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그러고 보니, 아깐 왜 그랬어요?”
“예?”
“내 옷. 잡고 있었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왠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흐음?”
설마 했는데 정말로 짐작한 답이 돌아왔다. 한순간에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이번만은 시벨리우스도 이채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아주 순간적인 상황이었고, 언령을 제대로 발동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걸 알아봤단 말이지?
나는 성큼 아셀에게 다가가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처음엔 당황하던 아셀의 얼굴이 곧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저어?”
“정령사는 아닌데. 보통 사람보다 땅의 기운이 조금 강한 편이긴 하지만 크게 두드러지는 편도 아냐. 예지 능력은 아닌 것 같고…… 눈이 굉장히 좋구나? 평소에도 보이는 게 많아요?”
“……네?”
“남들과 다른 거 많이 보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시벨, 너랑 같은 과인 것 같은데?”
돌아보며 말했더니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셀은 더 크게 경직됐다.
“……정말이네. 약하긴 하지만 영안이야.”
“아, 역시?”
“인간이 왜 영안을 갖고 있지? 이건 유니콘의 고유 능력인데. 혼혈한테서도 일부 나타난다고 듣긴 했지만…….”
“그럼 혼혈인 거 아냐? 격세유전이라든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하지만 인간 종족은 유니콘이 신계로 이주한 후에 한 번 멸망했던 거 아니었어? 그럼 피가 전부 끊겼을 텐데.”
“유니콘의 눈을 흡수해도 비슷한 힘을 얻잖아. 그렇게 해서 전해졌을 가능성은?”
“그건 아닐 거야. 그렇게 얻는 힘은 일시적이라 번식에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아.”
“그럼 누군가가 잠시 중간계에 내려왔었다든가?”
“설마.”
“마족도 왔다 갔다 하는데 유니콘도 그럴 수 있지 않겠어?”
“으음…….”
꽤 그럴듯하다고 여겼는지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뜻밖의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오가는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던 아셀이 갑자기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으악? 아셀? 왜 울어요?”
“저…… 아무도 안 믿었었습니다.”
“네?”
“제 가문 시조님이 유니콘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다들 그런 말을 하면 비웃었는데…….”
“……!”
나와 시벨리우스는 반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찍었는데 정말 맞았다.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다 보니 맞췄다는 반가움보다도 황당한 마음이 더 컸다. 시벨리우스는 특히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4천 년 만에 깨어나 이젠 조금도 찾을 수 없게 된 일족의 흔적을 이렇게 뜻밖의 방식으로 발견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너, 이름이 뭐라고?”
“아셀입니다. 아셀 리글레오.”
아셀이 뚝뚝 흐르는 눈물을 급히 닦아내며 대답했다. 시벨리우스는 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
“시벨, 왜 그래?”
“리글레오, 라고.”
“아는 이름이야?”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리글레오 룬.”
담담히 답하는 얼굴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형님이야.”
* * *
“……뭐?”
세상이 잠깐 멈춘 기분이 들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멍하니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대답하던 말투가 너무 담담해서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몇 번이나 곱씹어 돌이켜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셀도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걸 보니 나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정작 폭탄을 터트린 시벨리우스만 홀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턱 부근을 긁적거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근데 알리사랑 이사나는 지금 어디에 있어?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응? 어어, 가야지. 가긴 갈 건데, 그보다 잠깐만 기다려 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거든?”
“와아, 엘한테 이사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었어?”
“이상한 방식으로 말 돌리지 마. 네가 지금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뭘…….”
“형님? 방금 형님이라고 했어? 그냥 아는 형 말고, 친형? 혈육이라고?”
붙잡고 추궁했더니 시벨리우스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났으니 친형이긴 하지.”
“허어?”
그럼 정말 가족이라고?
두 번째라고 해서 충격이 덜하진 않았다. 나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묘한 기분으로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근데 이 녀석은 왜 반응이 이 모양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눈앞의 아셀이 형의 핏줄이라는 거잖아. 이럴 땐 좀 더 놀라고 당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맴돌았다. 그 생각이 시벨리우스의 눈에도 고스란히 읽혔던 모양이다. 그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냐, 엘. 사실 말이 좋아 형제지, 내 기억에는 거의 없는 사람이야.”
