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61화 (261/608)

제261화

“흥, 주종이 될 운명은 무슨. 저 꼬맹이야 음식 자체를 처음 먹어 봤으니 당연히 그게 제일 맛있겠지. 저 녀석 벌써부터 꼬맹이한테 말 맞추는 것 봐. 엄청난 팔불출 되겠구만.”

다른 쪽에서는 시벨리우스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도 이미 토끼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피식 웃었다.

“시벨, 눈이 새빨개.”

“어어? 아, 아니, 이건 딱히. 눈물이 나서 그런 건…… 아, 그래. 여기가 너무 건조한가 봐. 하하하하.”

“내가 옆에 있는데?”

“어? 하하, 그, 그렇지. 엘이 물의 정령왕이지. ……하하, 거참. 아무튼 기분이 좀 묘하네. 마족들은 동료애고 뭐고 없을 줄 알았는데.”

어색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다 나는 다시 웃었다. 방 전체에 감동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여운이 이어질 것 같았다. ……물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 한 사람―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는 제 자리에 버티고 앉아 마지막 남은 쿠키를 느긋하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남이 울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아예 모르고 있는 눈치다. 그래도 자신을 주시하는 눈길은 느끼는 건지 시선을 보낸 즉시 곧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주변 상황을 파악한 듯, 그가 뒤늦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쿠키 맛있네. 하나 더 없어?”

“…….”

모두가 다 같이 화목해지는 방법은 사실 의외로 가까이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새삼스러운 말이긴 한데. 실익이고 뭐고 저 녀석은 그냥 버리는 게 맞는 것 같다.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 * *

보좌관으로서 데르온은 훌륭한 수하였다. 본격적으로 아스를 보필하기 시작한 그는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편의부터 살폈다. 가장 먼저 아스의 체형에 딱 맞는 옷과 신발을 구해 왔고, 그를 태울 말도 마련했다. 필요하다고 하는 건 무엇이든 즉각 내오는 것은 기본.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들기까지, 아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하지 않는 그의 상태까지 세심히 파악했다. 식사 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그에 관련된 재료와 맛, 식감까지 분류해서 메모하는 것을 보았을 땐 수십 년 된 집사의 관록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아스의 교육이었다. 갓 태어난 마족 아이는 힘을 잘 제어하지 못해 불안정한 부분이 많은 존재였다. 특히 아스는 타고난 마력이 강한 편이라 작은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자칫 잘못하면 폭주해서 본인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모양이다. 이에 대비해 데르온은 아스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마력을 쓰는 것을 금지시키고 관련 규칙을 만들었다. 무력을 포함한 모든 힘을 써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검은 이걸 쓰십시오.”

그가 아스에게 건네준 것은 상당히 큰 장검이었다. 아이가 들기엔 너무 큰 거 아닌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아스가 건네받자 검은 그의 체형에 딱 맞는 크기로 줄어들었다.

“마법검?”

놀란 일행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데르온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유체 때 쓰던 건데, 주인의 신체에 맞게 스스로 크기를 조절하는 검입니다. 주군은 당분간 빠르게 자라실 테니 안정이 되실 때까지 쓰시기에 좋을 겁니다.”

“응.”

선물 받은 검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대답하는 아스의 표정이 밝았다. 태어나 처음 잡아본 건데도 검을 쥐고 선 자세가 무척 안정적이었다. 연거푸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한 후, 아스가 허공에 대고 검을 시험했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꽤 묵직한 파공음이 울렸다. 그것을 본 데르온이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다루는 방법을 차차 알려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 지금까지 많은 유체들을 봤습니다만, 주군처럼 처음부터 이렇게 검을 잘 다루시는 분은 처음 뵙니다.”

“나 잘해?”

“예, 성인이 되시면 마족 중에서 주군을 앞설 자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망설임 없는 호언장담에 아스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나, 가장 강한 왕이 될 거야.”

“물론입니다. 주군은 충분히 되실 수 있습니다. 무사히 왕좌에 오르실 때까지 제가 목숨을 걸고 보필하겠습니다.”

“응, 잘 부탁해.”

“예, 주군!”

힘찬 대답과 함께 데르온이 전신에서 마력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피어난 새카만 기운이 하나로 뭉쳐 들더니 손바닥 위에 두 가지의 물건을 남겼다. 언젠가도 보았던 검은 팔찌와, 처음 보는 짙은 남색의 반지였다. 그는 그것을 아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북과 동의 증명서입니다. 동 공작의 자격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북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제가 두 영토를 다 관할하는 존재입니다. 제가 당신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맹세의 증표로 받아 주십시오.”

