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74화 (274/608)

제274화

“으아악!”

트로웰이 아니라도 지층 한 부분을 뚫어 통로를 내는 것쯤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닥이 푹 꺼지며 순식간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은 버텨보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땅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들이 내지른 비명 소리가 지하에서 아득하게 울려 퍼지다 이내 잠잠해졌다.

직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병사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곧장 수로로 끌려 들어갔을 테니까.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물의 정령들이 그들을 이리저리 굴리고 다니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 줄 예정이었다. 아마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호수 위에 떠오를 거다. 숨구멍을 만들어 줬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흥, 실컷 고생이나 해라.”

밧줄을 풀어낸 다음 홀가분하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을 보았다가 나는 잠시 멈칫했다. 전부 다 구덩이에 빠진 줄 알았는데 대공군의 병사 하나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곧 알아보았다. 나한테 돌을 맞고 기절한,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존재였다. 어떻게 보면 원흉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건만 정작 의식이 없어 방치되는 바람에 혼자 화를 면하게 된 모양이다. 마침 정신을 차렸다가 동료들이 당하는 꼴을 목격했는지 그는 연신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당신도 저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친절하게 건넨 질문에 그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 또한 굳이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냥 가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젓자 병사는 엉거주춤 일어나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이건 짐작에 불과하지만, 왠지 그가 군으로 복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난리를 쳐놔서 괜찮은가 모르겠네.’

그때쯤 주변의 광경도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황은 마무리되었지만 이미 이 근방은 축제와는 거리가 멀어진 분위기였다. 나름대로 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지진의 영향을 아주 피할 순 없었는지 엉망이 된 장식물과 노점들이 꽤 많았다. 멀쩡한 바닥에 구멍까지 뚫어둔 상태라 더 마음에 걸렸다. 대공군이 먼저 잘못했다곤 하나 나 또한 황제군이라고 밝혔으니 민가에서 교전을 벌인 셈이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이사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랐다.

보상한다고 하면 수습할 수 있을까? 얼굴에 와 닿는 시선들을 의식하며 속으로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짝짝짝! 갑자기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군중 속에서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손뼉을 치고 있었다. 내가 도왔고, 나를 도우려다 다칠 뻔한 바로 그 상인이었다. 그러자 그에게 감화를 받았는지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 저, 저기……?”

주위가 뜨거운 박수와 환호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마치 괴수를 물리치고 귀환한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주목을 사 본 적이 없어서 얼굴이 마구 화끈거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내게 상인이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정말 대단한 활약이었습니다. 아가씨가 그 유명한 스피어의 딸이시군요!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굉장할 줄이야! 제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네? 아하하…… 네에, 가,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알리사라고 오해하는 게 대공군에게만 해당될 일은 아니었다. 아예 작정하고 일을 벌려둔 만큼, 지금은 몰랐던 사람도 그렇게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동안 알리사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고 있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굉장히 민망하다. 결과적으로는 녀석의 이름을 더 알린 셈이기도 해서 조금 미안해졌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축제를 망치고 말았네요.”

“아닙니다. 덕분에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는 걸요. 사실 대공군이 보급품 문제로 저희를 괴롭힌 게 오늘 일만은 아니라서요. 징수도 적당히 해야지, 이 겨울에 얼마나 요구하는 것이 많던지. 다들 불만이 크던 참이었는데 정말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상인은 호쾌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동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행히 이 일 때문에 민심을 잃지는 않으려나 보다. 가장 걱정했던 일이 해소되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상인이 다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는 그동안 대공군이나 황제군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엔 황제군이 식품을 사러 오기에 저들은 어떤 행패를 부릴까 내심 혀를 찼었지요. 그런데 황제군들은 다들 정중하고 물건도 제값을 치르고 사가더군요. 설마 그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 맞아. 그뿐만이 아니야. 내 곡식은 구하기 어려운 거라면서 오히려 돈을 더 쳐주더군.”

“흥정을 안 하려고 하기에 그냥 깎아줬더니 얼마나 고마워하던지. 더 끼워주고 싶어지더라니까?”

옆에 있던 다른 주민들이 맞장구를 치며 거들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오전에 황제군의 보급병과 대면했다는 상인들이었다.

전쟁 중 보급품을 보충하는 방식은 지휘관의 방침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냥 징수해 가도 문제가 없지만, 민심을 달래기 위해 대부분 적당한 값을 치르고 사들이는 편이었다. 단지 후자라 해도 제값을 전부 다 쳐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주민들 입장에서는 크든 적든 무조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그 점을 주목한 이사나는 이번 내전에서 모든 황제군이 보급품을 정가에 사들이도록 정했다. 지독한 가뭄이 끝나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백성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알아봐 주길 바라고 정한 방침은 아니었는데, 그 배려가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사실 저희같이 무지한 사람들이 뭘 알겠느냐만은. 아랫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웃전이 어떤 분일지도 대강 짐작이 가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황제 폐하가 좋은 분이시라는 건 알 것 같습니다.”

“아…….”

무엇보다 기쁜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동안 이사나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거쳐 왔는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군주에게 백성들이 보내는 지지만큼 든든한 것이 또 있을까. 이 자리에 이사나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워졌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감사 인사는 저희가 해야지요. 여신의 딸이 폐하 곁에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제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가 지니고 계신 승리의 별로, 부디 그분을 꼭 황성으로 무사히 모셔가 주십시오.”

정중한 부탁과 함께 주민들이 일제히 내게 허리를 숙였다. 고마운 일이긴 했지만 알리사로 오해받는 채로 있으려니 민망함도 그 못지않게 컸다. 대접을 받는 만큼 상대를 기만하는 기분이라 죄책감이 더 심했다. 돌아가면 알리사한테 정말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어색한 기분을 감출 겸 나는 품속에서 보석 꽃을 꺼냈다. 너무 큰 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그나마 작은 크기인 제비꽃으로, 하나는 심심한 것 같아 3개로 된 다발을 만들었다.

