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카터스 황실의 수석 마법사가 이곳엔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 궁금하군요. 보다시피 지금 시기가 꽤 어수선해서 말입니다.”
건네는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숨기지 않은 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니멜은 더 긴장했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카터스 황실에서는 모르는 일입니다. 옛 지인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그 부탁, 내가 같이 들어도 되겠습니까?”
“……폐하께 큰 누를 끼치는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제 용무에 허튼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목적 외에 다른 생각은 결코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군요. 일단 말해 보세요.”
이사나가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음에도 다니멜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가지고 온 용건이 조금만 덜 중한 사안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이곳까지 발걸음 하게 한 일을 거듭 떠올리면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분을 찾는 일에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사람? 누구를 말입니까?”
“……입니다.”
“잘 안 들리는군요.”
“……그게……라온휘젠 황태자……입니다.”
“…….”
“…….”
천막 안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사나와 카웰 공작은 물론, 뒤편에 서있던 친위 기사들까지 모두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니멜은 질끈 감은 눈을 차마 뜨지도 못했다. 기나긴 침묵에 그의 숨이 반쯤 넘어갈 때쯤, 이사나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 스왈트 제국이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라온휘젠 황태자는 당신들의 태자 아닙니까? 그를 왜 이곳에서 찾습니까?”
“시, 실은 그분이 가출을 하셔서…….”
“…….”
“정확히는 아카데미에 휴학계를 내버리시곤 그대로 잠적해 버리셨습니다. 행선지를 따라가고 있습니다만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는 분이신지라……. 최근 스왈트 제국으로 향하셨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낸 상태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이사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꾹 짚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 봤지만 이런 황당한 용건일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카터스 제국에선 태자의 실종을 이런 식으로 처리합니까?”
“그,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제가 이곳에 온 일은 황실에선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사라지신 건 현재까지 아카데미 총장과 저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황실이 완전히 뒤엎어질 겁니다. 최대한 저희들 선에서 조용히 수습하려고 합니다.”
“사안치고는 임하는 태도가 꽤 안일하네요. 태자의 신변에 위험이 생길 거란 생각은 안 합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내 머뭇거리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힘이 실렸다. 이사나는 묘한 표정으로 다니멜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황태자가 위험해질 일이 없다는, 신념을 넘어 확신에 가까운 태도였다.
‘글을 배울 때부터 마법을 터득한 천재라고 했었지.’
그 자신감의 원천을 짐작한 이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휘젠 황태자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동갑에 비슷한 위치였기에, 어릴 때부터 사람들 입에 늘 함께 오르내렸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조금은 위축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 언젠가 엘이 말해 준 대로, 자신이 가진 힘 역시 누군가에게 밀려날 것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천재라고 불리는 마법사에겐 이미 면역이 되어 있다. 그 황태자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라피스를 넘어설 것 같진 않았다.
“태자가 사라진 이유는 뭡니까? 단순한 유람입니까?”
이사나가 기탄없이 상황을 받아넘기자 오히려 위축된 건 다니멜 쪽이었다. 좋은 적수라고 여긴 상대가 사실은 이쪽을 취급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기묘한 패배감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바로 이사나 황제는 무언가에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검술을 곧잘 한다고는 들었지만 그 또한 수재까지 되지는 못했다. 단순한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 라온휘젠 태자 전하는 특별한 별을 타고나신 분입니다.”
“특별한 별?”
“이런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왕의 별을 타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혈통이며 능력이며 그분께 주어진 모든 것들이 특별하지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운명이 그분을 왕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요.”
“흥미롭군요. 계속 말해보세요.”
“흠흠, 그러니까 이 제왕의 별은 몇 세대마다 한 번꼴로 나타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별이 나타난 시대에는 몹시 드문 확률로 태어나는 또 다른 별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반려성이라고 불리는 별입니다.”
“……!”
느긋하게 듣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온기가 가셨다. 하지만 워낙 작은 변화라 아무도 그 온도차를 눈치채지 못했다.
“……반려성?”
“네,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제왕의 반려가 될 운명을 타고나는 별이지요. 푸른 달과 함께 나타나며, 그 별 아래에서는 반드시 여아만 태어난다고 합니다. 워낙 희귀한 별입니다만, 이번에 그 반려성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태자 전하는 늘 반려성이 어떤 여인일지 궁금해하셨죠. 하지만 점술가가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 그래서 반려성을 찾기 위해 떠나신 겁니다.”
주먹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이사나는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제왕의 별 따위는 모르겠지만 반려성이라면 알았다. 그 전설을 토대로 직접 푸른 달을 새긴 휘장을 내리지 않았던가.
‘알리사.’
짙은 주홍빛이 사랑스러운 소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돌아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과 재잘거리던 목소리들도.
“황태자가 이곳에 있다는 건 확실한 겁니까?”
“예, 그건 틀림없습니다. 출발하실 땐 알폰프 제국으로 향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갑자기 스왈트 제국으로 방향을 트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반려성이 이동 중인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이사나 씨는 운명이라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역시 운명 같은 건 싫다. 이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단어는 차가운 가면을 쓸 때 한없이 잔인해진다.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소중한 것을 간단히 앗아가고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정해서 무력하게 만들었다. 바라는 방향의 반대쪽 문만 열어두고 사람을 골리는 악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때 알리사에게 한 대답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운명만큼이나 강한 인연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그녀의 만남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적어도 갑자기 튀어나온 운명의 별이란 존재가 멋대로 그녀를 끌어가도록 그냥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그게 비록 자기만족에 불과할지라도.
