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아스는, 꼬맹이 아니야.”
“하! 이제 막 태어난 녀석이 꼬맹이가 아니긴! 넌 나이로 보나 키로 보나 어느 구석을 봐도 틀림없는 꼬마거든? 네가 꼬마가 아니면 이 세상에 꼬마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없을걸?”
반복되는 꼬마라는 호칭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답지 않게 서늘해진 시선에 시벨리우스의 눈빛도 덩달아 형형해졌다.
“흥, 어려도 마족은 마족이다 이거냐? 조금 기분 상하니까 바로 살기부터 흘리는 것 보게. 하긴, 머릿속에 싸움밖에 없는 야만적인 일족이 다 그렇지.”
“……그러는 본인도. 루세프의 혈마(血馬)면서.”
“이것 봐라? 내 정체가 뭔지 다 알고 있었잖아. 그러면서 일부러 그 빌어먹을 호칭으로 불렀다 이거지?”
이제 분위기는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당장 두 사람 사이에 눈보라가 몰아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벌한 공기였다. 시작은 꽤 순조로웠는데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아스가 시벨리우스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서로 대립되는 종족이라 그런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의 이름을 잘못 부른 것도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도발이었던 모양이다.
이럴 때 시벨리우스만이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괜찮았겠지만, 그는 사나운 고슴도치처럼 건드리는 대로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었다. 본능적인 적개심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데르온과는 원만히 지내는 것으로 보였는데, 사실은 그쪽에서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유지되던 평화였나 보다.
‘내 팔자가 그렇지.’
자애와 화목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걸까. 안 그래도 툭하면 다투는 녀석들 때문에 충분히 골치 아팠건만, 거기에 새로운 복병이 더해졌다는 경보가 울렸다. 이쯤 되니 나한테 나도 모르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예를 들면, 전생에 원수였던 사람들만 끌어들이는 힘이라든가.
어쨌든 지금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서로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을 중재하기 위해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아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싸우면, 대부, 곤란해?”
“어? 그, 그거야 그렇지.”
“그렇구나. 그럼, 안 싸워. 그냥 아스 잘못으로 할래.”
……세상에.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예상치 못한 습격을 당한 기분에 나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이렇게 기특한 말이 내 일행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천상의 노래라도 들은 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머리가 다 멍해지는 것 같았다. 시벨리우스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듯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다시 순식간에 일그러졌지만.
“저, 저거! 완전 여우 아냐?”
그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아스를 손가락질했다. 눈앞의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나머지 이젠 아예 억지를 쓰기로 한 모양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 대해선 한없이 옹졸해지는 방식, 한때 나도 겪어봐서 넘치도록 잘 안다. 새삼 분석해 볼 필요도 없이 뻔한 패턴이라 한숨만 흘러나왔다. 라피스를 상대로 하는 거면 모른 척 속아줄 의향도 있겠지만, 아스라니.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으이구. 이제 그만해, 시벨. 어른답지 못하게. 아까부터 애를 상대로 뭘 하는 거야? 아스는 이렇게 의젓한데.”
“엘, 속지 마! 쟤 방금 나한테 혀 내밀었단 말이야!”
“글쎄, 그만하랬지. 자꾸 그러면 화낼 거야.”
“정말이야! 봤지, 알리사? 너도 봤지?”
“응? 못 봤는데.”
“아, 진짜라니까!”
마지막 희망까지 부서진 탓인지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그 옆에서 라피스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리지는 못할망정 돌아가는 상황이 재밌어 죽겠는 모양이다. 그에 비해 아스와 알리사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차분하기만 했다. 나이가 많을수록 정신연령이 높은 게 정상일 텐데, 어떻게 된 게 이 일행은 완전히 정반대다.
아무튼 나잇값이라고는 한 푼도 못하는 두 남자 때문에 내 신세만 고달파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뭐라 할 수 없는 건, 둘이 존재함으로써 얻는 실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속물이었던가.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문득 옷자락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내렸더니 아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 나 배고파.”
