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넌 누구지? 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건지 이유나 들어보고 싶군.”
“……지켜보던 거 아니에요. 아니, 지켜보던 건 맞지만,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거든요?”
“아니다?”
“그냥 우연히 지나는 길에 봤고, 신기해서 구경했어요.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나요?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는 걸 보니 역시 평민은 아니로군.”
“……윽.”
남자의 얼굴에 재밌다는 표정이 더 짙어져서 알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이 라젠이라고 했던가? 그의 신분이 고위 계층이라는 건 확실했다. 몸에 밴 태도나 말투도 그랬고, 본인이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 상황을 평탄하게 해결하려 했다면 아무리 화가 났어도 일단은 납작 엎드려야 했는지도 몰랐다. 사실 평민 여자라면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천성을 싫어한 적은 없지만 이번만은 입맛이 썼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아 낭패감이 드는 것보다, 남자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그게 더 기분 나빴다.
하지만 이상은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었다. 알리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설령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다 해도 자신은 결코 이 남자 앞에 엎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목숨이 위험해지는 쪽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더 나았다.
“남이사 귀족이든 평민이든.”
막나가기로 결심했더니 말투가 절로 거칠어졌다. 남자, 라젠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리사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런 대답은 본인에게 이로울 게 없을 텐데, 꼬마 아가씨. 귀족이라면 어느 가문의 영애지? 수행원들은?”
둘의 대치를 보다 못했는지 어둠의 기사 중 한 명이 끼어들어 물었다. 알리사가 귀족일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인지 조금은 조심스러워하는 태도였다.
“대답할 이유 없어요. 대체 내가 왜 이런 추궁을 받아야 하죠? 사람을 멋대로 공격하려고 했으면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그렇게 치면 네가 먼저 수상하게 굴었기 때문이지. 왜 나오라고 했을 때 순순히 나오지 않았지?”
“당황해서 그랬어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결백하다면 이름과 신분을 밝히는 게 어렵지도 않겠군.”
“못 밝힐 것도 없죠! 난 사스라 백작 가문의 아일리아스라고 해요. 짐작했다시피 귀족이고요. 마법은 어떻게 알아봤냐고요? 내 지인 중에 마법사가 있거든요. 그래서 알아요. 이제 됐어요?”
라젠이 힐끗 어둠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아는 가문이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사스라 백작가는 알폰프 제국에 있는 가문이었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알리사는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왜요? 이제 들어보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라고 무시할 건가요?”
상대가 너무 당당한 태도로 나가면 아무리 큰 의심이 들더라도 일단 물러서기 마련이다. 라젠과 어둠의 기사들도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문명이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부정할 수 없군, 사스라 양. 하지만 그걸로 꼬투리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제국은 넓고, 이름 없는 귀족 가문이라면 발에 차고 넘치도록 많을 테니까.”
“정말 무례하신 분이네요.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예요? 보니까 술이 맛있느니 맛없느니 같은 소리나 하고 있던데, 그게 남이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이기라도 하나요? 그렇게 중요한 얘기면 안에 들어가서 했어야죠! 보이니까 봤고, 들리니까 들은 것도 죄예요? 이 거리가 당신들 건가요?”
“흠, 그것도 그렇군.”
“그것도 그런 게 아니라 그게 맞잖아요!”
“……뭐, 좋아. 확실히 내가 예민했던 것 같다. 의심은 이쯤에서 접어주도록 하지. 이만 가도 된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손에 위협적으로 걸려 있던 불화살이 사라졌다. 드디어 지겨운 공방이 끝난 것이다. 그래도 말이 완전히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구나.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그게 호감으로 전환되는 건 아니었다. 처음 라젠을 봤을 때만 해도 그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연이라도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서 일행들과 합류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겉으로만 당당했을 뿐 사실 그녀는 많이 긴장한 상태였다. 이 기분을 진정시키려면 시벨리우스와 엘을 만나 그들 품에 안겨야 할 것 같았다.
“아, 잠깐만. 영애?”
