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66화 (266/608)

제266화

잠시 후 황궁 밖으로 한 대의 마차가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갔다. 라온휘젠 일행을 태운 마차였다.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카르테의 시선이 나른했다. 그런 그를 응시하는 카리브디스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그렇게 만드신 겁니까. 황태자더러 소녀를 구출하라 부탁하시다니.”

조금 전 접견실 안에서는 표정을 감추느라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올 뻔한 한숨을 참느라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쥐었는지 몰랐다.

“왜? 꽤 재밌게 되지 않았나? 난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유카르테가 가볍게 키득거렸다.

“타국의 황태자가 끼어들어 여신의 딸을 납치하다니. 분탕질로는 더할 나위 없지. 이사나가 그곳에 있다면 더 일이 커질 테고,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혼란을 줄 수 있을 거다.”

“소녀가 저항할 겁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이왕이면 매우 격렬했으면 좋겠군. 그 소녀가 황태자를 다치게 하거나, 혹은 죽게 만든다면 더 재밌어질 거야. 나르젠 황제는 제국의 자랑인 황태자를 끔찍하게 아낀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귀애하는 아들이 본인과는 상관도 없는 전쟁에 휘말려 비명횡사하면 어떻게 될지 몹시 궁금해지는군. 제국 전쟁으로 번지는 건 일도 아니겠어.”

“전하.”

들을수록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모를 사태에 카리브디스는 다시 한숨을 삼켰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오해가 풀린 채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속인 걸 알아차리면 황태자의 칼이 이쪽을 향할 겁니다.”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뭐, 그러면 할 수 없지.”

“그 말씀뿐이십니까?”

“그럼 뭐가 더 있지?”

“……전하의 생각을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 무슨 생각?”

“요즘 전하를 뵈면 뒤를 전혀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으신 분처럼 보입니다.”

그래, 그때 그 시절처럼.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듯 공허하기만 하던 뒷모습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잔상이었다. 그렇기에 이 말을 내뱉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금방이라도 그의 주군이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초조해하는 마음은 금단 앞에 한 걸음 다가선 기분에 가까웠다. 그러나 돌아보는 유카르테는 오히려 밝게 웃고 있었다.

“하하, 그런 걸 염려하고 있었나? 걱정하지 마라, 파이. 난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아니야.”

불쑥 들려온 어릴 적 애칭에 카리브디스는 움찔했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그의 두 눈을 응시한 채, 유카르테가 입술 가득 호선을 그렸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있는 거다.”

* * *

날이 저물어가면서 짙은 석양이 궁 안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업무를 끝마친 사람들이 한차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한산해지는 시각이었다.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황궁의 일상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평소와 같은 업무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과가 이어졌다. 물론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 내부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귀족들 중 일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들 대부분이 황제 파에 속해 있거나, 그들과 연계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미리 상황을 알고 몸을 피했다는 말도 있었고 대공이 손을 썼다는 말도 있었다.

진실이야 어찌 됐건 중요한 점은 대공이 황제와 반목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황제의 선전포고에 항복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격하는 중이었다. 황제가 사라진 순간부터 이미 병력을 일으켰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모두가 지금까지 그가 취해 왔던 입장을 완전히 뒤집는 흐름이었다.

대공은 황제가 역도들에게 납치되었고, 카웰 공작이 바로 그 주동자이며, 황제는 그의 꾐에 빠져 자신을 오해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었다. 의적단의 활동 때문에 반대 주장이 나온 적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는 다들 대공의 말을 신뢰하던 분위기였다. 그만큼 그동안 대공이 걸어온 행보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진위를 파악하고 있었다.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와서는 깨달았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대공을 지지하는 귀족들도 그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공이 정보를 통제하고 있긴 했지만, 알음알음 들려오는 소식들을 아예 막지는 못했다. 백전노장인 카웰 공작이 황제를 위해 검을 뽑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상당한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군대가 어디까지 올라왔다더라, 어느 지역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졌다더라,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접할 때마다 그들은 정말로 황제가 환궁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각자의 사정으로 굳어진 분위기는 당연히 궁 전체로 이어졌다. 웃음과 대화 소리가 완전히 그쳤고, 누구도 서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모이는 자리에선 다들 제 몸을 사리기에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대공의 검이라 불리는 남자의 모습은 특히 주목받기 쉬웠다.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검붉은 망토를 걸친 그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래도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금은 사신이라도 만난 듯 피하기 바쁜 태도였다.

