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라피스! 라피스!”
헐레벌떡 뛰어서 달려간 곳은 한창 저녁식사가 이뤄지고 있는 진영 안이었다. 이제 막 식사를 마쳤는지 라피스가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다 얼굴을 찌푸렸다.
“뭔데 호들갑이야.”
“아기가 곧 태어날 것 같아!”
“풉!”
삼킨 걸 뱉어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다른 쪽에서도 연거푸 들려오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왠지 주위 사람들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내 상체의 어느 한 부분을.
‘남의 배를 왜 저렇게 뚫어지게 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젠장.” 나직하게 투덜거린 라피스가 물이 튀어 젖은 입가를 대충 닦아내고 나를 응시했다.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너 언제 임신했냐?”
“뭐?”
“애 태어난다며.”
“무슨 헛소리야! 알이 부화할 것 같다고, 멍청아!”
“나도 알아. 그냥 농담한 거거든?”
“무슨 농담을 그딴 식으로 하고 난리야? 하나도 재미없어!”
“나도 재밌으라고 한 거 아냐. 그냥 방금 전에 네가 한 말의 어감이…….”
“어감이 뭐!”
“……아니, 됐다. 아무튼 너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아무래도 내가 죽을 날이 다가온 모양이다.”
정말로 충격이 크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걸 보니 한 대 쥐어 패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 후에 들고 있던 알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시끄럽고, 이거나 좀 봐봐.”
“뭘 보라고.”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짓던 라피스가 내가 가리키는 부분을 힐끗 확인하고는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조금 전 내가 발견한, 세로로 그어진 희미한 선을 그 또한 알아본 것이다.
“균열이 생겼네. 이제 곧 부화하려나 본데.”
“그치? 이거 부화하려는 거 맞지?”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보다. 언젠가 태어나려니 했었지만 막상 부화를 앞뒀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이 마구 치솟았다. 더불어 급속도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그냥 이대로 놔둬도 되는 건가? 따뜻한 걸로 감싸두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네가 보기엔 언제쯤 부화할 것 같아?”
“알 게 뭐야. 보모한테나 던져주든가. 그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더라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처에 있었는데.”
그가 누워 있던 나무를 다시 찾아가 봤지만 이미 데르온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 자리는 너무 눈에 띄어서 다른 곳으로 옮긴 듯했다. 라피스는 코웃음을 쳤다.
“대놓고 농땡이냐. 팔자가 아주 늘어진 보모시구만.”
“그렇게 말하지 마.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던데.”
“그 반대 아닌가? 서열이 더 높아졌잖아.”
“뭐?”
“그 녀석 머리색. 북 공작만 지닐 수 있는 고유색이잖아. 북 공작이 다스리는 카르텐은 마계의 심장부라고. 상징성만 따지면 오히려 마왕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걸?”
자칭 타칭 천재라고 불리는 드래곤답게, 라피스는 한눈에 머리색의 의미를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부분이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 말인데. 기존의 북 공작은 어떻게 된 걸까?”
“죽었겠지.”
“으음, 역시?”
“그 표식은 그냥 넘겨지지 않거든. 보유자가 죽어야만 넘어간다고 들었어.”
예상했던 대답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방황하는 데르온을 보면서 어느 정도는 그럴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확답을 들으니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북 공작의 이름이 자크라고 했었던가? 그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지 못해 아쉬워하던 데르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험악한 묘사를 늘어놓긴 했지만, 그 역시도 애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고 그 힘을 데르온이 넘겨받게 되다니. 심정을 짐작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지금 마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마신의 문장이 무사한 것을 보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나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엄청 눈에 띄는 거 알고 있어?”
“……!”
상념에서 빠져나온 건 불쑥 끼어든 음성 덕분이었다. 눈앞이 화사해진다 싶더니 솜사탕처럼 사랑스러운 소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벼운 여행복에 가죽 갑옷을 걸친 알리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로 옆에 시벨리우스도 동행한 채였다.
그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라피스가 수군거리고 있는 걸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작은 소리로 대화했으니 내용까진 듣지 못했겠지만,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내가 왜 사람들 앞에서 라피스와 대화를 나눴을까. 알에 금이 갔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가 굉장히 튄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뒤늦게 깨달은 실책에 혀를 찬 후, 나는 그 옆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러자 눈치 빠른 알리사가 대번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라피스 님 옆을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엘 님도 만만치 않게 눈에 띄거든?”
“그, 그래?”
머쓱해져서 웃자 이번엔 라피스와 시벨리우스도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이 힐난으로 바뀌기 전에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아! 그보다 이것 좀 봐, 알리사. 알이 곧 부화할 것 같아.”
“어, 정말?”
균열이 난 부분을 가리켰더니 반응이 즉각 돌아왔다. 알리사는 신기한 표정으로 알을 살피기 바빴다. 처음에는 안아보려고 했지만 살짝 건드리기 무섭게 바로 손을 떼고 혀를 내둘렀다.
“굉장히 뜨겁다. 만지지도 못하겠어.”
“그래? 아아, 그렇겠다. 이 정도면 인간의 체온보다 훨씬 높겠구나.”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알의 온도가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는 않다 보니 뜨겁다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알리사가 부럽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이대로 태어나도 괜찮은 거야? 전쟁하러 가는데 갓난애를 안고 다닐 순 없잖아.”
“아, 그건 괜찮을 거야. 마족은 성장 속도가 굉장히 빠르거든. 몇 시간 정도면 걸어 다닐걸?”
대답은 시벨리우스의 입에서 나왔다. 본래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 창조된 일족이다 보니, 그는 어릴 때부터 마계의 생태계에 대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라피스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았다.
“두세 달 정도면 청소년기로 보일 만큼 자랄 거야. 완전한 성체가 되는 건 10년 후지만. 그때까지는 아무리 커도 유체로 분류된다고 해.”
