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70화 (270/608)

제270화

“자, 그럼.”

휴센이 가볍게 팔을 움직였다. 노사제는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람이 부는 건 아니었다. 그저 멀리 떨어져 있던 휴센이 한순간에 눈앞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노사제는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몸이 제멋대로 굳었다. 그래서 어느새 휴센이 검을 뽑아든 것도, 그것으로 바로 옆에 있는 병사를 찌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검에 찔린 병사가 고꾸라졌다. 놀란 그의 동료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우르르 흩어졌다. 노사제는 너무 놀라 입만 뻐끔뻐끔 벌렸다. 휴센은 다시 웃었다.

“지금부터 우리를 죽여 봐. 아, 참고로, 내 동료들이 오기 전에 죽이는 건 좀 힘들 거다. 물론 동료들이 오면 너희가 다 죽을 거고.”

* * *

근처에 있던 수 명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당했다. 낙엽처럼 쓰러지는 병사들은 휴센의 움직임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적을 치고 빠지는 쾌검을 구사하는 검사였고, 속도만큼이나 힘도 강한 편이었다. 그의 검술은 다수를 상대할 때 더 큰 진가를 발휘했다. 대공의 병사들은 휴센을 공격하기는커녕 어디서 치고 들어올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만 바빴다. 아예 빈틈을 내놓고 있는 헤롤에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별거 아니네.’

잠시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헤롤은 곧 안도했다. 상대의 숫자가 많아 내심 걱정했는데 실력을 보니 일반 기사 수준도 안 됐다. 저 정도면 헤롤이 나설 것도 없이 휴센 혼자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지킬 아이들만 없었다면 더 마음 놓고 싸웠을 테니 순식간에 처리하고 끝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장한 병사들이 고작 한 사람에게 농락당하다시피 하자 노사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당혹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그를 보며 헤롤은 킬킬 웃었다. 설마 아이들을 구하러 온 자들이 이만한 실력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곧 끝나겠군.’

헤롤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순조롭게 흘러갈 것만 같았던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했다. 이를 악문 노사제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 것이다. 그것은 향유처럼 보이는 작은 병이었다. 불투명한 유리 속에 찰랑거리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헤롤은 바로 휴센에게 경고를 하려 했다. 휴센 역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는지 노사제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들보다 노사제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그가 무언가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면서 병의 마개를 뽑았다. 이후 보이는 광경에 헤롤과 휴센은 당황했다. 병 속에서 새카만 안개가 피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컥!”

안개가 주위를 감쌌다 느낀 순간 휴센은 목을 부여잡았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앞에 있던 병사들이 달려들어 휴센의 몸에 창을 꽂았다.

“단장!”

경악한 헤롤이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다행히 휴센은 다음 공격은 간신히 막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는지 목을 부여잡고 있는 상태였다. 형세가 순식간에 뒤집혀 그는 날아드는 공격을 막기에도 급급해졌다. 헤롤은 미치고 펄쩍 뛸 지경이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그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이 발목을 잡았다. 휴센이 무너지자 틈을 보고 있던 병사들이 헤롤에게도 달려들었다. 급히 몸을 틀어 피했지만 아이들을 안은 채로는 한계가 있었다.

“아이 한둘 정도는 죽어도 괜찮소! 그놈을 당장 죽여 버리시오!”

노사제가 소리치자 병사들의 공격은 더 거세졌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창끝에 헤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갈등해야 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개죽음을 당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들을 버릴 수도 없었다. 일의 성공과 실패는 부차적인 결과였다. 그가 놔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죽으면 여기서 살아나가도 평생 찜찜한 기분으로 살게 될 것 같았다.

“제기랄!”

결국 자포자기한 그는 아이들을 덮은 자세로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일반인보다 튼튼한 육체를 믿고 자신의 등을 방패 삼을 생각이었다. 휴센이 신호를 보냈으니 지금쯤 일행들이 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틸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컥, 커헉!”

