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81화 (281/608)

제281화

“엘 님!”

“오셨군요, 엘 님!”

“오랜만입니다, 시벨리우스 님!”

“와아, 다들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출정식 이후로는 내내 떨어져 있던 탓에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뜻밖의 재회라는 점에서 더욱 반가웠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인사를 받고 있는데 누군가 쪼르륵 달려와 품에 안겨 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불어 있는 알리사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엘 님!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미안. 상황을 늦게 알게 됐어.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등을 토닥여 줬더니 알리사는 나한테 더 꽉 매달렸다. 안심해서라기보다는 필사적으로 뒤쪽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얼굴은 물론 귀까지 전부 다 새빨갰다. 그 뒤쪽에 있는 사람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안겨 있던 이사나였기 때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만했다. 정신이 들고 나니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이사나는 다소 섭섭한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미소 지었다.

“안녕, 엘.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어.”

“나야말로.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굴 봐서 정말 좋긴 한데,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선발대가 요즘 고생이 많잖아. 부대 상황도 알아보고 병사들을 독려도 할 겸 와봤어. 마침 이 부근을 지나가고 있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라고. 느낌이 이상해서 와봤는데 멀든이 공격받고 있는 게 보였어.”

“그랬구나. 시기가 잘 맞았네.”

“응, 그래도 좀 더 서두를 걸 그랬어. 엘, 오자마자 미안한데 사람 한 명 좀 봐줄래? 부상자가 있어서.”

“아아, 상황은 대충 알고 있어. 활에 맞은 사람 말이지? 나도 그때 알리사를 막 찾아낸 참이었거든.”

고개를 끄덕인 이사나가 옆으로 눈짓을 보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친위 기사들이 양쪽으로 슬슬 갈라지면서 가려져 있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모포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등에 박혔던 화살은 이미 제거되어 있었고, 가볍게 치료를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상체는 탈의되어 환부에 깨끗한 천을 감아둔 채였다.

“맙소사, 라젠 님!”

“주군!”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아셀 일행이었다. 그들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저 남자가 라젠이라는 사람이었구나.’

저들이 부상자의 머리색에 반응할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긴 했다. 그래서 따라오는 것도 내버려두었지만 막상 실제로 정체를 확인하니 착잡한 기분이었다.

운명의 별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더니. 내가 저들을 어떻게 따돌릴까 고심하고 있을 때 이미 알리사는 또 다른 제왕과 마주쳤던 모양이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그에게 이끌려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리사가 이런 낯선 장소에 혼자 흘러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라젠 님! 정신 차려보십시오! 라젠 님!”

아셀이 다급한 얼굴로 남자의 뺨을 두드렸다.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이사나의 말에 의하면 그가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기절했다고 했다. 출혈이 심하지도 않았고, 맞은 부위가 치명적인 곳도 아니었는데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었다고. 아무래도 화살촉에 독이 발려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화살부터 제거했어. 성수를 먹여서 출혈은 막았는데, 해독은 안 되는 것 같아.”

“성수면 꽤 강력한 치료제 아닌가?”

“대체로는 그렇긴 한데, 해독에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들었어.”

“그렇구나. 그건 또 몰랐네.”

내가 자세한 설명을 듣는 동안 아셀 일행은 부지런히 남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성수를 마시게 한 덕에 상처는 거의 아물어 있었지만 그에 비해 안색이 몹시 나빴다. 온몸에서 열이 끓는지 땀이 흥건했고, 입술도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기 쓰러져 있는 자들은 다 누구고, 이분은 왜 이렇게 되신 겁니까?”

질문을 건네는 아셀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내 품에 안겨 있는 알리사에게 닿았을 때였다. 이사나가 한 팔을 들어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우리를 대할 때와는 달리, 그들을 내려다보는 이사나의 시선은 건조했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군요.”

“예?”

“듣자니 그가 어둠의 기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고 해서요.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가 왜 이런 시기에 유카르테 대공과 접촉한 겁니까?”

“……!”

