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피해!”
“꺄악!”
주문을 외우고 있던 라젠이 눈을 크게 뜨더니 별안간 알리사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알리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큭!” 약간의 진동과 함께 라젠의 입에서 짧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영문을 알 수 없어 굳어 있던 알리사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등에 긴 화살촉이 꽂혀 있었다. 활에 맞은 것이다.
“무슨…….”
그제야 라젠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끌어안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활이 날아든 쪽은 멀든과 대치중인 자들이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당황해서 고개를 든 알리사는 지붕 위에 어른거리고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대공군 쪽의 지원군인 듯했다.
“그대, 괜찮나? 어디 다치진 않았나?”
“무, 무슨 소리야! 지금 당신이 활에 맞았다고!”
“그래, 그런 것 같군. 쯧, 궁병을 숨겨 두고 있었나?”
라젠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또 한 발의 활이 날아들었고, 이번엔 멀든의 몸을 맞췄다. 마나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고통에 알리사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라젠도 그녀의 안색이 흐려지는 걸 알아보고 다급히 말했다.
“그대, 무리하지 말고 정령을 돌려보내라.”
“미쳤어? 지금 멀든이 돌아가면 우린 다 죽어!”
“괜찮다. 내가 어떻게든 방어 마법을 써 보겠다.”
“당신은 지금 다쳤잖아! 피가 빠져나가면 신체 균형이 무너져서 마나 조정이 더 힘들어진다고 알고 있어! 부상까지 악화시키는 지름길이란 말이야! 그 상태로 버텨 봤자 얼마나 버틸 것 같아?”
“그건…….”
날카로운 지적에 라젠은 바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알리사는 입술을 악물었다. 라젠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녀도 오래 버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에도 궁병이 쏘는 화살이 계속해서 멀든을 맞추고 있었다. 멀든이 저항하기 위해 가지를 멀리 뻗었지만 궁병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닿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공격도 방어하는 중이라 온전히 화살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역소환되기 전에 어서 정령계로 돌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알리사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정령사에게 계약 정령은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멀든이 없는 상태에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승산이 보였는데, 지금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이럴 때 시벨리우스 씨가 곁에 있었다면! 엘 님! 도와줘, 엘 님!’
상급 정령사였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멀든의 몸짓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요즘 계속 승승장구한 덕분에 대단한 사람이 된 줄로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성벽을 무너트린다는 여신의 딸이 다 무언가. 엘이 도와주지 않으면 사실은 몇 사람도 이기지 못하는 미숙한 꼬마일 뿐인데!
갈등하고 있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궁병이 또다시 활을 겨눴다. 그가 힘주어 당긴 시위에서 튕기듯 쏘아진 화살이 이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굉장히 빠른 순간일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그 모든 광경 하나하나가 느리게 느껴졌다. 이번에 맞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될 거란 사실만은 알 것 같았다. 알리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사나 씨!’
콰직!
그 순간 하늘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활이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끔찍한 격통도 찾아오지 않았다. 뭔가가 부스스 떨어지는 느낌에 알리사는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뺨을 쓸어보았더니 축축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물이었다.
‘……비?’
지금 비가 내리고 있는 건가?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그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알리사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보이는 광경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멀든의 가지 위에 무언가가 거대한 것이 올라타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속이 다 비쳐 보이는, 물로 빚어낸 듯이 아름다운 늑대였다.
“아…….”
바람에 흩날리는 늑대의 갈기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라고 생각했던 것의 정체가 바로 저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아는 한, 저런 형태를 지닌 짐승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었다.
“저게 뭐지?”
옆쪽에서 라젠이 당혹스러워하며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 말에 대답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알리사는 무심코 늑대의 이름을 읊었다.
“시큐엘…….”
“시큐엘? 설마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을 말하는 건가?”