헤롤이 그의 마지막을 직감했을 때, 휴센도 그가 한 선택을 발견했다. 소리가 나가지 않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의 입에서 간헐적인 신음만 터졌다. 병사들의 날카로운 창이 헤롤의 몸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경악한 휴센이 두 눈을 부릅떴을 때였다.

“여기였군.”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더니 헤롤에게 달려들던 병사들이 모두 우르르 떨어져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팽개쳐진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굉장히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휴센은 자신의 숨을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헉! 허억! 헉!”

엎드려진 채 숨을 몰아쉬면서도 휴센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자신이 없었다. 다만 뭔가가 병사들을 공격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공격에 의해 헤롤과 자신이 살았다.

‘쉐리? 다들 온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휴센이 고개를 들었다. 헤롤도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건 전혀 낯선 존재였다. 그들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벌꿀로 빚어 내린 듯 은은한 빛이 감도는 금발, 청아한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남자였다. 횃불이 기능을 잃어 사방이 캄캄해진 상황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 분명히 보였다. 마치 그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어…….”

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가볍게 주위를 돌아본 후 헤롤에게 걸어갔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헤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역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자가 그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손을 뻗자 그의 혼란스러움은 절정에 달했다. 상대는 분명 남자였다. 남자인 게 분명한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몹시 부도덕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닿은 곳은 헤롤이 안고 있는 아이들 쪽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번엔 미칠 듯한 민망스러움으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나마 바로 이어진 광경이 그런 창피한 기분을 금방 잊게 만들었다. 남자의 손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자 시체처럼 굳어 있던 아이들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완전히 따뜻해진 순간 아이들이 약한 기침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 헤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성력……?”

“이런 식으로는 끝도 없겠군.”

놀라서 무심코 입을 여는데, 남자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우와, 이 사람 목소리도 끝내준다. 헤롤은 상황도 잊고 다시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네, 네놈은 뭐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에게 당황한 건 마신의 사제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기척은커녕 공격을 하는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한순간에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그중 대다수는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채였다.

노사제의 고함에 금발의 남자가 아이들을 어루만지기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서늘하게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에 짜증이 서렸다. 단지 그것뿐인데 사제들은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히익! 저, 저리가!”

결국 겁에 질린 노사제가 품 안에서 병을 꺼내 들고 주문을 외웠다. 뚜껑이 뽑힌 병 안에서 검은 안개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에 이미 호되게 당한 휴센이 놀라서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른 상황으로 흘러갔다. 안개가 남자를 감쌌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손짓하자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너무 쉽게 물리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서 뛰어들려던 휴센이 오히려 더 당황했다. 마신의 사제들은 경악하다 못해 주저앉았다. 안개를 뿌렸던 노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어떻게…….”

그에게 이 유리병을 내려준 대공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 주술을 깰 수 없을 거라고 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이 병을 통해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 왔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없애버렸다. 인간의 힘을 뛰어넘을 만큼 강하거나,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뜻이었다.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하는 노사제를 남자는 감흥 없는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길을 받는 순간 사제들은 마치 심판대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꼈다. 까마득히 높은 단상 위에 심판관인 남자가 냉정한 표정으로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이미 크라제의 소관인 것 같다만. 살아 봤자 갚아야 할 죄만 늘겠군. 너희들은 여기서 죽는 게 낫겠다.”

심판관의 입에서 판결이 떨어졌다. 그가 손을 뻗었고, 이어서 새하얀 빛이 주위를 감쌌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제와 병사들이 풀썩 힘을 잃고 짚단처럼 쓰러졌다. 휴센은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의 가슴 가득, 두려움보다 경이로운 마음이 차올랐다. 헤롤도 멍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입만 벙긋거리던 그는 주저앉아 있는 휴센을 보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장, 괜찮아?”