“저기, 이거 받으세요.”

“예? 이, 이게 뭡니까?”

가장 앞에 있던 상인에게 보석 꽃을 내밀자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주변이 저 때문에 망가졌잖아요. 수리 비용으로 쓰세요.”

“아닙니다! 이런 걸 받을 수는…….”

“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래요. 이렇게라도 보상을 해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작아서 많이 비싼 것도 아니에요. 편하게 받아주세요.”

극구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넘기다시피 보석을 쥐어 준 후에야 나는 간신히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달아나다시피 달려가는 나를 향해 주민들이 연신 고맙다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그중 몇몇은 스피어를 찬양하는 찬가까지 불렀다. 아무래도 이 마을에는 이제 두 번 다시 들리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마을은 제법 큰 편이었고, 다른 쪽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전히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뒤 북적북적한 인파 사이에 섞이고 나자 겨우 마음이 안정됐다. 날을 세우고 있던 본성도 다시 잠잠해져서 지금은 평소 상태와 같았다. 또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큰 고비는 넘긴 기분이었다.

‘알리사와 시벨리우스는 잘 구경하고 있으려나?’

대공군과 한차례 충돌했으니 또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한창 즐거워하고 있을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알리사와 시벨리우스의 위치를 찾기 위해 감각을 집중하려는 때였다. 문득 근처에서 나를 주시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만큼 신중하고 은밀한 기척이었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서너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대공군이 따라붙은 건가 했는데 적의를 품고 접근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일단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걷기 시작하자 다가오는 기척이 점점 더 빨라졌다. 단순한 미행인 것치고는 간격이 지나치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건 왠지 납치 전조인데.’

아니나 다를까. 으슥한 골목을 스치는 순간 그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단숨에 접근해서 내 입을 틀어막고는 골목 안쪽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조용히. 당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먼저 떨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린 음성이었다.

“이런 거친 방법을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잠시만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하시면 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나를 붙잡고 있는 팔에서 심한 떨림이 전해졌다. 납치당해 보는 건 처음이긴 한데(누가 이런 경험을 자주 해 보겠냐만), 상대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거부하면 어떻게 나올까 잠시 궁금해졌지만 괜한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무난히 끝날 수도 있는 일을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본인도 무의식적으로 뱉은 것 같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돌아보았더니 잔뜩 굳은 얼굴로 머뭇거리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짐작했던 대로 인원은 세 명. 그중 가장 앞에 있는 자는 아직 십 대로 보였고, 나머지 두 사람도 많아 봤자 이십 대 중반을 넘기지 않았을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누구시죠? 저한테 무슨 용건이세요?”

차분히 건넨 질문에 남자들은 몸을 움찔 떨었다. 납치를 시도한 사람들치고는 지나치게 수줍은 반응이었다. 협박을 당한 사람은 난데, 오히려 내가 그들을 핍박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아무도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기세라 나는 가장 앞에 있는 십 대 쪽을 빤히 응시했다. 아마도 그가 조금 전 내 입을 틀어막은 장본인일 터였다.

그는 평소 이런 일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증명하듯, 티 없이 깨끗한 초록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머리 색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이었지만 마치 일부러 만 것처럼 화려하게 구불거려서 쉽게 잊힐 인상은 아니었다. 시선이 닿는 것을 느꼈는지 그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후에도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내 눈빛이 점점 더 집요해지자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저는 아셀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알리사 님이 맞으시지요? 조금 전의 일들을 전부 봤습니다.”

“……용건을 정확히 밝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설마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라서 저희들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저희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충분히 수상해 보이는데…….”

“아하하, 네,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수상해 보이긴 하네요.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으음, 그렇지만 부디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오히려 알리사 님을 도우러 온 사람들입니다.”

……알리사를 도우러 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나는 그들을 멀뚱히 바라봤다. 처음엔 단순히 알리사의 명성을 듣고 호기심에 찾아온 사람들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상황이 너무 묘하게 흘러가서 그런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무심코 얼굴을 찌푸리는데 아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혹시, 별의 운명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 * *

도를 아십니까?

언젠가 길을 가던 중에 이런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사람은 역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아저씨였다. 그는 내 뒤를 끈질기게 쫓아오며 한참 동안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았었다. 영혼이 참 맑다는 둥, 하늘에 조상이 쌓은 복이 많이 있다는 둥, 그 복을 받을 방법이 궁금하지 않냐는 둥. 어찌나 집요하던지 전력질주로 도망친 후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가 태진이와 약속이 있어서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헉헉거리면서 달려온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태진은 사정을 듣자마자 땅을 치며 웃었다.

“그거 종교 권유야.”

심지어 순진해 보이는 사람만 집중 겨냥한다고 했던가. 태진이 알려준 그 진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한동안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어야 했더랬다.

‘아니. 정신 차리자, 엘. 지금 현실 도피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도 모르게 멀리 헤엄쳐 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구태여 종교 권유를 하는 세계도 아니며, 하물며 그럴 만한 상황이나 분위기도 아니었다. 외면한다고 해서 지금 눈앞에 닥친 사태가 없던 일이 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별의 운명이라는 말은 차마 모른 척하기도 민망하리만큼 무척이나 익숙한 내용 아니던가. 알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덧붙여 최근 들어 내가 내내 신경 쓰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다.

“반려성…….”

신음하듯 중얼거린 말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남자―아셀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고 계시는군요! 네, 맞습니다! 알리사 님이 타고나신 바로 그 운명의 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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