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72화 (272/608)

제272화

“축제?”

나라가 내전으로 앓고 있어도 주민들의 일상은 이어지기 마련이다. 다스리는 영주가 어느 쪽을 지지하든 그 땅에 사는 자들은 결국 다 같은 자국 백성이었다. 민간인들에게 딱히 해코지를 하지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군대가 민가까지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지금 들려온 소식은 조금 뜻밖이었다. 근방의 마을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는 것이다.

“삼백 년이나 된 전통 축제래. 가뭄이 한창 심했을 때조차 명맥이 끊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가 봐. 내전 중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던 거지.”

호들갑스럽게 소식을 전해온 사람은 알리사였다. 보급 때문에 잠시 민가에 내려간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녀오면서 알려줬다는 모양이다. 두 손을 꽉 쥔 채 나를 응시하는 알리사의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스왈트 제국에서 겨울 축제가 열리는 곳은 이 지역이 유일하대. 얼음 조각상 같은 것도 세우고 얼음낚시 같은 것도 한대. 장도 크게 들어서서 볼거리가 굉장히 많다는 것 같아.”

“그래서, 구경 가자고?”

“어차피 내일 오전 출발이잖아. 그때까진 자유 시간이니까 그 사이에 다녀오는 건 괜찮지 않아?”

“그거야 그렇지만.”

“질 좋은 고기와 과일들도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시벨 씨도 기대하는 눈치야. 갔다 오자, 엘 님. 응? 안 가면 후회한다고 내 예감이 외치고 있단 말이야. 응?”

붙잡고 허락을 구하는 말투에 애교가 섞였다. 평소 잘 하지도 않던 행동을 하는 걸 보니 마음이 급하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들뜬 모습을 한 알리사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라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한창 감성이 풍부한 시기의 소녀가 계속 피 튀는 전투 현장에서만 살았으니 질리기도 했을 것이다. 오랜만의 소소한 유희에 마음이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더구나 사막 국가 출신인 알리사에겐 이번이 처음으로 접하는 ‘추운 겨울’이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 눈이 내렸을 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랬다. 하늘에서 솜이 내린다며 경악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낯선 이국에 떨어져 신기한 것도 궁금한 것도 많을 텐데 의연하게 전쟁에만 집중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정서 건강을 위해서라도 기분 전환을 할 필요는 있겠지.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지, 뭐.”

“정말이지? 축제 구경 가는 거야?”

“그래. 대신 후드를 쓰고 절대 벗지 말 것. 네 얼굴이 알려졌을 수도 있으니까.”

“응, 알았어! 고마워, 엘 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알리사가 나를 꽉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리 의젓하게 굴어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리하여 나와 알리사, 시벨리우스로 조합된 축제 원정대(?)가 형성됐다. 자발적 공동체 의식 따위는 없는 라피스는 몹시 귀찮아했기에 그냥 남겨 두고 가기로 했다. 본체가 거대하고 무거워서 그런가, 움직이는 걸 정말 싫어하는 성격이다. 어차피 저러다가도 심심하면 찾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아스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정작 아쉬운 쪽은 데르온과 아스의 부재였다. 알리사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세 번째 공성이 끝난 후로 며칠이 더 지났지만 두 마족은 여전히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돌아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전쟁이 심화하면서 생긴 의외의 부작용이랄까. 누구보다도 교전을 기대했던 두 마족은 정작 그런 상황이 잦아지자 전장을 떠나야 했다. 사방 가득한 살기와 피 냄새가 아스의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마족으로서는 나쁠 거 없는 환경이었으나, 자칫하면 피에 취해 대량 학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아직 어린 아스는 본능을 제어하는 걸 매우 힘들어했다.

“아스는 언제쯤이나 돌아올까?”

“으음, 글쎄. 앞으로 두세 달 정도는 더 훈련해야 괜찮아진다고 하니 할 수 없지. 그때까진 보고 싶어도 참는 수밖에.”

“으으, 그치만 생각할수록 아쉬워. 아스는 하루가 다르게 훌쩍 크잖아. 귀여운 모습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계속 볼 수가 없다니.”

“아, 그건 그래.”

