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와, 진짜 미치겠네. 대체 그놈들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이 천벌을 받을 놈들!”
“이제 어떡하지, 단장? 신전을 본격적으로 털어볼까?”
헤롤이 흉흉하게 눈을 빛냈다. 이릴과 마이티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는 두 사람을 휴센이 강제로 눌러 앉혔다.
“거긴 비었다고 했잖아. 돌아보면서 최대한 기척을 살펴봤는데 느껴지는 게 전혀 없었어. 신전 안에서 손을 쓴 게 아닐 수도 있고, 아마 그렇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겼을 거다. 이 시점에서 신전을 다시 조사하는 건 무의미해.”
“으음, 하긴.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옮겨도 한참 전에 옮겼겠지.”
“이미 이 지역엔 없는 거 아냐?”
불길한 결론에 도달한 쉐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른 이들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다. 사실 떠난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쉬지 않고 이동하면 며칠 간격 정도는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상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거니 그렇게 속도를 내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경로를 어느 정도 파악할 때나 해볼 만한 일이었다. 대공이 모으는 거라면 수도로 갈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선 헛수고로 끝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당장 이곳에 없다고 판단하기엔 일러. 보아하니 한두 번 하는 짓이 아닌 것 같은데. 매번 납치한 애들을 그때그때 외부로 내보내는 건 번거롭기도 하고, 들킬까 봐 겁도 나겠지. 그러니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이동 수단을 활용하려고 할 거야.”
그나마 이어진 휴센의 말이 그들을 안심시켰다. 모두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집중했다.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이동 수단이라……. 짐작 가는 거 있어, 단장?”
“내가 알기론 마신의 교단은 보름 간격으로 한 번씩 교황의 이름으로 본단에서 파견이 나와. 공식적으로 정해진 방문이라 정기적으로 다녀가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 아마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아이들을 넘기는 게 아닐까 싶어.”
“오, 그거 일리 있네. 그럼 파견이 오는 날을 알아보면 되겠군?”
“이미 알아봤어. 이틀 후더라.”
여유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촉박한 기한도 아니었다. 일단 추격할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 전보다는 한결 차분한 반응이 돌아왔다.
“잠복했다가 현장을 덮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어떤 이변이 있을지 모르니 가능하면 그 전에 구해내자. 일단 아이들을 숨긴 장소부터 찾아야 해. 파견단 편으로 보낼 생각이라면 그리 먼 곳에 두진 않았을 거다. 신전을 자주 오가거나 교류하는 곳부터 수색을 시작한다.”
“즉, 외부에 협력자가 있다?”
“사제도 타락하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타락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씁쓸한 얼굴로 대꾸한 뒤 휴센은 이어서 설명을 시작했다. 그가 오후 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며 알아낸 정보들이었다.
“사나흘에 한 번꼴로 식료품과 비품을 실은 수레가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군. 반대로 신전 쪽에서 다른 장소로 보내지는 수레도 있었어.”
“오오, 그게 뭔데?”
“빨래.”
“빨래?”
“신전 안엔 빨래터가 없어서 의복을 전부 외부에서 세탁해서 가져오는 모양이야. 그래서 빨랫거리가 나가는 거지. 그것도 하루에 한 번씩, 매일 꾸준히.”
“호오, 빨래라……. 위쪽에 옷가지를 잔뜩 쌓아두면 아래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무도 모르겠네. 그것 참 쥐도 새도 모르게 꼬마 몇 옮기기에는 딱 적당한 수단인 것 같은데?”
빙긋 웃은 헤롤이 입술을 가볍게 혀로 핥았다. 사냥감을 앞둔 맹수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수레 도착점이 어디라고?”
* * *
밤이 깊은 시각. 어둠 속에 잠긴 한 건물 부근에 두 개의 검은 인영이 어른거렸다. 기척을 감춘 채 조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들은 바로 휴센과 헤롤이었다.
“젠장, 왜 내가 단장이랑 한 조냐고.”
주위를 살피는 내내 헤롤은 작은 소리로 연신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안쪽을 살피던 휴센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이제 그만 좀 구시렁거려라. 제비뽑기였잖아. 다 끝난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물고 늘어질 셈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니까 그렇지. 단장이랑 같이 가는 한 명에 내가 뽑힌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왜 제비뽑기로 정한 거야? 그냥 쉐리랑 간다고 하면 됐잖아.”
“우린 모두 한식구고, 난 단장이야. 그런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순 없어.”
“처음엔 지정해서 정했잖수? 나랑 이릴이랑 묶어줬으면서.”
“그래서 뭐. 그게 너희가 연인이라서 붙여준 건 줄 알아? 임무에 맞는 성향과 효율성을 고려해서 나눴을 뿐이야. 너희들이 연인이 아니라 원수였다고 해도 붙였을 거다.”