“응? 아, 그렇겠다.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었지?”
“응.”
“음, 곧 식사 시간이긴 한데……. 그전에 뭔가 간단히 먹을래? 시벨, 과일이랑 빵 같은 거 있을까?”
돌아보며 건넨 질문에 시벨리우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차지도 않는 꼬마한테 먹을 걸 챙겨주려니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도 이럴 때 물어볼 상대로 그가 적합하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식량과 관련된 건 전부 시벨리우스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있어. 가져올게.”
다행히 곧 체념했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음식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성이 나쁜 녀석은 아니라서 끝까지 모질게 대하지는 못한다. 잠시 후 그가 들고 온 접시엔 먹음직한 파이가 놓여 있었다.
“옛다.”
“이게 뭐야?”
“애플파이. 간식용으로 만들어 둔 건데 일단 이거라도 먹고 있어.”
“……당신이, 만든 거야?”
“그래, 내가 만들었다. 왜, 독이라도 들어 있을 것 같냐? 꺼림칙하면 그냥 먹지 말든가.”
그 말에 머뭇거리면서 파이를 받아든 아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어서 먹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조심스럽게 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아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맛있다.”
“그치? 시벨이 요리를 엄청 잘하거든.”
“굉장하다.”
아스는 순순히 감탄했다. 단숨에 환해진 얼굴을 보니 애플파이가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칭찬은 돌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뚱해 있던 시벨리우스의 얼굴도 한결 누그러졌다.
“그게 입에 맞는 걸 보니 단 거 좋아하나 보네. 크림빵도 있는데 그것도 먹을래?”
“응!”
“뭔지는 알고 먹겠다고 하냐.”
“맛있는 거잖아?”
“……나 참. 아무튼 이따 밥 먹어야 하니까 적당히 먹어.”
“응!”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아스는 본격적으로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은 제법 귀엽네.”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시벨리우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갖가지 과일이며 음료수를 줄줄이 내왔다. 알리사와 라피스까지 옆에 앉아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거창한 한 상이 차려졌다. 이미 주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간식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반색했다. 데르온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 데르온! 지금 와요?”
“실례합니다, 엘 님. 아무 일 없으셨습니까? 이곳에 마족의 기척이…… 느껴져서…….”
굳은 표정으로 답하던 그가 무심코 내 뒤쪽을 보더니 천천히 말을 멈췄다. 일행들과 둘러 앉아 한창 파이를 먹고 있던 아스를 발견한 것이다. 아스 역시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한동안 주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담담히 응시하는 아스와는 달리, 데르온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연거푸 눈을 깜빡이고 있는 모습이, 선뜻 사태 파악을 못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부하야?”
“아…….”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스 쪽이었다. 데르온이 멍한 얼굴로 신음을 흘리는 동안 몸을 일으킨 아스가 그 앞에 똑바로 걸어와 마주 섰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데르온이 황급히 바닥에 부복했다.
“마, 마 공작 데르오느빌,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르오느빌……. 그게, 이름이구나.”
“예, 그렇습니다. 데르온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직 충격을 갈무리하지 못한 듯, 바닥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스도 그것을 발견했는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데르온. 어디 갔었어?”
“죄, 죄송합니다. 설마 주군께서 태어나실 줄 모르고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멀리까지 간 바람에 주군의 마력을 느끼는 것이 늦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곁을 비우다니,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바로 나인 줄, 알았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뵐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주군을 노린 적이 나타났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구나.”
들어왔을 때 그가 유난히 다급해 보였던 이유가 바로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낯선 마족이 나타난 건 느꼈는데, 그걸 알의 부화와 연결시키진 못한 것이다. 나도 그 점은 이해했다. 알에 있을 때와 부화한 후 아스의 기척이 생각보다 많이 달랐으니까. 오죽하면 옆에 두고 잠들었던 나도 그의 정체를 바로 깨닫지 못했을까.