공감할 수밖에 없는 화제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며칠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그전보다 한 자나 자라 있었다. 아스의 성장 속도는 마족치고도 빠른 편이었다. 데르온이 짐작한 바에 의하면 앞으로 180까지는 무난히 클 거라고 했다. 이번에 만나면 알리사의 키를 넘어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키를 따라잡는 것도 순식간이겠지. 대자보다 작은 대부라니, 생각하니 왠지 우울해진다. 사실 그렇게 치면 라피스의 대부인 트로웰도 그보다 작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트로웰은 작아도 작다는 느낌이 아니라서 그다지 위로가 되진 않는다. 솔직히 키가 작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기나 할는지 의문이다.

“성장 속도가 빠른 건 그 녀석이 강한 마족이란 증거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몇 달 만에 본능을 제어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보통 마족 유체들은 몇 년까지도 제어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와 알리사가 눈을 부릅떴다.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강렬한 시선을 받게 된 시벨리우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왜?”

“아니, 그냥. 네가 아무렇지 않게 아스를 칭찬하니까 신기해서.”

“맞아. 시벨 씨, 그런 말 잘 안 하잖아.”

당황하던 시벨리우스가 그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도 자기답지 않은 발언이라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마족에 관해 부정적으로 학습된 그는 좀처럼 두 마족과 어울리지 않으려 들었다. 좋은 감정을 느껴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조차 꺼려해 늘 불편한 얼굴을 하곤 했다. 지금처럼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고 순순히 칭찬하는 일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뒤늦게 변명처럼 한마디 덧붙이긴 하지만 확실히 이전보다는 온건한 반응이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알게 모르게 교류하며 지내는 동안 경계심이 꽤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여기서 괜히 파고들어서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알리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스가 너무 빨리 커서 난 너무 속상하다고. 그냥 지금 모습으로 쭉 있으면 안 되나? 인형 같아서 정말 예쁜데.”

“그 말 아스가 들으면 싫어할걸?”

“응, 그러니까 아스한테는 비밀로 해 줘.”

진지하게 당부하는 얼굴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약속이긴 했다. 이미 알리사는 아스만 보면 예쁘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비밀이라고 해 봤자 본인이 알고 있는 시점에서 성립이 될 리가.

이후로는 누가 들어도 상관없을 가벼운 잡담만 쭉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주변 전경도 천천히 바뀌어 갔다. 황량한 겨울 숲이 끝나고, 잘 다듬어진 길과 건물들이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점차 늘어나는 행인들이 목적지가 근방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와아아!”

도착한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새하얀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곰이나 여우 따위를 비롯해서 여신의 모습까지, 전부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었다. 한껏 상기되어 있던 알리사가 그것을 발견하고 함성을 터트렸다. 근방에는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위에서 얼음낚시가 한창이었다.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선 인부들이 두꺼운 얼음을 잘라내어 옮기고 있었다. 이 시기의 마을 행사를 보는 건 나 또한 처음이었기 때문에 꽤 생소한 광경이었다.

“굉장해! 저게 다 얼음이야!”

“너무 펄펄 뛰지 마. 그러다 후드 벗겨진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알리사는 주의를 받고 나서야 조금 얌전해졌다. 시벨리우스도 덩달아 찔끔했는지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늘 알리사를 밀착 호위하는 데다 블루 엘프라는 특징을 지닌 만큼, 그 또한 외부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후드를 쓴 상태였다. 반대로 평소에 가리고 다니는 편인 나는 이번엔 후드를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게 이상했는지 알리사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엘 님은 후드 안 써?”

“응, 세 명 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오히려 수상한 집단처럼 보일 수 있잖아. 한 명쯤은 드러내 놓고 있어야 눈길을 덜 받을 거야.”

“……괜찮을까.”

“괜찮아. 난 얼굴 알려지지 않았을걸? 너랑 조금 떨어져서 다니는 편인데다 교전 때 앞에 나서는 일도 없고.”

“아니, 엘 님은 그런 것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무슨 문제?”

“그…… 엘 님의 외모 말이야.”

“아아, 뭐야. 또 여자로 오해받는다고? 됐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고 발끈하는 것도 이제 귀찮아. 내가 남자면 된 거지, 뭐. 오해할 테면 하라고 해.”

