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감격하다 못해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셀이 소리쳤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축배를 드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갑자기 접근한 낯선 사람들이 대부분 알지도 못하는 반려성의 전설을 운운하다니. 심지어 그 별의 주인이 알리사라는 것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하나로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반려성을 언급한다는 건…… 당신들 제왕의 별 쪽이에요?”
질문을 하자마자 나는 바로 후회했다. 아셀의 두 눈이 더욱 반짝거렸기 때문이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정답을 알 것 같았다.
“훤히 내다보시는 것을 보니 역시 대지의 축복을 받으신 분다우십니다. 저희가 따로 설명해드릴 건 없을 것 같군요. 네, 바로 맞추셨습니다. 저희가 모시는 분이 제왕의 별을 타고나셨지요. 장차 알리사 님의 반려가 되실 분 말입니다.”
누구 맘대로 알리사의 반려래?
괜히 울컥하는 기분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설마 설마 했더니 그 설마가 맞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이런 곳에서 또 다른 제왕의 별과 맞닿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사나와는 달리 저쪽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것이며 반려성에 대한 것도 전부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알리사가 반려성이라는 것까지 유추해낸 것을 보면 보통 재간이 아니다. 이곳을 방문한 것도 그저 우연만은 아닐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 나는 한 가지 위화감을 느끼고 그들 일행을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방금, 당신들이 모시는 분이라고……?”
“아, 예. 그분은 지금 다른 곳에 계십니다. 실은 저희들끼리 식량을 사러 온 거라서요. 여기서 알리사 님을 뵐 줄 알았다면 그분도 모시고 올 것을 그랬습니다.”
내가 느낀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아셀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는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나로선 무척이나 반가운 얘기였다. 적어도 이곳에서 알리사와 그 제왕의 별이 만나지는 않을 거란 말이었으니까. 꽤 못된 심보이긴 하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완전히 엇갈리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따돌리지?’
평소에 잘 해보지도 않던 계략을 짜내느라 머리가 팽팽 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셀은 나를 제왕의 별에게 모셔가겠다며 길을 안내하려 하고 있었다. 이참에 알리사인 척 따라가서 대놓고 깽판을 쳐놓을까, 강렬한 유혹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였다.
“아셀!”
그 순간 거리 쪽에서 누군가 나타나 소리쳤다. 아마도 아셀의 다른 일행인 듯, 정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등장한 남자는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발견한 것처럼 두 눈을 흉흉하게 부릅뜨고 있었다. 놀라서 돌아본 아셀이 그 광경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세리엄 님? 세리엄 님이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태…… 라젠 님은 어쩌시고요?”
“지금 내 말이 그 말이야! 혹시 라젠 님 못 봤나?”
“뭐라고요?”
“라젠 님이 사라지셨어! 잠시 뒷간에 다녀온 사이에 그대로 증발해버리셨다고! 아무래도 자네들을 찾아간 것 같은데 중간에 마주치지 못한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만나 뵈었으면 저희랑 같이 계셨겠지요!”
“큭, 그거야 그렇지.”
“그러게 잘 붙어 계시라 당부했잖습니까! 설마 그자들만 대동하고 가신 겁니까?”
“그런 것 같아. 으아아, 제엔장! 라젠 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단독행동은 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괴성을 내지른 남자가 두 손을 머리에 짚은 채 절규하기 시작했다. 무척 산만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덕분에 돌아가는 상황은 알 것 같았다. 이들이 모시는 사람, 즉, 제왕의 별이란 남자가 갑자기 사라진 모양이다.
당황한 아셀 일행은 저들끼리 쑥덕거리느라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이참에 그냥 사라져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알리사를 찾아가 낚아챈 다음 잽싸게 부대에 복귀하는 거다! 제법 괜찮은 구상이라는 생각에 슬그머니 발을 빼려고 할 때였다.
“어? 근데 이쪽은 누구야?”
타이밍을 어쩜 이리도 잘 맞추는지. 별안간 세리엄이라 불린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진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창 충격에 빠져 있던 아셀마저 그 말에 반응해 정신을 차렸다.
“아, 그렇지! 세리엄 님! 놀라운 소식입니다! 알리사 님을 찾았습니다!”
“뭐?! 그럼 설마 이 사람, 아니 이분이……?”
“네, 맞습니다! 이분이 바로……!”
“엘!”
“엘 이라고…… 응?”
그런데 상황이 별안간 뜻밖의 전개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세리엄이란 남자가 나타났던 바로 그 위치에, 이번엔 내가 아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벨리우스였다. 그 역시 후드를 쓰고 있는 나를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보고 있었다.
“엘, 여기 있었구나!”
허허, 이 눈치 없는 친구여. 내가 엘인 건 맞지만 그렇게 대놓고 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반가운 사람임은 틀림없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 등장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아셀과 그 일행들이 묘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
“알리사가 아니라?”
잠시간 멍해 있던 아셀이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인지 금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차오르기 시작한 허망함과 배신감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저 찰나와도 같아, 나는 곧 그들의 반응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어진 시벨리우스의 말이 모든 감각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참 찾아다녔어! 큰일 났어, 엘!”
“……뭐?”
큰일이라니? 그제야 시벨리우스의 상태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데다 초조한 기색이 완연한 게, 그답지 않게 패닉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왜 혼자 있는 거지?
뒤늦게 미친 생각에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청천 벽력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알리사가 사라졌어!”
“……!”