“10살에 성인이 된다는 말이야? 정말 빨리 크긴 하네.”
“워낙 호전적인 종족이잖아. 빨리 성장해야 생존 확률이 높아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설명을 마친 후 시벨리우스는 내게서 알을 건네받고는(이때 알리사가 또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심히 살폈다.
“균열 상태를 보니 오늘 밤 안으로 부화할 것 같아. 엘, 알 옆을 지킬 거지? 따로 머물 침소를 만들어 줄게.”
“응? 왜?”
“갓 태어난 마족 아이는 굉장히 예민하고 사납거든. 다른 종족을 보면 대뜸 공격하려고 할지도 몰라. 가급적 외부와 차단한 상태로 두는 게 나을 거야.”
“아, 그, 그래.”
방금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시벨리우스가 다시 내게 알을 건네주었고, 나는 불안한 기분으로 받아들었다. 곧 부화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들떴었는데 기대감이 조금 식었다. 정말 이대로 태어나도 괜찮은 거 맞나? 조금 전 알리사가 했던 질문이 다른 의미로 와 닿으면서,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데르온이 어서 돌아와야 할 텐데.
지금, 누구보다 그의 존재가 가장 절실해졌다.
* * *
툭툭―
“……으음?”
무언가가 뺨을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간질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반복적으로 와 닿는 감촉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뜨자 흐릿한 빛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사방이 몹시 캄캄하다는 사실이었다. 주위는 공기가 흐르는 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고요했고, 전체적으로 서늘한 온도를 띠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희미한 조명불이 간신히 주변의 형태만 비추는 채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멍한 머리로 고개를 들고서야 내가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 공간이 시벨리우스가 따로 만들어 준 천막 안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떠올랐다.
아, 그래. 아스모델의 부화를 기다리던 중이었지.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대강의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데르온에게 전부 맡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귀가가 생각보다 더 많이 늦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알에 생긴 균열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이러다 부화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 결국 나 혼자 알을 데리고 천막 안에 들어왔다. 푹신한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아 지켜봤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구경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가볍게 혀를 찬 후에 나는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벨리우스가 주술로 만들어 주는 침소는 겉은 천막이라도 내부는 여느 저택 안과 똑같다. 그 사실은 따로 제작한 개인용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구는 물론 바닥에 깔린 융단의 형태와 무늬마저도 동일했다. 단지 일행들과 쓰던 방보다 크기가 조금 더 작을 뿐이다. 잠든 이후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밤이 깊은 시각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어두워서 그런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지금, 누군가 날 만지지 않았나?
나는 손을 들어 양 볼을 천천히 눌러보았다. 분명 일어나기 직전까지 뺨에 닿는 감각을 느꼈었다. 사람의 손길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일행 중 한 명이 나를 깨우는 거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고 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니.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이상하네…….”
의아한 기분을 삼키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선명한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몸이 뻣뻣해지는 것과 동시에 등에 벽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 모양이다. 숨을 크게 삼키는 나를,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 빤히 쳐다보았다.
“……왜 놀래?”
원인을 제공한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인데, 마치 나를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나는 다시금 숨을 삼킨 다음 눈동자가 있는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캄캄한 공간 속에 실루엣이 일렁거리듯이 잡혀 있는 것이 보였다.
“너, 뭐야? 누구야?”
이렇게 분명한 기척을 조금 전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경계하면서 묻자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떠졌다.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진다 싶더니 한참 만에야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억 안 나.”
“……뭐?”
“내 이름. 길어. 어려웠어. 아직 다 못 외워.”
“무슨…….”
“대부가 다시 불러주면 안 돼? 이번엔 기억할게.”
“……!”
그 순간 놀랍도록 이 모든 상황이 선명해졌다. 이 세상에서 나를 대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공간에 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비록 사람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존재가 하나 더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건 곧 사람이 될 예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자, 잠깐! 너, 너, 네가 혹시…… 아스모델이라고?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 맞아?”
“아스모델. 응, 그거야.”
실루엣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맙소사! 막상 긍정하는 걸 보고 있으니 이제 다른 심정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으아, 말도 안 돼! 정말 아스모델이라고? 벌써 부화했단 말이야? 왜 날 안 깨웠어!”
“……방금 깨웠는데.”
“아, 그, 그런가? 잠깐만! 잠깐 기다려 봐!”
나는 서둘러 주위를 살핀 다음 근처에 있던 호롱에 불을 넣었다. 빛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주위가 밝아졌고, 비로소 정면에 자리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우뚝 서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멍해졌다. 처음 보자마자 느낀 건 ‘까맣다’는 느낌이었다. 흑단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을 덮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답지 않게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도, 새하얀 피부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던 붉은 눈동자였다. 라피스도, 이프리트도, 데르온 역시 붉은 눈동자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아이만큼 예쁜 색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이게 어딜 봐서 갓 태어난 아이인데!?’
아이는 겉보기로 치면 한 열두세 살쯤 되어 보였다. 유아라고 하기에도 무색하리만치, 아니, 솔직히 말하면 소년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아무리 마족이 성장이 빠르다지만 이건 조금 심한 거 아닌가? 유심히 살피는 나만큼이나 아이 역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방금, 갑자기 환해졌어.”
“응? 아, 불을 켰거든.”
“불? 저게 불이구나.”
맹한 반응을 보면 정말 갓 태어난 게 맞긴 한 모양이다. 나는 일단 급한 대로 근처에 있던 담요를 가져다 벗은 몸에 덮어주었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신기한지 아이가 또다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귀엽네.’
시선을 맞추자 호기심을 비춘 눈동자가 바로 따라온다. 갓 태어난 마족은 예민하다더니, 딱히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납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순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