“아무튼. 단장은 그 고지식한 성격이 가장 큰 문제야. 덕분에 이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나고 마는 거잖아.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슈?”
“시끄러. 나라고 너랑 같이 가는 게 좋은 줄 아냐?”
“아니, 뭐?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허, 단장. 그렇게 나한테 매력을 어필하고 싶었어? 미안하지만 내겐 이릴이 있거든.”
“……됐다. 너랑 말을 섞은 내가 잘못이지.”
실력으로는 한참 앞서는 휴센이지만 입담으로는 헤롤을 이길 수가 없었다. 깔끔하게 포기한 휴센은 본인에게 더 편한 방식을 선택했다. 간단히 말해, 헤롤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꾹 내리눌렀다.
“큽! 아프잖아!”
“목소리가 크다. 이러다 들키면 가만 안 둔다, 너.”
“우씨,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헤롤에겐 본인이 맞을 짓을 한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휴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꾸만 깐죽거리는 동료에게 울화가 치밀긴 하지만, 덕분에 남의 집에 숨어든 상황에서도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팔크라고 불리는 한 부호의 저택 앞이었다. 팔크는 비단과 명주를 비롯한 다양한 직물과 그 가공품들을 취급하는 상인이었다. 저녁 시간을 모두 할애해서 조사한 끝에, 휴센은 그가 운영하는 상단에서 마신전의 의복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신전에서 나온 빨랫거리들은 모두 그의 저택 안에 있는 개인 빨래터로 보내졌고, 건조와 다림질까지 전부 마친 후 다시 신전으로 돌려보내졌다.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해서 진행하는 일이라 별개의 보관창고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휴센과 헤롤은 바로 그 창고를 노리고 있었다.
“정말 저기에 있을까, 단장?”
저택의 경비는 삼엄했지만 따돌리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두 사람은 손쉽게 창고를 찾아냈다. 외딴곳에 홀로 서 있는 구조물은 단단한 판자로 지어져 있었다. 꽤 으슥한 곳에 있어서 낮에 와도 어두울 것 같았다.
“있길 바라야지.”
창고 옆엔 운송 수단인 듯한 빈 수레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휴센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폭죽을 손으로 매만졌다. 위급 시 다른 일행들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 나머지 일행 쪽에도 있었다. 휴센과 헤롤이 팔크 상단 쪽을 조사하는 동안 다른 세 사람은 신전에 식료품과 비품을 공급하는 상단 쪽을 맡았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도착해서 작전을 개시했을 터였다.
“가자.”
“응, 근데 단장. 지금 막 생각난 건데. 본단에서 나온다는 파견대 말이야. 거긴 이쪽이랑 한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틀 후에 오는 게 그냥 평범한 정기 방문이라면?”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아니, 왜. 단장의 추측이 맞다면 이곳 상인들도 이 일에 가담하고 있는 거잖아. 그럼 그놈들 편으로 운송될 수도 있는 거 아냐? 사실 타지를 자주 왔다 갔다 해도 주목받지 않는 곳이라면 상단만 한 게 없잖아. 즉, 납치된 애들은 이미 이 지역에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지.”
“그건 알겠는데, 그게 왜 파견대는 무고할 거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냐?”
“단장이야말로 왜 본단이 관여한다고 확신하는데? 마신관들이 다 한통속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 대공이 포섭한 몇 개의 신전들만 이러는 걸지도…….”
“글쎄. 다 한통속은 아니라도 본단 쪽은 확실히 대공의 끄나풀일걸? 교황이 황제 폐하한테 지명수배도 내렸던 거 기억 안 나?”
“어? 헉, 맞다. 그랬지? 워낙 조용히 묻혀서 까맣게 잊었네.”
머쓱하게 뺨을 긁는 헤롤을 보며 휴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 길드의 등급 시험엔 상황 판단력을 보는 부분도 있었다. 무위를 가장 높게 치긴 하지만 그 또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헤롤이 어떻게 은패를 딸 수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으음, 그럼 상단을 통해서 운송하지는 않는 건가?”
“……넌 어떻게 하나에 하나만 생각 하냐. 그야 상단 편으로 운송되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번 일에선 그쪽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어. 알아보니까 최근 얼마간은 어느 상단도 외부로 나가거나 들어온 적이 없더군. 새벽에 몰래 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허어, 그건 또 언제 알아봤대? 이럴 때 보면 엄청 치밀하다니까.”
“네가 너무 허술한 거다. 어쨌든 지금은 아이들이 아직 이 마을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움직이는 상태야. 다른 생각 말고 이쪽에나 집중해. 찾아서 나오지 않는 후의 일은 나중에 고민할 문제니까.”
“예이.”