“……무슨 말이야?”
“형님은 내가 아주 어릴 때 마을을 떠났거든. 이름만 알고 있는 것뿐, 얼굴도 잘 기억 안 나. 부모님도 그 전에 모두 돌아가셔서 따로 돌보는 이들 손에서 컸고. 말만 혈육이지 그냥 남이나 다름없어.”
전부 처음 듣는 얘기들이라 나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시벨리우스가 가족에 대해 언급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미 독립한 성인인 데다 일족과 꽤 복잡하게 엮인 관계인 것 같아 딱히 물어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속사정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도 인간인 ‘엘’이 첫 친구였다고 했었다. 일족과의 관계도 소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유독 ‘엘’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겐 ‘엘’이 가족이었던 거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는지 시벨리우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입을 다물자 공기가 더 어색해졌다.
“저기…….”
그나마 분위기가 전환된 건 아셀 덕분이었다. 그가 말을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의 존재를 상기했다. 또 그들의 존재를 잊고 조심성 없이 떠들었다는 것도. 아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잠깐 저와 대화 좀 하시죠. 아까부터 듣자하니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형님이니 뭐니, 누가 누구의 형님이라는 겁니까? 설마 당신이 내 시조님의 동생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지금 본인이 유니콘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그가 공격적인 시선으로 시벨리우스를 노려보았다. 시벨리우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만 해도 아셀을 보는 시선이 꽤 복잡했는데, 그새 마음을 정리했는지 완벽하게 타인을 대하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성마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던데.”
“그건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쩌려고?”
“모, 못 믿겠습니다. 증거를 보이십시오.”
“증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거야, 뭔가를 주장하려면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을 떠벌리는 건 사기꾼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냥 마음대로 생각해.”
“뭐, 뭐라고요?”
성의 없는 태도에 아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좀 더 다그치려는 듯 몸을 내밀기 시작한 그를 만류한 건 뒤쪽에 있던 일행이었다. 사자처럼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아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름이 세리엄이라고 했던가. 뒤늦게 합류하면서 아셀에게 타박을 들었던 거친 인상의 남자였다.
“아셀, 그만해라. 척 봐도 거짓말이잖아. 왜 저런 질 나쁜 장난에 휘말려서 쩔쩔매고 있어?”
“세리엄 님…….”
아셀이 주저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세리엄이라는 남자는 인상만큼이나 야수처럼 사나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짙은 잿빛 머리카락 아래 검은 눈동자가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렸다. 그가 등 뒤에서 대도를 꺼내들고는 우리를 향해 겨눴다.
“유니코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셀이 그런 말에 약하다는 걸 일부러 노린 거지? 보아하니 우리가 누군지도 전부 다 알고 접근한 것 같은데, 얕은 수작을 부리다니 어림도 없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수상하다 싶었어. 강제로 잡혀 있다는 반려성이 이런 곳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말이 돼? 이 자리에서 미래를 다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던 것도 전부 다 연극이지? 솔직히 말해. 너희들, 어디서 보낸 놈들이냐?”
아무래도 그는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자신들에게 접근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다른 자들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는지 무기를 고쳐 잡고 있었다. 아셀만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버리지 못하고 그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세리엄 님. 그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좀 더 얘기를…….”
“너야말로 정신 차려, 아셀! 대체 언제까지 그 말도 안 되는 전설에 집착할 거야? 네가 자꾸 헛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이런 녀석들이 쉽게 미끼를 던지는 거잖아!”
날카롭게 올라가는 타박에 아셀이 입을 다물었다. 세리엄은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훑어 내렸다.
“다른 일엔 총명하고 딱 부러진 녀석이 대체 왜 자기 조상의 전설 얘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고 매달리는 거야? 차라리 드래곤이나 마족이라고 하면 현실적이기라도 하겠다. 유니콘이 뭐냐, 유니콘이! 그건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동물이야! 말 그대로 전설이라고! 그냥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란 말이야! 하다못해 이젠 본인이 유니콘이라고 주장하는 미친 소리까지 믿으려고 하냐? 저건 그냥 대놓고 널 가지고 노는 거라고!”