그러나 이번에도 상황은 곱게 풀리지 않았다. 막 돌아서서 걸음을 떼려는 순간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라젠이 아니라 어둠의 기사들 쪽이었다. 라젠은 오히려 물러난 채 흥미로운 듯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아아, 조금 전 대화가 왠지 마음에 걸려서 말인데. 사스라 백작 가문이라 했나? 내가 어지간한 백작 가문은 다 알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가문의 이름은 기억에 없군. 정확히 어느 지파에 속한 가문이지?”
“……네?”
“사스라 가문 자체는 알려지지 않았어도 지파 중엔 알려진 가문이 하나 정도는 있을 게 아닌가. 설마 전혀 없다고 하진 않겠지?”
없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 많은 편이었다. 그저 그 가문들 또한 알폰프 제국에 있을 뿐. 알리사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기사의 눈빛이 냉정해졌다.
“아니면 주로 교류하는 가문들이 어디인가? 그중에서 영애 생각에 알려져 있을 만한 가문의 이름을 하나만이라도 알려주지 않겠나?”
“……그건 왜요?”
“영애가 한 말을 의심하자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네. 오해가 밝혀지면 사스라 백작가에는 정식으로 예의를 갖춘 사과를 전하도록 하지. 아, 그래. 난 첼리시 백작가의 차남인 휴웬이라고 하네. 첼리시 백작가, 이름은 들어봤겠지?”
“아, 네…….”
사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스왈트 제국에 온 이후로 틈틈이 공부를 해두긴 했지만 아직 귀족 가문 이름을 전부 꿰뚫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공 측에서 유명한 가문으로는 그의 양팔이라는 카리브디스 공작가나 세트니오 백작가 정도만 알았다. 첼리시라는 이름은 작전 회의 너머에서조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 첼리시 백작가와 연이 생기는 거네. 그만하면 짧은 무례에 대한 보상으로는 차고 넘치도록 충분할 것 같군. 지파와 교류 가문을 밝히는 것이 그렇게까지 곤란하거나 위험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영애의 가문이 황제파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
“귀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문과 함께하는 운명이지. 그게 아무리 어린 아가씨일지라도. 일단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그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네. 영애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기사의 눈에 어둠이 짙어졌다. 반응을 떠보듯 말하고는 있지만 그는 이미 알리사를 황제파의 사람으로 확정 지은 얼굴이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그녀를 천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강제로 붙잡을 기세였다.
“자, 그래서 대답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게. 하지만 일단은 우리와 함께 가줘야겠어. 좀 더 차분히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
알리사는 더 이상의 저항은 이제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어떤 말을 해도 저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기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차라리 대놓고 판을 벌이는 게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것 같았다.
“알았어요. 말할게요. 지파에서 알려진 가문 말이죠? 있어요, 물론.”
“그래? 어느 가문이지?”
“알드레프 백작가요.”
“……알드레프?”
기사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사스라 가문 때만큼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바로 떠올리지는 못하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럼요. 들어보셨을 거예요. 요즘 특히 많이 거론되고 있거든요.”
“흐음, 알드레프라, 알드레프……알드레프……알드레프?”
고심하며 중얼거리던 기사 중 한 명이 잠시 후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경직된 것을 보며 알리사는 생긋 웃었다. ‘스피어의 딸, 알리사 폰 알드레프.’ 굉장히 유명한 명칭이니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어둠의 기사단에 있는 자라면 당연히.
“아시겠어요? 누가 그러는데 그 가문의 가주가 스왈트 제국에선 최초의 여기사라고 하더라구요. 근데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요? 아마 나랑 비슷한 또래일걸요?”
“뭐……자, 잠깐, 알드레프라니. 이게 무슨…….”
“아, 그리고 교류하는 가문 중에서 알려진 이름 물으셨죠?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조금 곤란하네요. 그냥 제일 유명한 사람을 말할게요. 아마 들으면 다들 누군지 아실 거예요. 이사나 란느 스왈트라고.”
“……!”
헛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얼굴이 빠르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쿠구구궁! 그와 동시에 알리사의 뒤쪽에서 거대한 나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 맞춰 그녀가 소환한 땅의 정령 멀든이었다.