고개를 끄덕인 헤롤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들어왔다. 집중하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진지해진 헤롤은 꽤 믿음직한 동료였기에 휴센도 안심하고 작전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빗장을 빠르게 부수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목조 건물 특유의 향과 마른 먼지 냄새가 풍겼다. 헤롤이 허리춤에 찬 배낭 안에서 작은 호롱을 꺼내들어 불을 붙였다. 캄캄하던 공간에 빛이 생기면서 주변의 것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은 줄에 걸린 옷들로 빼곡했다. 양 벽면엔 거대한 장이 꽉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 옷을 담은 바구니가 칸마다 가득 들어찬 모습이었다. 바닥 한구석에 아직 빨지 않은 옷더미가 쌓여 있는 것도 보였다. 휴센과 헤롤은 신중하고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옷더미가 쌓인 곳은 물론 문이 달려 있는 장은 전부 열어 아이들을 숨길 만한 공간을 찾았다. 하지만 기대할 만한 결과는 얻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도구함인 듯 보이는 장을 열어본 헤롤이 낙담한 얼굴로 휴센을 돌아보았다.
“여긴 아무것도 없어. 단장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누가 갇혀 있다기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네가 보기엔 어때?”
“단장이 못 느끼면 없는 거지.”
허탕인가.
휴센의 얼굴이 흐려졌다. 추측으로만 진행하던 작전이라 실패할 가능성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이렇게 되니 입맛이 썼다.
“저택 안에 숨겼을 수도 있지 않아? 지하실이나 벽장 같은 곳에.”
“할 수 없지.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돌아가기도 좀 그러니까 그쪽도 가보자. 들키면 각자 알아서 도망치는 거다.”
“그거 좋지. 완전 스릴 넘치겠는데?”
이런 순간에조차 유머를 잃지 않는 게 헤롤다웠다. 휴센은 피식 웃었다.
“그럼 이 문만 제대로 닫아놓고……어이쿠!”
쿵! 그 순간 도구함 속에 걸려 있던 물건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문을 닫던 헤롤이 실수로 안을 건드린 것이다.
“……헤롤.”
“으아, 미안, 미안. 이게 왜 갑자기 떨어지지?”
어색하게 웃는 헤롤을 노려봐준 후, 휴센은 창고 문 앞에 바짝 기대어 섰다. 혹시 누군가 소리를 듣고 오지는 않을까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근처에 아무도 없는 듯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안심한 휴센은 한마디 해주기 위해 헤롤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곧이어 보이는 광경에 그는 그대로 당황해야 했다. 바로 수습해 두었을 거란 예상과 달리, 헤롤은 도구함 안에서 오히려 물건들을 잔뜩 꺼내놓고 있었다. 정리를 해둬도 모자를 판에 반대로 어질러놓는 것을 보고 휴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단장, 이리 좀 와봐.”
헤롤은 돌아보지도 않고 물건만 계속 꺼냈다. 아예 도구함 자체를 비울 생각인 듯했다. 이유가 궁금했던 휴센은 잠자코 그에게 다가갔다.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을 대부분 빼낸 탓에 도구함은 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큰 물건들 위주로 보관해 두었던 곳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내부가 넓었다.
“뭔데.”
“아니, 아까 떨어졌을 때 소리가 좀 이상해서.”
“소리?”
“봐.”
헤롤이 주먹을 눕혀 바닥을 가볍게 튕겼다. 퉁, 짐작했던 것보다 가볍게 울리는 소리에 휴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헤롤이 그런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하실 같은 거. 찾아낸 것 같지 않아?”
* * *
바닥을 들어내자 뻥 뚫린 구멍이 나타났다. 그 아래엔 사다리가 내려져 있었다. 휴센은 조금 어이없는 기분으로 헤롤을 바라보았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더니. 실수로 떨어트린 물건 하나가 계기가 되어 밀실을 찾아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생각해 보면 헤롤은 예전부터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위험한 순간에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살아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마수와 싸우다 죽어갈 때, 신관 지망생이라고 생각했던 엘이 갑자기 치유력을 써서 살려낸 것처럼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 휴센은 헤롤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들떠 있던 헤롤이 기습 공격에 끙끙 앓았다.
“왜 또 때리는데!”
“조금 재수 없어서.”
“와, 이제 성과를 올려도 구박이야. 단장은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지?”
“닥치고 내려가.”
휴센의 눈빛이 더 살벌해졌다. 헤롤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사다리에 몸을 실었다. 휴센도 이어서 아래로 내려갔다.
“단장.”
밀실은 그다지 깊은 편은 아니었다. 바닥에 닿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휴센은 고개를 들었다가 바로 얼굴을 굳혔다. 헤롤이 몸을 굽히고 앉은 상태에서 급히 손짓하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호롱불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들이 비쳤다.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둘. 찾아야 하는 숫자보다 하나가 더 많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제대로 찾았군.”
“응. 근데 다들 몸이 엄청 차가워. 숨을 안 쉬는 것 같아.”