나는 새삼스럽게 아스의 기운을 살펴보았다. 이전까지가 그저 조금 강한 마력 덩어리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어디에 놔둬도 사람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성인인지 아이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 이 정도면 다른 마족이 접근했다고 착각할 만도 했다.
“나, 반가워?”
“물론입니다, 주군! 탄생을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힘차게 울려 퍼진 말에 아스는 선심을 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음식이 한가득 쌓여 있는 상 앞으로 걸어갔다. 식사 중이었으니 마저 먹으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스는 파이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다시 되돌아왔다. 그가 손에 든 파이를 데르온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아.”
“……?”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든 데르온은 눈앞의 파이를 발견하고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아스가 말했다.
“맛있어. 먹어.”
“주군……?”
“요즘, 안 먹지? 그러면 안 돼.”
“…….”
뜻밖에 정곡을 찔린 듯, 데르온의 몸이 움찔했다. 나 역시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설마 아스가 그의 상태를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데르온의 손에 파이를 강제로 떠넘기면서 아스는 엄격한 얼굴을 했다. 아이가 엄격한 표정을 지어 봤자,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의외로 박력이 있었다.
“안 먹으면 약해져. 나, 데르온 원래 힘 알아. 근데 약해졌어.”
“아아, 죄송…….”
“북 공작은, 제일 강해. 데르온 자각해야 해. 약해지면 안 돼. 아무것도 못 지켜.”
“……예, 죄송합니다.”
“자크가 준 힘. 함부로 하지 마.”
“……!”
숨이 억눌리는 소리와 함께, 데르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뻣뻣하게 굳은 그가 불안정한 얼굴로 아스를 바라보았다. 아스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데르온 약하면, 다 자크 비웃어. 자크가 약한 사람한테 졌다고 오해받아. 그럼 안 되잖아. 데르온, 그 힘에 책임 있어.”
“주군.”
“걱정 마. 부하, 혼자 아냐. 나도 책임 있어. 같이 해.”
“……주군.”
“응, 나 데르온 주군이니까. 훌륭한 주군은 부하만 힘들게 안 해. 데르온, 그걸 잊고 있어. 자꾸 혼자 감당해. 나는 그런 거 싫어.”
“저는…….”
입술을 악문 데르온이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것을 가로막은 아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핀잔 아냐. 방향을, 알려주는 거야.”
“……방향……?”
“데르온. 길을 잃었어? 이유 뭔지 알아. 이상한 델 봐서 그래. 아래 보지 마. 앞을 봐. 난 거기 있어.”
“……!”
“알겠어? 자크가 죽을 때, 나도 데르온 앞에 있었어. 지금도 앞에 있어. 난 주군이잖아. 날 의지해. 내가, 데르온의 길 될게. 절대 외롭게 안 해.”
그 말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데르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아스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지?”
확답을 재촉하는 질문을 그는 거부하지 못했다. 데르온은 무너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주군. 그러겠습니다.”
“정말이지? 내 말대로 하는 거지?”
“그럼요. 제가 어떻게 감히 주군을 거역하겠습니까.”
“나 혼자 두지 마.”
“예, 주군. 언제나, 언제까지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데르온의 눈에서 마침내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울면서 웃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여서, 오히려 가슴이 아렸다.
직후 데르온이 급하게 눈물을 훔치더니 들고 있던 파이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에 넣고 마구 씹어 삼키는 그를 반짝거리는 얼굴로 보던 아스가 물었다.
“맛있어?”
“예, 정말 맛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파이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봅니다!”
“똑같아. 나도 그래.”
“그게 정말이십니까? 굉장하네요! 이거 아무래도 저희는 주종이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헤헤.”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환한 웃음이 번졌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저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나는 한시름 덜어낸 기분으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때는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 괜찮을 것 같았다. 데르온의 표정이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다시 지탱하고 일어설 힘을 얻은 눈이다. 그의 시선이 다시 선명하게 앞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 앞을 걸어 나갈 작은 등을 위해서.
“흐어엉, 어떡해. 너무 슬퍼.”
옆에서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리사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답게 두 사람의 감정에 그대로 이입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