향긋한 나무 향기와 친숙한 대지의 공기가 감싸들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다든가, 자신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라든가 같은 문제들은 그냥 잠시 잊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될 대로 되라지. 새하얗게 굳어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알리사는 다시금 웃었다.
“이 나라 황제님이 나랑 제일 친한 분이거든요.”
* * *
“스피어의 딸!”
경악한 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당연하다는 듯 울려 퍼지는 익숙한 호칭에 알리사는 새삼 자신의 유명세를 실감했다. 아군들 사이에서나 퍼진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적들조차 그녀를 그렇게 부르니 묘한 기분도 들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굳어 있는 기사들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겁박했을 여자아이의 정체가 사실은 적군에서 크게 활약하는 지휘관이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 이 상황이 의외인 건 마찬가지였던 듯, 라젠 역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뻔뻔할 정도로 여유 만만하던 남자가 당황한 것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스피어의 딸?”
되묻는 그의 어조가 조금 멍했다. 뒤늦게 뭔가를 자각한 사람처럼, 라젠의 미간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설마 네가…….”
라젠이 대화를 시도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그가 나서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미 교전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말을 거는 의도가 그리 순수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조금 전 겪어본바, 라젠은 적으로 판단한 자에겐 일말의 아량도 지니지 않는 성격이었다. 의심만으로도 죽이려고 했는데 노골적으로 정체가 밝혀진 지금 새삼스럽게 나눌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 어쩌면 대화를 걸어 방심을 유도하려는 작전일지도 모르지. 알리사는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행동으로 선보였다.
“멀든! 견제해!”
우르릉!
명령과 동시에 멀든이 땅속으로 뿌리를 뻗었다. 곧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기사들과 라젠이 뒤로 크게 물러섰다. 한두 걸음이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 틈에 알리사는 멀든의 가지 위에 올라타 안전한 자리를 확보했다. 직후 멀든의 뿌리가 다시 바깥으로 솟아올랐고, 기겁한 어둠의 기사들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봐! 잠시만 기다려라!”
금방이라도 격돌할 듯 급박한 분위기 속에서 라젠이 소리쳤다. 조금 전보다 더 다급해진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알리사는 그를 무시하려고 했다. 다음 순간 이어진 말을 듣지 않았다면 쭉 그랬을 터였다.
“네게, 아니, 그대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그대가 정령사 알리사인가? 혹시 14년 전쯤 알폰프 제국 남동구 쪽에 나타난 푸른 달에 대해서 알고 있나?”
“……!”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알리사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녀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라젠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 순간 잉크처럼 탁하기만 하던 그의 남색 눈동자가 열이 오른 것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건조하다 느껴졌던 얼굴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정이 떠올랐다. 그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에 색이 칠해지는 것 같았다. 뛰어난 화공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마법 같은 채색. 그만큼이나 화려한 색감이라고, 알리사는 속으로 멍하니 생각했다. 그가 전달하는 감정의 빛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져서 몸이 저절로 떨릴 정도였다. 반가움보다는 기쁨, 기쁨이라기보다는 환희에 더 가까웠다.
“알고 있군. 제대로 찾았어.”
“……뭐야, 당신?”
도저히 무시할 수 없어서 알리사는 결국 대꾸하고 말았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쭉 고수하고 있던 존댓말도 그냥 집어치웠다.
푸른 달이라니. 고향을 떠나온 이후로는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언급된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사나가 그녀에게 내린 휘장에 푸른 달을 새기긴 했지만 다들 스피어를 상징하는 문양을 본떴다고 알고 있을 뿐, 자세한 내막까지 밝혔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남자, 그것도 대공군의 측근으로 보이는 자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달이 나타난 시기와 장소까지 짚은 것을 보면 단순히 떠보려는 말이 아니었다. 그 전설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대, 나를 알아보지 못했나?”
“……뭐?”
“그대가 가진 힘으로 틀림없이 알아봤을 것 같은데.”
“…….”
이어진 라젠의 말에 알리사는 다시 숨을 삼켰다. 방금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웃고 있는 그의 모습 위로 간간이 마을을 방문했던 부호들과 학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라젠 또한 그들과 같은 용건을 지닌 자였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는 근본적인 부분이 달랐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