그 말에 휴센은 바로 아이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정말로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호흡도 거의 없어서 죽은 것처럼 보였다. 바깥에서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도 이런 상태였기 때문인 듯했다. 손목을 잡고 한참을 집중하고 나서야 아주 약한 맥이 잡혔다. 그제야 휴센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아직 살아 있어. 마영초로 재워 놓은 모양이다.”
“젠장, 설마 납치한 뒤에 내내 이런 상태로 가둬 둔 건가? 밥도 안 주고?”
“시체로 보낼 생각은 아닐 테니 뭔가 먹이긴 했을 거다. 제대로 챙겨 주진 않았겠지만.”
“그게 굶기는 거나 다름없지!”
“일단 애들 챙겨. 바로 데리고 나가자.”
아직 주위는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침묵에 잠겨 있었다. 휴센과 헤롤은 각자 두 명씩 아이들을 안아들고 조심스럽게 창고를 빠져나갔다. 어른거리는 횃불을 피해 빠르게 이동하던 두 사람의 시야에 곧 저택의 담장이 들어왔다. 저 담을 넘고 나면 한시름 덜 수 있을 것이다. 코앞에 다가온 목적지에 그들이 걸음을 더욱 박찰 때였다.
“……!”
그 순간 두 사람의 앞에 누군가가 불쑥 뛰어들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흠칫 놀란 휴센과 헤롤이 반사적으로 이동을 멈추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짧은 틈에 창과 횃불을 든 무리가 그들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 모두 칠흑같이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본래 저택 안을 지키는 경비대와는 다른 존재들이었다. 휴센은 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어둠의 기사단. 대공의 수족들이군.”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준비해 두었지.”
병사들 사이에서 하얀 법의를 입은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마신의 신관들이었다.
“최근 우리 일을 방해하고 다니는 쥐새끼들이 있다더니. 오늘에서야 드디어 꼬리를 잡는군.”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노사제는 오전에 휴센에게 신전 안을 안내했던 신관이었다. 그 또한 휴센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또 보는군요, 사제님.”
“하하, 그래, 그렇게 된 거군. 왠지 평범한 녀석은 아닌 것 같다 싶었지. 처음부터 다 알고 접근한 거였나? 여기까지 알아내다니 보통 실력이 아니군. 배후가 누구지?”
“이 아이들의 부모가 보냈습니다만.”
“헛소리 말고 진짜 배후를 대라. 네놈들이 요 근래 계속 우리 일을 망치는 곳과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하렸다?”
“우와, 우리 말고도 또 이 짓을 막고 있는 영웅들이 있단 말이야? 아직 이 세상도 살 만하네.”
“닥쳐라!”
노사제가 대화에 끼어든 헤롤을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헤롤 또한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순순히 답할 생각이 없다면 할 수 없지. 자백을 받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어차피 네놈들은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을 얌전히 넘겨라.”
“이거 완전 멍청한 할아범이네. 살려줄 테니까 애들만 내려놓고 꺼지라고 해야 협상이지. 그딴 식으로 말하면 누가 그러십쇼 하겠어?”
이번에도 헤롤이 약을 올렸다. 휴센도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가 도발하는 걸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노사제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피식 비웃었다.
“멍청한 것은 네 녀석이겠지. 넘기는 게 마음은 편할 것이다. 그 아이들을 살려두고 싶다면 말이다.”
“……즉, 넘기지 않으면 우리랑 같이 죽이겠다?”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하! 이 새끼들을 보게? 아이들을 구하러 온 사람한테 그 아이들의 목숨을 걸고 협박을 해? 사람 새끼도 아니잖아?”
대놓고 퍼부어지는 욕설에도 신관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를 부득부득 갈던 헤롤은 다리에 와 닿는 묵직한 감각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휴센이 안고 있던 아이들을 그의 다리에 기대어 앉혀 두고 있었다.
“……단장, 지금 뭘 하는 거요?”
“잠시 애들 좀 보고 있어라.”
“뭐? 아니, 잠깐……!”
“다치게 하면 죽는다.”
제 할 말만 마친 뒤, 휴센은 바로 주머니에서 폭죽을 꺼내 들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발 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노사제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을 땐 이미 늦었다. 그의 손에서 터진 폭죽이 하늘에 붉은 빗줄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미안하지만 납치범들이 하는 ‘살려 준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한 성격은 아니라서.”
“뭐라?”
“그러니 제안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뭐에 쓰려고 애들을 모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쪽에 넘겨주면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을 살 것 같진 않군요.”
담담한 대꾸와 함께 휴센은 빙긋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였으나 옆에 있던 헤롤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휴센을 감도는 기류가 사나워져 있었다.
‘완전히 열 받았네.’
저럴 때의 휴센은 건드리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 헤롤은 얌전히 아이들이나 돌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