이미 사람들 사이엔 그가 궁을 돌아다니며 황제를 지지하거나 대공을 거스르는 자들을 색출해 낸다는 소문이 깊게 퍼져 있었다. 실제와는 달랐지만 카리브디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한 그는 부관조차 대동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시선이 따라붙는 것도 귀찮았는데 알아서 피해 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사실 최근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때문에 주위의 시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해가 떨어지는 속도만큼 어두워지는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원래 그는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편이라 어떤 일이건 고민을 오래 잇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며 집중하는 경우는 오직 그의 주군인 대공과 관계된 일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엔 조금 전 물러나기 전에 보았던 대공의 모습이 꽉 차 있었다.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가시가 걸린 듯 마음에 남았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있는 거다.>

웃으면서 건넨 그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요즘 대공은 기분이 계속 좋아 보였다. 작전이 실패했다는 보고에도 불쾌해 하긴 했지만 그 정도면 평소보다는 반응이 온건한 편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도 위화감을 느꼈는데, 그가 한 말을 돌이켜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대공에겐 눈앞의 내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판을 크게 키우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정복 전쟁을 바라고 있는 걸까. 카리브디스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공이 어떤 길을 향하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묵묵히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대로 괜찮은 건지 때때로 의문에 잠기게 된다.

각 대륙은 서로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스왈트는 충분히 넓고 풍요로운 땅을 보유한 제국이었다. 지독한 가뭄도 끝나 이제야 겨우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굳이 정복 전쟁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건 그 개인적인 판단에 불과할 뿐, 대공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모하다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다시 말씀드려봐야겠군.’

대공은 일평생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 여념이 지나치게 강해진 나머지 너무 멀리까지 뻗어 나간 걸지도 모른다. 이 내전이 끝나고 나면 흥분도 어느 정도 가라앉을 테니 다시 이성을 되찾을 것이다. 카리브디스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본궁 건물을 막 나섰을 때,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어둑해진 저편으로 어느새 달이 떠올라 있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형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제법 차오른 상태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그는 자택에 꽤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본래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내킬 때만 얼굴을 비치는 정도였으니 딱히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상황이 언제 변할지 모르는 시기에 돌아볼 장소로 적합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기다리고 있을까.’

황궁으로 출발하던 날 저택 앞까지 배웅 나왔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녀오세요!” 환하게 웃으며 흔드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저택을 나설 땐 늘 사람들의 배웅을 받아왔지만 그날따라 퍽 이상한 기분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대꾸를 건넨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녀오겠다.” 무뚝뚝한 대답이었을 텐데도 아이는 기쁜 얼굴을 했었다. 그 모습을 상기하자 더 마음이 초조해졌다. 비상시국이라 해도 당장 출정하는 게 아닌 이상 황궁에 종일 매여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귀족들은 여전히 저택을 오가며 근무했고, 병사들 또한 가족이 있는 자들은 간간이 들렀다 오는 편이었다.

‘……가족이라.’

그 울림이 주는 묘한 느낌에 그는 입가를 문질렀다. 더 바빠지기 전에 한두 번 정도는 들러도 괜찮을 것이다. 결국 결심을 굳힌 그는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말 한 필을 가져오게 했다.

“다녀오십시오, 각하!”

안장에 오르기 무섭게 출발하는 그를 향해 병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경례했다. 카리브디스는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빠른 속도로 내성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정문에 다다르고, 이어서 마지막 통로를 나서려던 때였다. 시야에 막 길목을 돌고 있는 검은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마차의 방향이 동쪽 숲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 입궁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거니와, 그 길에 있는 건 히아신스 궁이라고 불리는 작은 궁전 하나밖에 없었다. 본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궁으로, 워낙 외진 장소에 있어 방문하는 이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대공이 개인 시간을 보내는 데 쓰는 것 같긴 했으나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기에 그조차 가 본 일이 없었다.