급히 다가간 그가 분주히 휴센의 상태를 살폈다. 뭐가 괜찮냐고 물으려던 휴센은 얼굴을 찌푸렸다. 놀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난 탓에 잊고 있던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관통된 배에서 끊임없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벌겋게 물든 복부를 내려다보며 휴센은 혀를 찼다. 창에 뚫렸으니 예상은 했지만 내장이 삐져나오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큰 상처였다.

“잠깐 기다려봐. 성수를…….”

간단하게 지혈을 마친 뒤 헤롤이 황급히 배낭 안을 뒤졌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금발의 남자가 그들 앞에 다가온 것이다. 당황한 헤롤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동안, 남자는 무심히 손을 내밀어 휴센의 상처를 덮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하얀빛이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피부가 아물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휴센이 허둥거리며 인사하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떠나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이었다. 휴센과 헤롤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운데 왠지 붙잡아도 괜찮을지 조심스러웠다.

“저, 저어!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결국 마음이 다급해진 휴센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다행히 용기를 쥐어짜 낸 보람은 있었다. 힐끗 돌아본 남자가 선뜻 대답해 준 것이다.

“엘뤼엔.”

“엘뤼엔? 형벌의 신 엘뤼엔? 아, 혹시 엘뤼엔의 사제라는 말씀이십니까?”

“…….”

설마 눈앞의 남자가 신(神)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휴센은 당연히 그가 신관이라고 생각했다. 금발의 남자, 엘뤼엔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숨길 생각은 없어서 대답해주긴 했으나 오해를 억지로 바로잡을 생각도 없었다. 그 판단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된 것이다.

“엘뤼엔의 사제?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멍청한 놈아. 당연히 들어봤겠지. 엘이 엘뤼엔의 사제였잖아.”

“아, 맞다! 그랬지?”

“……엘?”

그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서 그의 사제라고 칭해질 만한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엘뤼엔은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너희, 엘을 아나?”

“아, 역시! 엘과 같은 교단의 사제님이 맞으시군요!”

휴센과 헤롤의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 엘뤼엔은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카락을 거둬 목을 보이게 했다. 어리둥절하던 두 사람은 곧 탄성을 흘렸다. 그곳에 신의 문양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엘뤼엔이 방금 전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세상에, 진짜 형벌의 사제였어. 근데 저쪽 사제들은 다들 하나같이 생김새가 왜 저런대? 형벌의 사제가 아니라 미의 사제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평범하게 생긴 사람은 무서워서 사제도 못 하겠네, 등등. 들리지 않게 한답시고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엘뤼엔의 귀에는 전부 선명하게 닿았다.

어쨌든 신분이 명확해지자 두 사람은 엘뤼엔을 완전히 믿었다. 목에 문장이 있다는 건 고위 사제라는 뜻이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그의 경이로운 능력들도 전부 이해됐다. 최근 엘뤼엔의 교단은 천사가 강림하고 교황이 탄생하는 둥 놀랍고도 강력한 권능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마신의 교단 또한 부흥기 때는 사제들의 능력이 말도 못하게 강했다고 했다. 그때는 하급 신관 한 명이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강력한 힘에 매료된 초대 황제가 자청해서 스왈트 제국을 마신에게 바치지 않았던가.

“저기, 이곳엔 어떻게 알고 오신 건지……. 아, 혹시 근래 마신전의 일을 방해하고 다닌다는 분이 혹시 형벌의 사제님들인 겁니까?”

“……비슷하다고 해두지.”

간격을 두고 천천히 나온 대답에 휴센이 마음이 벅차올랐다. 형벌의 신전이 최근 마신전과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곧 성전(聖戰)이 일어날 거라는 예측도 있었는데, 어쩌면 그런 일환인 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으니 그들 입장에선 큰 행운인 셈이었다.

물론 사실은 교단과는 상관없이 엘뤼엔 혼자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초롱초롱한 눈길을 보내는 두 남자를 외면하며 엘뤼엔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아크아돈 어딘가에 숨어 있을 마왕을 찾아내어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려오고 나자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가 걸고 있는 목걸이 때문이었다.