무심히 건네진 질문에 아셀 일행의 얼굴이 경직됐다. 알리사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것이 보였다. 나 역시 놀라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황태자? 저 사람이?”

“응. 라온휘젠 루아델 카터스. 카터스 제국의 적통 황자이자 제위를 물려받을 황태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자의 머리색. 카터스 제국 황족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고유색이거든. 지금 카터스 황족들 중에서 저 색을 지니고 있는 남자는 황제와 태자인 라온휘젠뿐이지.”

특이하다고 여겼던 머리색이 황실의 혈통을 드러내는 증거였던 모양이다. 아셀 일행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사나가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변명할 말이 있습니까?”

“그게…….”

“날 알아봤으면서 예의를 갖추지 않는 저의도 궁금하군요.”

“……! 스, 스왈트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아셀 일행이 그제야 동작을 바로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들 입장에선 이 모든 상황이 날벼락으로 느껴질 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랜만에 보는 이사나의 황제다운 모습에 감탄하기 바빴다. 친위 기사들도 몹시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이 내전에 관심이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태자 전하가 이곳을 방문하신 건 그저 어느 분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만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라 조금이라도 단서를 얻기 위해…….”

“그래서 대공을 찾아갔다는 거군요. 이곳에 온 이유도 알 만하네요. 유카르테 대공, 그자가 당신들이 찾는 사람을 내가 데리고 있다고 했습니까?”

“그, 그것이…….”

마른침을 삼킨 아셀 일행은 제대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만 봐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대공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를 교묘히 꾀어 이 내전에 휘말리게 하려고 한 듯했다. 이사나는 잠시 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곧 나를 돌아보았다.

“엘, 일단 태자의 치료 좀 부탁할게.”

“아, 응.”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여주곤 바로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아셀 일행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사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태자의 치료를 내게 맡긴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무시한 나는 황태자의 몸에 손을 얹은 후 곧장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닿은 부분에서부터 특유의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자 옆에서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곧 펄펄 끓고 있던 황태자의 몸이 빠른 속도로 안정되면서 창백하던 안색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불규칙하던 호흡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몸을 장악하던 독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손을 떼어냈다.

“다 됐어. 그대로 잠들었으니까 당분간은 깨어나지 않을 거야.”

“고마워, 엘.”

“이 정도야 별것도 아닌걸.”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고 있으려니 옆쪽에서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아셀 일행이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놀란 정도를 넘어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아셀의 경우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이 보였다. 그들의 입장에선 아까부터 수상한 능력을 선보이던 자가 사제의 치료술까지 쓴 셈이다.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공황에 빠질 만도 했다.

“이게 대체…….”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는 그들을 향해 나는 그저 생긋 웃어주기만 했다. 아셀에게는 개인적인 흥미가 있지만 그들 자체는 경계해야 할 점이 더 많았다. 설명할 필요도, 그럴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 외면하기가 쉬웠다. 이사나 역시 그들을 배려해 줄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아셀 일행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다시 숨을 삼켜야 했다.

“아직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밝혀진 정황만 간단히 말해 두죠. 그대들의 태자를 이렇게 만든 건 대공이 보낸 자들입니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유카르테 대공이 태자 전하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겁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릅니다. 다만 어둠의 기사들 쪽에서 먼저 검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태자가 그들을 전부 처리한 직후 2차로 습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그가 깨어난 후에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수가…….”

아셀 일행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아직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에 배신감과 분노가 더해진 탓인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사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혼란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자국의 내분에 휘말리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제 소중한 사람이 위험한 일을 면했습니다.”

“예? 소중한……사람……?”

넋이 나가 있던 그들이 그 말에 반응해서 고개를 들었다. 의아해하는 눈길이 닿자 이사나가 보란 듯이 한 팔을 내밀어 옆에 있던 알리사의 어깨를 감쌌다. 알리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셀 일행은 그제야 알리사를 알아본 듯했다. 그녀의 정체는 물론, 이사나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마음까지도. 멍하기만 하던 그들의 표정에 점차 경악이 번져가는 것이 보였다.