“좋습니다. 그를 찾는 걸 도와주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울려 퍼지는 감사 인사가 기쁘게 들리지 않았다. 감격한 다니멜을 외면한 채 이사나는 조용히 투지를 불태웠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허락지 않은 인연의 줄기가 그의 삶을 타고 들어와 속에서부터 단단히 엮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끈질기고, 끊어내기 힘든 줄기가 될 것 같았다.
* * *
“그래서, 이미 아발론에 도착했다?”
낮게 뇌까리는 음성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더 가까웠다. 사납다 못해 흉흉한 시선이 눈앞에 놓인 검은 구슬 위에 쏟아졌다. 그 속에 비쳐 있던 갑옷 차림의 남자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마법으로 투영된 형상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상대가 뿜어내는 살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 세트니오 경? 그런데 왜 황제의 군대가 벌써 아발론을 점거한 거지?”
『소,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면목이 없습니다.』
기어들어가듯 이어지는 사과에 대공, 유카르테가 짧게 웃었다. 그러나 미소 짓는 얼굴에도 그의 분위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섬뜩하게 변했다.
“실패한 뒤의 사과는 누구나 할 수 있지. 내가 원하는 건 입에 발린 감언이설 따위가 아니라 실적이다. 경이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봤던 건가?”
『어떤 변명을 드려도 마음에 차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번 결과에 크게 실망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계획은 정말 완벽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을 늪지로 유인하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설마 그곳을 빠져나갈 줄은…….』
“애초에 부실한 함정이었다는 말을 참으로 길게 돌려 말하는군.”
『그, 그렇지 않습니다. 헤수르 늪지는 한번 빠지면 아무도 나오지 못하는 악명 높은 수렁입니다. 지금까지 그곳에 들어가 무사히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믿어? 그걸 어떻게 믿지? 그 악명 높다는 늪을 황제의 군대는 전부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지 않았나. 오히려 지름길로 안내한 꼴이 되어버렸지.”
『그것은…….』
열심히 이어지던 변명이 멈췄다. 어차피 전부 무의미한 변명이었다. 결과만이 중요한 전투에서 본래의 성공 확률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적들은 함정을 통과했고, 계획은 실패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경은 날 실망시켰다. 다음 보고 땐 오늘처럼 한심한 소식이 아니어야 할 거다. 경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명심하겠습니다.』
침울한 답변을 마지막으로 수정구의 빛이 꺼졌다. 일렁거리던 구슬의 표면이 완전히 까맣게 변할 때까지, 유카르테는 경멸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
“머저리 같은 놈.”
그 가차 없는 평가에 눈썹을 찌푸린 건 옆에 서 있던 카리브디스였다. 분을 참지 못하는 유카르테를 보며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트니오 백작은 야심가이긴 하지만, 지휘관으로서 실력이 나쁜 자는 아닙니다. 조금은 관대하게 봐주시지요.”
“본인이 지키지도 못할 허풍을 떠는 자다. 이 이상 얼마나 관대하게 보라는 거지? 머저리라는 칭호도 부족해.”
“상대가 예상 밖이었을 뿐입니다.”
어떤 말에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 그 말에 조금 누그러졌다.
“땅의 정령사가 활약했다고 했지.”
“네.”
“늪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단숨에 들어냈다고.”
“그렇게 알려졌다 하더군요.”
또 그 소녀인가.
유카르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센 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소녀가 선봉에 섰다는 정보는 이미 파악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신경 쓰이는 종류는 아니었다. 성벽을 무너트렸다는 사실이 놀랍긴 했지만 온전히 소녀만의 실력이라고 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쪽이 무너지면 쓰러지는 힘이 가해지므로 다른 쪽까지 연속으로 무너지기 쉽다. 즉, 요령과 운만 있으면 적은 힘으로도 큰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아마 세트니오 백작도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정령사가 몹시 희귀한 존재인 건 사실이나 황성엔 이미 페리스가 있었다. 중급 정령사의 능력은 넘치도록 잘 알았다. 제아무리 땅의 정령사라도 수렁 같은 늪지에서 수백 명의 병사들을 전부 구해내진 못한다. 설마 아무런 희생 없이 넘어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의 정령왕이 도와준 건가. 하지만 그러기엔 이사나가 있는 본대와 거리가 너무 멀어.’
정령이 계약자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신(神)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존재라 해도 어차피 계약으로 묶인 몸일 뿐. 유카르테는 물의 정령왕이 개별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령왕에 대한 정보는 정령사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지라 제대로 알려진 것들이 없었다. 하물며 정령사도 아닌 유카르테가 정령왕은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고는 한 가지 흐름으로 이어졌다. 본대에 있다는 황제는 가짜고, 실제 이사나는 선봉에 있을 거라는 쪽으로. 아군의 사기를 높임과 동시에 이쪽의 허를 찌르려는 작전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기에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지.’
황제가 선봉에 있는 거라면 이쪽의 작전도 바꿔야 한다. 그러자면 좀 더 상황을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 정령사 소녀가 마음 놓고 날뛰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더는 곤란했다. 이미 황제의 군대는 그 소녀를 스피어의 딸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그들만의 여신이었으나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 곧 이쪽에까지 영향이 미칠 것이다. 전쟁에서는 무력만큼이나 전투에 임하는 심리도 중요하다. 허울 좋은 명분이라도 억지로 만들어내려는 것이 바로 그래서가 아닌가. 이쯤에서 찬물을 부어주는 것이 좋을 터였다.
‘어디, 어떤 식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그가 조용히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기던 때였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더니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부르지도 않은 등장에 반응한 유카르테가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시종장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급히 전해드려야 할 일인 것 같아서 말씀 올립니다.”
“무슨 일이지?”
“궁에 귀빈이 찾아오셨습니다.”
이어진 대답은 뜻밖이었다. 유카르테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귀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