‘진짜 유니콘 맞는데.’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사기꾼 취급이라니. 내가 정령왕이라는 것까지 밝혔다간 당장 정신병원에(이곳에 그런 게 있지는 않겠지만) 처넣을 기세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믿는 건 어느 세상이든 똑같다. 그래도 한때 이 땅에 거주했던 일족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허구 속 존재로 취급당하는 걸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유니콘 일족이 신계로 이주한 이후 4천 년. 이곳 사람들은 이제 그들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드래곤과 마족까지 ‘현실’의 범위에 들어감에도, 유니콘은 일말의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 그들 일족이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고 떠났다는 뜻이기도 해서 조금 씁쓸해졌다.
“그러니까 당장 똑바로 말해! 대체 무슨 속셈으로 우리한테 수작을 거는 거냐? 일리야 쪽이냐? 여기까지 와서 아셀을 괴롭히려는 거야?”
“일리야?”
“아셀을 사기꾼 취급하는…… 뭘 모르는 척이야! 일부러 아셀이 홀릴 만한 수법을 쓰는 걸 보면 뻔하구만! 너희들이 얼마나 아셀을 우습게 보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는데,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서 코흘리개도 안 넘어갈 사기를 쳐? 유니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유니콘이면 난 드래곤 할아버지다!”
겁을 상실한 남자가 서슴없이 도발했다. 이 자리에 라피스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문득 이 상황에서 시벨리우스가 보란 듯이 본체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졌다. 힐끗 시벨리우스의 반응을 살폈더니 의외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저 입술을 악물고 있는 아셀을 잠시 응시했을 뿐. 그는 이내 여상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이제 그만 가자, 엘.”
“……더 얘기 안 해봐도 되겠어?”
“무슨 얘기?”
“너…….”
“응?”
“……아니, 됐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 일단 지금은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사실 더 내버려뒀다간 저 사람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겠어서 겁났거든.”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시벨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여느 때와 비슷해 보이지만 평소보다 기운이 없는 반응이었다. 내색하진 않아도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인 게 분명했다. 나는 일부러 서두르는 듯이 말했다.
“얼른 가자. 슬슬 부상자 상태도 살펴봐야 할 것 같고.”
“부상자? 누가 다쳤어?”
“아아, 알리사가 웬 남자랑 같이 있더라고. 그 사람이 활에 맞은 것 같았어.”
“엘도 모르는 사람?”
“응, 머리색이 꽤 특이하더라. 그런 색은 처음 봤어. 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꽃분홍이랄까. 짙은 자주색?”
“자, 잠깐!”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작스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봤더니 세리엄과 그 일행들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무시당해서 화내려는 건가? 이 이상 시벨리우스를 자극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눈치가 있을 것 같진 않아 걱정이 앞섰다. 이어질 반응을 예상하면서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지금, 자주색이라고 했어?”
* * *
“이사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한창 현장이 정리되어 가는 중이었다. 알리사를 습격한 괴한들은 대부분 죽은 상태였고, 일부는 의식을 잃은 채 묶여 있었다. 시큐엘은 이미 돌려보냈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물웅덩이들이 그의 활약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엘! 시벨 님!”
우리를 발견한 이사나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굳이 감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뒤따라오고 있던 아셀 일행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맙소사. 정말 이사나 황제입니다.”
“뭐야, 그게 정말이야?”
“대관식이 있을 때 사절단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때 똑똑히 봤습니다. 분명합니다.”
“확실히 유카르테 대공이랑 많이 닮긴 했는데……. 미친, 이게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들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불신의 시선을 감추지 못하던 상태였다. 속아주는 셈치고 따라왔는데 정작 진짜 이사나를 만나게 되니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아셀과 세리엄이 빠르게 수군거리는 동안 나와 시벨은 한달음에 이사나 앞으로 달려갔다. 주위에 흩어져있던 페리스와 친위 기사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