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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