“자, 잠깐…….”

“설마……!”

“그 보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 제국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편의를 보장하겠습니다. 태자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는 귀국할 때까지 어떠한 위험에서도 안전할 것이며, 스왈트 제국은 영원한 그의 우방이 될 겁니다.”

그들이 말을 잇기도 전에 냉담한 어조의 선언이 먼저 떨어졌다. 한마디로 말해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돌아가라는 경고였다. 협박을 이렇게 우아한 방식으로 할 수 있다니, 왠지 이사나의 얼굴에서 찬란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물론 아셀 일행에겐 흑막이 뿜어내는 불길한 오라(aura)로 느껴졌을 테지만.

그들의 심경이야 어쨌든, 필요한 말을 마친 이사나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더는 대화를 진행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명백하게 드러낸 태도였다. 일국의 황제를 상대로 추궁할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아셀 일행 또한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단지 복잡한 시선으로 알리사의 모습을 끈질기게 뒤쫓았을 뿐.

산만하던 분위기가 소강되면서 마무리를 고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공간이 어느새 까만 밤에 삼켜지고 있었다. 그 현상이 말해주는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숱한 의문들을 남긴 채로 짧은 여가가 끝났다. 이제 다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셋으로 출발한 일행이 돌아올 때는 한 무리가 됐다. 늦은 시간까지 소식이 없던 우리가 느닷없이 황제와 함께 귀환하자 진영 안은 발칵 뒤집혔다. 선봉장 마커스 백작은 복식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찌 폐하께서 친히 이런 곳까지……! 소식을 주셨으면 저희가 모시러 나갔을 텐데…….”

“하하, 미리 연락하면 기습 방문의 의미가 없죠. 선발대가 활약해 주는 덕분에 마음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백작의 노고가 큽니다.”

“황공합니다, 폐하. 허나 이 모두가 알드레프 경의 공입니다. 소신은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지라 감히 치하를 받기가 송구스럽습니다.”

“그녀가 재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것도 백작이 뒤에서 잘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죠. 잠깐 돌아보기로도 부대 활동이 정연하고 병사들의 자세가 곧더군요. 그것만 봐도 백작이 훌륭한 지휘관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스스로 공을 낮추지 마세요.”

“화, 황공합니다.”

다들 당황하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은 부대 안에 큰 활기를 불어넣었다. 연이은 승전 중이라도 선발대가 죽음에 가까운 위치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고생하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까마득히 높은 황제가 발걸음 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큰 감동을 준 것 같았다.

이사나가 당분간 선발대와 함께할 뜻을 밝히면서 분위기는 더욱 크게 고조됐다. 이후 진영에선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칠면조 고기와 다양한 계절 과일, 흰 빵에서부터 과실주까지. 평소 접하기 힘든 음식들이 한가득 풀리면서 떠들썩한 자리가 이어졌다. 한 치 앞도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잠시나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분위기를 모두가 마음껏 즐긴다는 느낌이었다.

조금 다른 의미긴 했지만, 사실 실제로도 이미 폭풍전야였다. 이날은 예정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 첫 밤이기도 했다. 머무는 동안 편의를 봐주겠다는 이사나의 약조에 따라, 황태자와 아셀 일행들 역시 귀빈의 자격으로 합류한 상태였다. 얼결에 휩쓸리듯 동행하게 된 그들과는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얘기를 나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덮어둘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외면할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는 것도.

그리고 대망의 다음날 아침. 드디어 본격적인 태풍의 전조가 일기 시작했다. 라온휘젠 황태자가 의식을 차린 것이다. 정신이 들자마자 황태자는 이사나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오전 회의가 잡혀있는 시각이었지만 이사나는 그 일정을 우선으로 수락했고, 곧 각자 수행원을 동반한 자리가 마련됐다. 그 자리에는 알리사도 함께했다. 운명의 별에 얽힌 세 사람이 정식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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