중간계에 내려오기 직전 카노스에게서 빼앗아온 주신의 인장. 엘뤼엔은 자신의 목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 돌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죽 끈에 매달아둔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지만 신물이라 불리는 귀한 것으로, 그 가치는 일개 보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중간계의 존재들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신의 기운에 금방 장악당한다. 신이 머무는 곳은 그대로 성지가 되고, 스치기만 해도 정화되며, 만지기라도 하면 성력이 넘치는 것이 되어버렸다. 기가 약한 자들은 눈만 마주쳐도 숨이 넘어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신들은 중간계에 내려오면 본인의 힘을 억제하게 되는데, 그걸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목걸이와 같은 신물(神物)이었다.

신물을 착용하는 동안엔 기운이 저절로 억제되어 본인이 제어하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신물은 구하기도 어렵고, 대부분 기한이 짧은 데다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다. 영구적이면서 사용 규칙이 거의 없는 신물은 신계에서 단 하나, 마신이 지닌 ‘주신의 인장’이 유일했다. 그래서 가져온 것까진 나쁘지 않았는데, 이 자체가 마신의 파장에 맞춰져 제작된 것이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다루기가 더 어려웠다. 목걸이를 통제하는 데만 힘이 다 소모돼서 본래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카노스가 말한 대로 마왕을 찾아가 봤자 당하는 건 자신이 될 게 뻔했다. 찾은 뒤에 풀어내자니 그조차 불가능했다. 신물을 착용한 후 해지하면 반작용이 크게 일어나 신계로 강제 송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악신의 각성을 늦추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제물을 모으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한동안 마신관들을 방해하고 다니는 일에만 집중했다. 신들에게 향하는 아이들의 기도 소리를 듣고, 그중에서 절박한 것 위주로 찾아 탐색하니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졌다. 물론 그 또한 제한되는 영역이 많아 놓치는 것도 많았다.

“빌어먹을 카노스.”

손쉽게 목걸이를 내준다 싶더니. 그 망할 마신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적당히 마신전을 다니며 분풀이를 하고 나면 포기하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해둔 건지 엘과의 통로도 끊겨서 말을 전할 수도, 위치를 짚어낼 수도 없었다. 덕분에 아크아돈에 온 이후 변변한 연락조차 못하는 중이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이가 저절로 갈렸다. 그런 자세한 상황을 알 길이 없는 헤롤과 휴센은 그의 입에서 나온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보다 너희, 엘에게 연락할 수 있나?”

“예? 아아, 헤어진 후로 꽤 시일이 됐습니다. 그동안 연락을 안 해봐서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황제 폐하가 계시는 곳에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그게 어디에 있지?”

“본대 자체는 지금쯤 카델라 평원을 넘었을 겁니다. 하지만 폐하가 계시는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엘뤼엔은 시야를 넓게 펼쳐 대강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유희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꽤 오랜 시간을 지켜봐 온 대륙이기에 아크아돈의 지리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훤했다. 카델라 평원이면 이곳에서 생각보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 상태로 계속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갑자기 소식이 끊겨 엘도 당황했을 테니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단지 지금은 그의 힘을 방해하는 목걸이가 감각까지 둔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오늘만 해도 공간이동을 했는데 전혀 엉뚱한 장소로 떨어졌다. 덕분에 본래 생각해 뒀던 것보다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자칫하면 엘을 찾아가도 길이 어긋나거나 그를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휴센은 고심하는 엘뤼엔의 모습을 찾아갈 방법을 알지 못해 고민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저어, 사제님. 일단 본대와 합류하기로 한 지점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이곳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그쪽으로 이동할 생각입니다만. 괜찮다면 저희와 같이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본대로 간다고?”

“예, 그곳에 가시면 폐하가 계시는 위치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결정을 내리는 시간은 짧았다. 엘과 친분이 있는 이들이니 목숨을 잃지 않도록 지켜줄 겸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뤼엔은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좋아. 그러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