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뭐가 어쨌다고?”
“이, 이 돈은 부족하니 더 주셔야 한다고 하였소.”
“지금이 전시인 거 모르나! 군에 보급하는 물품은 그냥 가져가도 너희들은 할 말이 없어! 그래도 사정 생각해서 값을 쳐주는 건데 그걸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돈을 더 내라? 게다가 뭐? 황제군은 값을 제대로 치렀다고? 이 미친놈이 지금 누구한테 보급품을 넘겼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난 상인이오! 물건을 구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값을 받고 판 것뿐이오!”
“그게 황제군이라면 말이 다르지!”
아무래도 가격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상인이 황제군한테 곡물을 팔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쪽 보급병들이 민가에 다녀왔다고 했었지.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저들을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보급병끼리 마주쳤다면 서로 곤란한 상황을 겪었을 테니까.
“이곳 영주이신 쿠거 남작님은 대공 전하의 오랜 충신이라는 걸 모르나! 네놈은 네가 나고 자란 땅을 배신한 거다!”
“그, 그런 억지가! 우, 우리는 황제 폐하의 백성이기도 하오! 이번 내전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이놈이 그래도 끝까지 반성을 하지 않고!”
벼락같은 노성과 함께 병사가 잡고 있던 상인을 바닥에 떠밀었다. 넘어진 상인은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얼어붙어야 했다. 그를 밀친 병사가 검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배신자에겐 죽음이다!”
“꺄아악!”
병사의 검이 곧 찍어 내릴 듯이 높이 세워졌고,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상인은 틀림없이 죽을 터였다. 고민은 짧고 실행은 빨랐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 하나를 집어 든 다음 힘을 실어 던졌다. 퍼억! 빠르게 날아간 돌멩이가 막 검을 들고 내리찍으려던 병사의 이마를 정확히 가격했다. 그는 압력에 밀려 뒤로 널브러졌고, 쓰러진 후에는 축 늘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대로 기절한 것이다.
“…….”
“…….”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사람들은 잠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의식을 잃은 병사는 당연했고, 조금 전 죽을 뻔한 상인조차 멀뚱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공기와 함께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누, 누구냐!”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대공군의 다른 병사들이 검을 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 봤자 내가 서 있는 곳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저들에게 발각될 리는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나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피면서 다음 일을 고민했다. 기절한 병사가 상인을 농락하는 동안 다른 병사들 역시 물품을 갈취하며 낄낄거리고만 있었다. 전부 똑같은 놈들이긴 한데 되도록 저들까지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사건이 커진다는 우려심도 있었지만, 적당한 선에서 끝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본성이 살아난 상태라서 그런가. 머리가 냉정해지다 못해 잔인한 생각을 품으려고 한다. 조금 전 돌을 던질 때도 나도 모르게 힘이 더 실리려고 해서 긴장했었다. 만약 이곳이 민가가 아니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장소가 아니었다면, 전부 다 죽여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낯설어서 소름이 돋았다.
‘이러다 사고 치겠어.’
이쯤에서 자리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어차피 저들도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찾는 걸 포기하고 돌아갈 터였다. 결정을 내린 즉시 나는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공군의 병사들은 내가 평온한 선택지를 고르도록 놔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악! 왜 이러세요!”
“엄마아!”
“……!”
뒤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병사들이 근처에 있던 여인과 어린아이를 강제로 끌어내더니 검을 들이밀고 있는 게 아닌가.
“어디로 숨은 거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베어 죽이겠다! 숨어 있지 말고 당장 앞으로 나오지 못해!”
……와아, 졸렬해라.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오히려 감탄하게 되는 모양이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싶은 기분과는 반대로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황제군한테 보급품을 팔았다는 이유로 배신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더니, 정작 본인들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자기편이라는 사람들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이쯤 되면 누가 배신자인 건지 다시 판단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저들이 그 사실을 깨달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 평생 자신의 잘못은 모르고 살 테지. 호되게 혼난다 해서 반성 같은 걸 할 리도 없다.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도 저런 쓰레기들은 그냥 제거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불쾌감이 더해지니 억누르고 있던 잔인한 충동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안 돼.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야.’