라젠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시큐엘은 부러진 화살을 입에 물고 있는 채였다. 조금 전 궁병이 날린 화살이 분명했다. 지붕을 바라봤더니 이미 궁병은 앞으로 고꾸라진 채 쓰러져 있었다. 엘이다. 그가 와준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하고 나니 경직됐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알리사, 괜찮아?”
“……!”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엘의 것과 달랐다. 모르는 음성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들려올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알리사는 멍한 상태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머리에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가두고 있던 천 안쪽에서 화사한 금발이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응시해 오는 푸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알리사는 숨을 크게 삼켰다.
“말도 안 돼.”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닐까? 너무 간절한 나머지 이상한 환상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알리사는 서슴없이 달려가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두 팔 가득 채워지는 체온에서 그리운 향기가 느껴졌다.
“이사나 씨……!”
* * *
“하아아아.”
차오르는 안도감에 길고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몇십 바퀴를 질주했어도 지금처럼 정신이 아득하진 않을 것 같다.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자 사방에서 따가운 눈길이 쏟아져 들었다.
“엘?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나를 따라 같이 주저앉은 시벨리우스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짊어진 듯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상황과는 상관없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그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조금 위험할 뻔했는데, 다 해결됐어.”
“위험하다니! 그, 근데 해결됐다고?”
“응, 왕자님이 나타났거든.”
앞뒤 맥락 없는 설명에 시벨리우스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나도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심하게 놀라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약간 흥분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위험하다느니 해결됐다느니, 대체 아까부터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겁니까? 혹시 지금 뭔가를 보고 있는 겁니까?”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다른 쪽에서도 질문이 이어졌다. 옆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남자―아셀이었다.
“뭐야, 이 녀석들은.”
시벨리우스는 그제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본 눈치였다. 주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그래도 여유가 생기긴 한 모양이다. 험악한 시선이 닿자 아셀의 주위에 있던 자들이 그를 지키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섰다. 덕분에 분위기가 말도 못 하게 흉흉해졌다.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내 망토 끝을 붙잡고 있는 손부터 가리켰다.
“일단 이것 좀 놔 줄래요?”
“네? 아…….”
의아한 표정을 짓던 아셀이 흠칫 놀라 잡고 있던 옷자락을 내려놓았다. 당황하는 얼굴을 보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민망해하는 그를 보며 나는 힘없이 웃었다. 정말이지 정신 건강에 좋지 못한 시간들이었다.
“알리사가 없어지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시벨리우스가 외친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 앞이니 말조심을 해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무작정 시벨리우스를 붙잡고 다그쳤더니 그는 창백한 얼굴로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식품 가게에 들어가 같이 과일을 고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허전해져서 돌아봤더니 알리사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딱히 살기나 위협적인 기운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저 근방의 다른 곳을 둘러보고 있겠거니, 편한 마음으로 찾아 나섰다고. 그런데 아무리 돌아보아도 알리사를 발견할 수 없었고, 그때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 시간부터 내내 나를 찾아다니다 지금에 이른 것이다.
“수상한 기척은 없었단 말이지?”
“응, 그건 정말 확실해. 마법이나 주술을 썼다고 해도 반드시 흔적이 남았을 텐데, 그런 건 전혀 없었어.”
“그럼 알리사가 스스로 사라졌다는 건가?”
“보이는 정황으로는 그래. 하지만 알리사가 그럴 애가 아닌데…….”
“일단 기다려 봐. 지금부터 찾아볼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곧장 ‘물의 기억’을 전개했다. 머릿속에선 온갖 나쁜 상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알지 못하는 힘이 개입한 거라면 이미 근방에는 없을 가능성이 더 컸다. 추적을 시도하면서도 애먹을 걸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알리사의 행방을 찾는 건 쉬웠다. 그녀는 마을 외곽 쪽에서 금방 발견됐다. 축제 현장에서는 꽤 떨어지긴 했지만 민가와 연결된 부근이었다.