“멈춰라.”

카리브디스는 한달음에 말을 몰아 마차 앞을 막아섰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견제하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공 각하!”

“히아신스 궁으로 가는 길인가? 이건 무슨 마차지?”

“신전에서 오신 마신관들이십니다. 대공께서 부르셨습니다.”

“마신관?”

“승리를 위한 제사를 지내시는 데 보조할 사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대공은 평소에도 마신을 위한 제사를 자주 지내는 편이었다. 그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기에 카리브디스는 별다른 의문 없이 마차의 창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거둬 보았다. 누군가 숨어들었을 가능성을 대비해 간단히 내부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에 앉아 있는 인영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겁먹은 듯 고개를 든 사람들은 전부 마신관의 복장을 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대다수가 아직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다들 나이가 너무 어려 보이는데.”

“견습 신관이시라 그렇습니다.”

“……그렇군.”

흠잡을 수 없는 대답에 걸리는 문제점은 없었다. 카리브디스는 이내 천을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이 안도한 얼굴로 경례한 후 마차를 다시 몰아갔다.

카리브디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미끄러지듯이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위화감이 드는데 그것이 뭔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뭔가를 놓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자택에 들어서자 집사 루벤이 환한 얼굴로 반겼다.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주인의 갑작스러운 귀환에 그는 무척 놀란 상태였다. 한 편으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흐뭇하기도 했다. 카리브디스는 겉옷을 벗기도 전에 이제는 습관이 된 질문부터 건넸다.

“레이는?”

“도련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서재?”

“요즘 그림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들여놓는다 했던가. 고개를 끄덕인 후 카리브디스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다양한 종류의 그림책들이었다. 그는 곧 그 속에 파묻혀 앉아 있는 작은 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제 몸만큼이나 큰 책을 펼쳐 둔 아이는 누가 들어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머리칼 위로 램프의 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았다. 아늑하게 꾸며진 저택과 잘 어울리는, 꿈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카리브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대공과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팽팽히 당겨지기만 했던 신경이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를 안아 올렸다. 뒤따라 들어온 집사가 그 광경을 보고 당황해서 다가섰다.

“이런, 그만 잠이 드셨나 봅니다. 도련님을 이리 주십시오. 제가 침실에…….”

“아니, 됐다. 내가 하겠다.”

그때 잠결에 기척을 느꼈는지 레이가 웅얼거리며 두 팔을 뻗었다. 아이 특유의 높은 체온과 달달한 우유 냄새가 한가득 그의 목을 감쌌다. 카리브디스는 잠시 멈칫했다가 곧 천천히 아이의 등을 쓸었다. 곤한 숨을 내쉬면서 잠들어 있는 레이를 바라보는 눈길에 따스한 온기가 스몄다. 그것을 지켜보는 집사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쭉 주인님이 돌아오시는 날만 기다리셨습니다.”

“……식사는. 잘하고 있나?”

“예, 가리는 것 없이 잘 드십니다. 요즘은 고기에도 적응하셨는지 드셔도 탈이 나지 않으십니다.”

“그래.”

아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건 뽀얗게 살이 오른 얼굴만 봐도 알았다. 카리브디스는 문득 레이가 처음 왔던 날을 떠올렸다. 막 데려오던 당시 레이는 부드러운 수프와 빵 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고기는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먹기만 하면 탈이 나기 일쑤였다. 그랬던 아이가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그것뿐인데, 그게 이상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견습 신관이시라…….>

“…….”

아이의 등을 다독이던 손이 잠시 멈췄다. 겁먹은 듯 올려다보던 눈망울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왜 그 순간에 마차 안에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카리브디스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얼핏 보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레이와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합당한 이유를 머릿속으로 새기면서, 그는 알 수 없이 차오르는 불안감을 무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