* * *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알리사는 지금 자신이 무언가에 홀려 있다고 생각했다.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목적이 무엇인지, 방향을 어디로 잡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함께 있던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라졌다기보다는 그녀가 홀로 떨어져 나온 거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고 그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거나 누군가에 의한 강제성이 작용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왠지 갑자기 어디론가 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자각하기도 전에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워낙 익숙한 현상이라서 그것이 뜻하는 바가 뭔지도 잘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간혹 예감이 좋지 않다거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게 좀 심해질 때면 무의식이 행동을 지배하곤 했는데 지금이 그런 상태와 비슷했다.
아아, 또 예지 능력이 발현된 거구나. 알리사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새삼 이런 일에 당황하기엔 지난 경력들이 이미 너무나도 화려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 채 홀로 감당했어야 했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넘치도록 축복받은 환경이었다.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 이유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더는 혼자도 아니었다.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아, 그거? 이상한 거 아냐. 네가 훌륭한 땅의 정령사라는 증거야.”
웃으며 말해 주던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파란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과 보석처럼 영롱한 푸른 눈동자. 가슴 벅차도록 아름답고 다정한 정령왕은 지난 세월 알리사가 끌어안고 있던 고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해 주었다. 그 능력을 이상하게 보기는커녕 귀한 것으로 여겼다.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거라고, 그렇기에 대단하다고 말해 주었다. 기특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전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반응뿐이었다.
알리사는 능력을 자각하기 전이나 이후로나 끊임없이 방황해 왔었다.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가 없어서 늘 괴로웠다.
낳아준 생모는 너무 일찍 삶을 마감했고, 백작 부부와 이복 자매들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그녀는 좁고 썰렁한 방 안에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자랐다. 타고난 천성이 씩씩해서 기죽는 법 없이 살았지만, 마음을 터놓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보았다. 모두가 한결같이 떨떠름해 했다. 그나마 부드러운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게 신기해하는 정도였다. 그 능력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앞에선 고마워하며 축언을 건네면서도, 뒤로 돌아서서는 저들끼리 수군거린다는 걸 알리사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지독한 가뭄에 저 밭만 풍작이라니. 정말 기이하지 않아?」
「주문을 외우지도 않는데 시든 작물이 살아나는 거 봤어? 세상에 저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솔직히 기분 나쁠 정도야.」
「저게 뭔지 몰라도 인간의 힘이 아닌 건 확실해.」
「혹시 악마의 힘을 빌리는 걸지도 몰라.」
가는 곳마다 우려와 불신의 눈길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이미 그런 상황이었기에 마을에 힘든 일이 겹치자 손쉽게 그녀의 탓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시 악마의 힘이었어!」
「저 괴물을 봐! 저주 받은 게 틀림없잖아!」
「앞날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 끔찍해!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될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을 거야!」
번화한 마을이라도 시골이었고, 구성원 대부분이 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능력에 관한 건 그런 게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게 ‘평범하지 않은 존재’는 그저 두려움의 대상밖에 되지 않았다. 알리사를 끝까지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그녀가 내보이는 신비한 힘에는 거북함을 숨기지 못했다. 알리사 본인도 근원을 알지 못하는 힘이었던 만큼 주위에서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런 능력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미움을 받는 걸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태어나던 날 푸른 달이 떴다는,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마저 저주받았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그때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하는 것도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예감이 발목을 붙들어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토벌대에 참전하라는 말도 거부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평생 미움 받으며 사느니 죽어서 끝낼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데려다줄게. 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들과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전부 그때 알게 됐다.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속이 간질거려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 준다. 그들은 그녀가 이렇듯 미친 사람처럼 정처 없이 어딘가를 떠돌아다녀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았다. 걱정을 할지언정 아무도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지는 않을 터였다. 사실 그들에 비하면 그녀가 지닌 능력은 오히려 평범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 안에 있으면 알리사는 보호받아야 하는 작은 소녀에 불과했다. 그 사실이 참 기분 좋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기분, 그때랑 비슷하네. 이사나 씨를 처음 만났을 때와.’
그때도 이렇게 하염없이 걸었던가. 여전히 멍한 상태로 걸음을 옮기면서, 알리사는 당시의 기억을 차분히 되짚어 보았다.
그날은 아침부터 온종일 가슴속이 술렁거렸었다. 이전부터 그런 일들은 가끔 있었다. 마을에 큰 사건이 일어나거나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 그녀는 늘 직감적으로 남들보다 한발 먼저 알아차렸다. 방문자의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권세가 크면 클수록 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홀리듯이 이끌리는 느낌에 빠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는 어느새 저택을 벗어나 시장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사나를 발견한 순간엔 당연히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고 느꼈다. 한눈에도 그가 특별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지금까지 봤던 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무언가가 바뀔 거라는 이상한 기대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당시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서우면서도 들뜨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이사나는 자신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게 조금 속상하고, 왠지 억울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모르는 건 당연한 거였다. 이전에 방문했던 사람들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알아봤지, 그들 쪽에서 먼저 알아봤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특이한 거였기 때문에 알리사도 그걸 속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만은 달랐다. 이사나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괜히 심술이 났다. 이상하리만치 우울한 기분이 차올랐다. 어떻게 날 모를 수가 있지? 저택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참 동안 씩씩거렸더랬다. 그런 후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 막막해서. 누군가 나타나 구해주기를 바라며 막연한 희망을 품었었나 보다. 아직도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날 토벌전에서 이사나와 재회했을 땐 더 크게 놀랐다. 설마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어렴풋한 예감으로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었는데 분명한 현실이었다.
“다시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심지어 그는 정말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 거였다. 그의 단정한 음성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실감이 없어 꿈처럼 보이기만 하던 광경들도 전부 사실임을 실감했다.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날 그녀는 다시 태어난 거나 다름없었다. 처음 받았던 그 예감 그대로. 그가 알리사의 구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