다만 찾아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알리사는 낯선 남자와 함께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이미 남자 쪽은 등에 화살에 맞은 상태였고, 멀든의 몸에도 여러 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공격하는 자들은 아무리 봐도 대공 측 관계자들로 보였다. 한눈에도 위급한 상태였던 만큼 나는 일단 공간이동부터 하려고 했다.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채는 걸 느끼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나를 건드린 사람은 아셀이었다. 누가 붙잡는다고 해서 공간이동이 막히거나 지장을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은 한 곳에만 몰입하고 있던 정신이 주위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시야가 조금 환기되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알리사가 있는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그 부근에 후드를 눌러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부름을 받아 공중에서 무언가가 소환되는 광경이 이어졌다. 거대한 물의 늑대, 시큐엘이었다.
“……정말로 악운에 강하다니까. 이사나 녀석.”
설마 그 순간에 이사나가 나타날 줄이야. 중군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는 몰라도 덕분에 내가 나설 필요가 없게 됐다. 그가 알리사를 구출하는 광경은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 실제로 시큐엘의 등을 타고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한 연출이기도 했다.
“이사나라니!? 혹시 알리사가 이사나랑 같이 있는 거야?”
중얼거리는 말을 용케 들었는지 시벨리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는 더 당황한 표정이 됐다. 결과만 전달받은 그의 입장에선 상황 자체가 뜬금없게 여겨질 만도 했다. 직접 목격한 나조차 어이가 없는데 오죽할까.
“이사나가 왜 이곳에…….”
“그건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둘이 만났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아.”
“……걱정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게 아니라?”
“하하, 괜찮을 거야. 든든한 방어막도 함께 있었으니까.”
이사나가 시큐엘을 타고 알리사 앞에 뛰어들었을 때, 다른 쪽에서도 한 무리가 나타나 괴한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뿐이라 누군지는 금방 알아보았다. 정령사 페리스를 비롯한 황제의 친위 기사들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시벨리우스도 마음이 놓인 듯 표정이 편안해졌다.
“이사나? 혹시 당신들이 말하는 이사나가 스왈트 제국 황제인 이사나 란느 스왈트를 뜻하는 겁니까?”
아셀 일행은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벨리우스의 기세가 살벌해졌지만 그의 존재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당신이 알리사 님이 아니라는 건 알겠습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습니다만, 지금 대화를 들어서는 도저히 그렇게 볼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부디 저희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들었으면 대충 짐작했을 것 같은데요. 뭐가 더 궁금해요?”
“모든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진짜 알리사 님과 당신들의 관계도 그렇고, 지금 당신이 보이고 있는 모습이나 행동까지 전부 다.”
“내 모습?”
“당신이 알리사 님이 아니라면 예지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닐 겁니다. 그런데 마치 전부 다 읽어내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
그러고 보니 외부인들 앞에서 너무 대놓고 일을 벌이긴 했지. 사태가 다급하다곤 했지만 뒷수습을 고려했다면 이들을 따돌렸어야 했다. 그나마 공간이동은 시도하기 전에 멈춰서 다행인가. 꽤 무모했음을 자각하며 머쓱해하고 있는데 나를 응시하는 아셀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단지 궁금해서라기엔 왠지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가 달려들 듯이 내게 다가섰다.
“제발 피하지 말고 대답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 잠깐만요. 저기, 아셀?”
“다른 속셈이 있어서 묻는 게 아닙니다. 그냥 알고 싶을 뿐입니다. 무엇을 보신 겁니까? 뭔가가 보이시는 겁니까? 혹시 당신도…….”
“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윽…….”
중간에 끼어든 시벨리우스가 강제로 밀어내고서야 그는 조금 정신을 차린 듯했다. 당황스러워하는 걸 보니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인 것 같았다. 뒤에 있던 그의 동료들까지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먹을 움켜쥔 아셀이 이내 입술을 악무는 것을, 나는 차분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