나는 차분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람을 죽이는 건 싫다. 아직은 그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눈앞의 병사들은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대충 손봐주기만 해도 충분히 겁먹을 텐데 굳이 과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
‘……근데 ‘대충’이 어느 정도였지?’
아, 큰일이다.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애써 정리되어가던 머릿속이 다시 엉켜 들기 시작했다. 이 문제가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처음인 것 같다. 지금까지 당연히 알던 것들을 전부 다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려니 온몸에서 식은땀만 흘렀다. 이 순간에도 대공군의 병사들은 붙잡은 주민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중이었다. 굳어 있는 여인과 아이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들의 목에 닿은 검이 움직일 때마다 피부에 붉은 상흔을 남겼다. 여러모로 느긋하게 고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병사들의 요구에 응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주기로.
“내가 했어요. 사람들을 풀어주세요.”
자백하며 나서자 주위가 온통 술렁거렸다. 협박하던 병사들도 정말 범인이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꽤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더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리는 시선이 노골적이라 그들의 생각이 뻔히 읽혔다. 또 여자로 오해받았군.
“우릴 공격한 게 너라고?”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기색에 나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허리를 굽혀 돌을 주워들었다. 여차하면 보여서 증명할 작정이었는데, 저들도 의도를 파악했는지 기겁해서 소리쳤다.
“됐으니까 돌을 다시 내려놔! 허튼 짓 하지 마라!”
그들의 손엔 아직 풀려나지 않은 인질이 고스란히 잡혀 있었다. 나는 순순히 돌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안심을 하지 못하겠는지 병사들은 한참 동안 내 근처를 살폈다. 혹시 숨어 있을지 모를 내 동료를 찾으려는 것 같았다.
“얌전히 이쪽으로 걸어와. 손은 그대로 들고 있어.”
병사들이 내리는 지시에 나는 묵묵히 따랐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서둘러 나를 붙잡아 밧줄로 묶었다. 그 과정에서 잡혀 있던 인질들은 밀쳐나듯이 풀려났다. 겁에 질린 그들이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져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빙긋 웃어 주었다. 곧 억센 손이 턱을 붙잡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했지만.
“흐음, 이곳 주민은 아닌 것 같군?”
시선이 강제로 틀어지면서,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병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비열하게 웃고 있는 그들은 조금 전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돌멩이 하나 주워 든다고 날을 잔뜩 세우더니, 완전히 제압하고 나자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혹여 다른 동료가 나타나더라도 내가 그들 손에 있으니 어쩌지 못할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얼굴은 꽤 반반하다만 차림을 보니 귀족가의 여식일 리는 없고. 대공군에게 대놓고 저항하다니, 꽤나 대담한 아가씨로군. 설마 여자라고 봐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젠장. 그것 봐. 역시 여자로 오해할 줄 알았어. 예상했다고 서글프지 않은 건 아니라서 기분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중성적인 외모니까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다는 건 이해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여성으로 보는 비율이 압도적인 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왜 예쁘장한 남자라고는 생각하질 못하는 거지? 예쁜 얼굴을 무조건 여성성이라고 생각하는 건 남자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잠시 헛생각을 하느라 떠드는 소리에 반응하는 것도 잊었다. 그걸 다른 쪽으로 이해했는지 병사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겁먹은 모양인데?”
“야야, 네 얼굴이 너무 험악해서 그렇잖아. 곱게 자란 아가씨 같은데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낄낄거리는 잡담 속에 나를 얕잡아 보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 곱게 자란 아가씨 때문에 동료가 기절했다는 건 어느새 잊은 모양이다. 실제로 그들은 내 공격이 성공한 걸 단순한 운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일단 제압부터 하긴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이 보기에) 연약한 여성이 돌을 던져 봤자 얼마나 강하게 던졌겠나 싶었나 보다. 상황 판단력을 보아 그리 머리가 좋은 자들은 아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해 줄까. 그냥 좋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감히 대공군을 건드렸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지?”
히죽거리는 얼굴들이 기분 나빠서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음흉한 시선이라든지 태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저들의 의도를 몰라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당들이 할 만한 생각이란 게 다 뻔하디뻔하겠지만. 어쩜 이렇게 개성이 없나 싶으니 안타깝기까지 했다.
‘야단났네. 여기서 더 화나면 안 되는데.’