“이거, 알아. 공작들 거 다 필요하지?”

“예, 운 좋게도 제가 두 개를 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응, 그럼 이제 서쪽만 있으면 돼.”

“예?”

“남쪽 거 이미 있어.”

“……!”

데르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놀라서 숨을 삼키는 그를 보고 아스가 빙긋 웃었다.

“기억나. 카노스 님이 나한테 언령, 새겼어. 그거 깨워야 하는데 아직 내 힘 부족해.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남쪽 증표, 저절로 나타날 거야.”

“……그렇군요. 마신께서 이미 그렇게 관할해 두신 거군요. 루카르엠 님이…….”

나직하게 중얼거린 데르온의 얼굴에 아픈 표정이 번졌다. 카노스가 루카르엠이던,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스가 다독이듯이 그의 손을 잡자 데르온은 곧 멀쩡하게 웃었다. 남은 미련을 전부 털어낸 그의 모습에서 옛 추억의 잔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부터 두 마족은 훌쩍 주위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서 정확히 뭘 하고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마력을 다루는 법을 익힌다는 것 같았다. 수시로 대련을 하고, 실전 훈련을 명목 삼아 근방의 몬스터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얼마나 바쁜지 부대 안에 있을 때보다 없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 안에서 어린아이의 존재는 눈에 띄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아이가 이상했는지 병사들 중에서는 아스를 예의 주시하는 자들이 많았다. 물론 그때마다 데르온이 위협적인 시선을 보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안 그래도 튀는 우리 일행이 더 튀는 존재가 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늘 똑같은 일상이 변하기 시작한 건 아스의 존재가 슬슬 이곳의 일부로 자리잡아 갈 무렵이었다. 출정 열흘째 새벽, 이른 시각부터 진영 안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앞서 출발한 정찰대로부터 도착한 전언 때문이었다.

“야콘 계곡에 매복 가능성이 있다는군.”

“……으음.”

선봉장 마커스 백작이 전한 소식에 간부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현재 우리는 아발론이라는 도시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발론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외각 도시 중 하나로, 요새인 데다 한 편에 큰 강과 농지를 끼고 있어 주요 보급로로 활용이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황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기도 해서 적보다 앞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클모어에서 아발론으로 가는 가장 최단 경로는 두 지역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산줄기, 크란 산맥을 통과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험한 산세 안에서는 짐을 싣고 건널 수 있는 경로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평지로 우회해서 가되, 최대한 산길도 활용하는 쪽으로 노선을 잡아가고 있는 상태였다. 야콘 계곡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최적의 노선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적이 잠복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야콘 계곡은 길이 좁아 퇴로를 만들기 힘들고, 전투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도 아닙니다. 급습을 허용하면 그대로 몰살당할 위험이 큽니다. 이 노선은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참모의 발언에 마커스 백작도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부적합한 지형에서 무모한 가능성에 승부를 거느니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대신 늘어난 일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당분간은 짧은 휴식만 취하고 밤에도 쉬지 않고 이동하기로 했다.

“당분간이 어느 정돈데?”

“삼일. 그 정도면 본래 계획한 일정과 엇비슷하게 맞출 수 있나 봐.”

“쯧.”

회의 결과가 탐탁지 않았는지 라피스가 온통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알리사 혼자 보낼 수 없어 따라나선 건데 저 얼굴을 보니 내가 가길 천만다행이다 싶다. 귀찮다고 그에게 맡겼으면 온갖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리고 왔을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에이프릴을 맡은 동안 무슨 짓을 했던 건지, 이미 간부들 사이에서 라피스의 평판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 일행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에 그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70프로쯤은 기여했다는 점에 내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

“귀찮게 뭘 삼 일이나 해? 안 먹고 안 쉬면서 전속력으로 뛰어가면 하루 안에도 끝낼 수 있겠구만.”

“가다가 병사들 다 죽일 일 있냐? 그걸 어떻게 해?”

“고작 그것도 못 버틴단 말이야?”

“초인도 아닌데 당연히 못 버티지!”

“하아, 정말 쓸데없는 육체네. 비루할 정도로 약하군.”

본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천인공노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나마 다른 일행들이 식사하러 간 상황이라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알리사만 빼고 다들 아무렇지 않게 그 말에 긍정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 꼴을 봤다간 속이 더 뒤집어졌을 거다.