“아하하, 그런 말이 아닌데.”

“그게 아니면?”

“……아냐. 자각하지 못하면 됐어.”

말투에서 묘한 여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어리둥절해져서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더니 그에게서도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삼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엘 님. 라피스 님 외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응? 화려하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으음. 심미안은 정상인데 말이야.”

“……?”

좀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자 본격적인 장이 펼쳐졌다. 거리마다 거대하고 화려한 좌판의 행진이 늘어서 있었고, 가지각색의 즉석 공연들이 오가는 행인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선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이곳만 다른 세상인 것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의외로 분위기가 좋네. 사람도 꽤 많고. 물건 질도 생각보다 더 괜찮은걸?”

둘러보는 시벨리우스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서렸다. 식료품을 고를 생각에 들뜬 것이 분명했다. 알리사는 화려한 좌판들에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두 사람이 신나서 장을 보는 동안 나는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분명 빈틈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이건만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든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지나는 사람 중에 젊은 남자는 대부분이 여행자거나 한눈에도 외부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용병들뿐, 주민들 중에선 청년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빠졌을 리는 없고, 이 시기에 짐작이 갈 만한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모두 군에 차출된 거다. 내전의 영향을 이런 식으로 발견하니 입맛이 썼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뒤이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광경 때문이었다. 거리 한쪽에 긴장감이 감도는가 싶더니 그 방향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 대공군의 병사들이었다. 수레를 끌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보급품을 구하러 온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여기서 대공군과 마주칠 줄이야. 짜 맞춘 것 같은 순간에 저절로 혀가 차였다. 시벨리우스와 알리사도 그들을 발견한 듯, 신나게 떠들던 대화를 멈추고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대공군을 주시하는 상태로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더 안으로 들어가. 저 사람들은 내가 허튼짓하지 못하게 지켜보고 있을게.”

“엘 님 혼자서?”

“왜, 나 혼자면 위험할 것 같아?”

피식 웃으며 물었더니 주저하던 알리사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괜한 염려다 싶은 것 같았다.

“이쪽은 염려 말고 편하게 놀고 있어. 저자들이 얌전히 떠나는 걸 확인하는 대로 나도 뒤따라갈 테니까.”

“그냥 따돌리면서 다니면 안 돼?”

“매번 위치 확인하는 거 귀찮아. 차라리 대놓고 감시하고 있는 게 편하지.”

“으음, 알았어. 근데 엘 님, 왠지 은근히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아.”

“응? 그런가?”

“남자다워졌어.”

“……남자 맞거든?”

그럼 지금까지 내 분위기는 여자 같았단 말인가? 어이없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알리사가 어느새 시벨리우스를 끌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나 참.”

저 녀석은 정령왕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람. 아무래도 조만간 날을 잡고 경고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잘해주기만 했더니 너무 만만히 보는 것 같아.

거기까지 생각한 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신음을 흘렸다. 망했다. 지금 내가 경고를 하겠다고 한 건가? 그것도 알리사 같은 어린애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니 또 본성이 살아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분위기가 바뀐 거구나.’

엘퀴네스의 본능이라고 했던가. 라피스로부터 ‘거지 같다’고 평가받은 이 성격은 처음 발현한 이후로 종종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최대한 절제하고 있는 편이라 처음만큼 거친 방식으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무례한 양상인 건 변함이 없다.

이 감성은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고, 시리도록 차갑다. 똑같은 정보를 인지하면서도 전혀 다른 태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가끔은 좀 불안하기도 했다. 이 본성이 언젠가는 완전히 나를 잠식하게 될까 봐.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난 어떻게 변해버리는 걸까. 그때의 내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날마다 조금씩 내가 지워져 가는 기분이다. 나타나기 전에 제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느 때 발현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더 골치 아팠다.

“아악! 대체 왜 이러시오!”

“……!”

정신을 차린 건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눈앞에 어수선한 광경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곡물이 놓여 있던 좌판이 크게 엎어져 있었고, 그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누군가에게 매달려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멱살이 잡힌 채 들어 올려진 상태였다. 상인에게 드잡이질을 하는 상대는 대공군의 병사들이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서 모두 우르르 물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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