적당히 시간이나 끌다가 좋은 선에서 마무리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건만. 이러다 정말로 유혈사태가 벌어지게 생겼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면서 이들을 어떻게 손봐주는 게 가장 적절할지 필사적으로 고심했다.
“그, 그 아가씨를 어쩔 작정이오!”
그때 주민들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처음 대공군에게 위협당했던 상인이었다. 그가 애원하듯이 바라보자 병사들이 코웃음 쳤다.
“어떻게 하든 우리들 마음이지. 군이 하는 일에 감히 끼어들지 마라.”
“이러지들 마시오! 아직 어린 아가씨지 않소! 당신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오?”
“뭐야? 이놈이!”
“저기요!”
그대로 놔두면 상인을 걷어찰 기세라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다행히 병사들의 신경이 내게 더 쏠려 있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주의를 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용건은 나한테 있잖아요. 무관한 사람 건드리지 말고 그냥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하죠.”
단호하게 말하자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가진 것 없이 호기를 부린다고 여긴 듯했다.
“제법 당돌하게 나오는데? 지금 네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대공군을 건드렸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던가요?”
“맞아. 너 때문에 우리 소중한 동료가 심하게 다쳤잖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겠지만 그래 봤자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거야. 우린 너무 화가 나서 무조건 보상을 받아야겠거든.”
“흐흐, 유감이야, 아가씨. 그러니까 사람한테는 함부로 돌을 던지면 안 되지. 운이 나쁘면 이렇게 기절할 수도 있다고.”
나무라듯 건네는 말은 이 시점에선 희롱에 더 가까웠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운이 나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뭐?”
“공격한 사람의 정체가 예상 밖이라서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나 본데. 현실은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사실 난 민간인이 아니에요. 황제군에 소속되어 있거든요.”
그 말에 느긋하던 병사들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들은 당황한 표정을 한 채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나를 보호하려고 나섰던 상인 또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무슨…… 네가 군인이라고?”
“네, 아닌 것 같나요?”
“하하, 웃기는 주장을 하는군. 황제군은 너 같은 여자애도 받아 주는 모양이지?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누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하던 병사가 곧 입을 다물었다. 다른 쪽 병사가 굳은 얼굴로 눈짓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황제군에.”
“응?”
“그, 여기사. 스피어의 딸 말이야.”
“……어?”
그제야 상대의 기색이 조금 주춤거렸다.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기 시작한 병사들이 한데 모여 수군거리는 것을, 나는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태연한 걸 보니까 정말 황제군이 맞나 봐.”, “황제군에 스피어의 딸 말고 또 알려진 여자가 있던가?”, “스피어의 딸이 몇 살쯤이었지?”,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걸?”, “지금 저 애랑 비슷한 또래 아니야?” 등등, 혼란에 가득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이. 잠깐 기다려 봐. 저 여자가 정말 스피어의 딸이라면 정령사라는 거잖아. 그럼 이렇게 묶어두는 건 아무 소용없는 거 아냐?”
“!”
마침내 현실을 인지한 발언이 떨어졌고, 병사들은 일제히 숨을 삼켰다. 그들은 뻣뻣하게 경직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바라보던 시선에 지금은 두려움만 깃들어 있었다. 이들을 접한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분위기였다.
대화의 흐름을 보니 아무래도 저들은 나를 알리사라고 여기게 된 것 같았다. 평소와는 반대의 상황이긴 했지만 나로선 나쁠 거 없는 오해였다. 덕분에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보이기 시작했다. 알리사의 방식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손 봐 줄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빙긋 웃어 주자 병사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 나는 지하수를 일으켜 내부에서 요동치도록 했다. 우르르릉! 몰아친 물줄기가 지반을 강타하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히이이익!”
“제, 제기랄! 진짜였어!”
몇 차례 이어진 승전 이후로 지진은 알리사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고. 약하게 지진 징후를 비추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바로 경기를 일으켰다. 경악한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끝낼 거였다면 애초에 그토록 고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들은 그냥 보내주기엔 질이 나빴고, 개선이 필요한 자들이었다. 다시는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혼쭐이 날 필요가 있었다. 이건 절대 그들이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대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친히 알리사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그 기대엔 부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끝까지 ‘땅의 정령사’다운 방식을 썼다. 다시 말해, 그들이 밟고 있는 지면을 공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