“……너는 제발 다음 생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라. 인간이 된 네가 하룻밤 샜다고 비실거리는 모습을 봐야 내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왜 갑자기 시비야?”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거든요?”

쏘아붙인 말에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짜증내는지 모르겠는데, 넌 인간 아니거든?”

“나도 알아! 그래도 기분 나빠!”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운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구만?”

……아무튼 눈치 하나는 얄미울 정도로 빠른 녀석이다. 나는 잠시간 눈을 굴리다 얌전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던 참이다. 라피스라면 의외의 해답을 안겨 줄지도 몰랐다.

“엘뤼엔이 요즘 연락을 안 받아.”

“흐음.”

“마계 쪽 상황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좀 알아보려고 했거든. 근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해. 아니, 정확히는 연결이 아예 안 되는 것 같아. 뭔가에 자꾸 얽혀서 엉클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꼭 통신에 혼선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거 맞을걸?”

너무 선뜻 흘러나온 대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응시하자 라피스도 똑같이 멀뚱한 시선을 보내 왔다.

“맞다니?”

“혼선 말이야. 그거라고.”

“신의 문장은 직통으로 연결되는 거 아니야?”

“직통이긴 하지.”

“그럼 왜…….”

“그건 말 그대로 통로가 하나일 때의 얘기고. 넌 하나 더 있잖아.”

“……!”

순간 머릿속에서 해일이 몰아친 것 같았다. 있지도 않은 피가 삽시간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카노스의 문장 때문에 통신이 막히는 거라고?”

“뭐, 지금까지 너 같은 경우가 존재한 적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거의 확실할걸? 문장을 받으면 몸의 파장이 그 신에게 맞춰져. 그게 두 개가 되었으니 충돌을 하든 섞이든 불안정해질 수밖에. 믿을 수 없으면 한번 시험해보든지. 마신에게 연락해 보면 되겠네.”

그럴듯한 방법이란 생각에 나는 곧바로 카노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대는 짧았고 절망은 빨랐다. 기운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여기저기 뒤엉켜 엉망이 되는 느낌이 자꾸만 일었다. 엘뤼엔에게 연락을 시도할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멍해지는 내 얼굴을 본 라피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내 말이 맞지?”

“으으! 이게 뭐야! 카노스는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을 거 아냐! 근데 이걸 왜 준 거지?”

“글쎄. 수프나 해 먹으라고?”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열 받아 소리쳤더니 라피스가 찌푸린 얼굴로 가볍게 귀를 휘저었다.

“그 능구렁이 신의 속을 내가 어떻게 알아.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지. 아니면 작정하고 방해할 생각이었거나.”

“왜 방해를 해?”

“네가 이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 아냐? 운명의 선이란 건 꽤 묘해서, 본인이 관심을 갖는 쪽으로 방향이 계속 이어진다더군. 게다가 사회적 영향력이 클수록 더 큰 파장을 일으키지. 넌 이미 상당히 발을 담근 상태잖아. 위험해질 수 있으니 더 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뜻 아니겠어?”

“하지만 카노스가 문장 주면서 연락하자고 했는데?”

“그걸 믿냐. 순진하긴.”

“…….”

지적할 때면 늘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시선이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어떻게 마신을 믿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그의 얼굴 가득 차올라 있었다. 그걸 보니 내가 엄청난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해맑게 웃던 카노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쩐지 부탁도 하지 않은 일들을 먼저 배려해 준다 싶었지. 그때 이미 다른 속내가 있었음을 눈치챘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는 방심하기 전까지는 늘 과도한 친절을 베풀곤 했다. 그게 전부 뒤통수를 치기 위한 추진력을 모으는 과정이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또 당하다니! 이쯤 되면 당하는 내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라피스. 통로가 불안정해진 거면 신 쪽에서도 연락 못 하나?”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그렇겠지…….”

돌아온 대답이 꿈도 희망도 없어서 더 서글퍼졌다. 엘뤼엔은 이 사태를 알고나 있을까. 왠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알았다면 그가 지금까지 조용할 리가 없었다. 당장 내 앞에 나타나고도 남았겠지. 우아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지닌 주제에 의외로 상당한 과격파니까.

군대 행렬 한가운데 신의 강림이라니. 엄청난 파란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엘뤼엔이 모르고 있는 게 차라리 다행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안심할 수 없는 장소에 소중한 것을 두고 온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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