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출정식은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됐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단에 오른 이사나가 유카르테 대공이 저지른 만행을 공표했고, 그를 제국의 반역자이자 마신의 이름을 더럽힌 공적으로 선포했다. 이어 카웰 공작이 황성을 탈환한다고 외치자, 군병들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황제 이사나의 이름을 연호했다.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당일 선발대의 출정은 수많은 군중의 환송 속에서 이뤄졌다.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울거나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운을 기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리사의 휘장이 걸린 직속 부대의 차례가 됐을 땐 유난히 큰 함성과 더불어 승리를 축원하는 꽃가루까지 뿌려졌다. 과연 선발에 세워야 할 정도로 유명해진 명성다웠다.
그 뜨거운 함성은 예상했던 대로 군대 전체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한껏 고양된 얼굴로 위풍당당하게 걷는 병사들을 지켜보다, 나는 멀찍이에서 친위 기사들과 함께 서 있는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와 카웰 공작이 이끄는 본대도 며칠 이내 출정하겠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최소 몇 주일에서 몇 개월은 더 걸릴 것이다. 여정의 중심인 데다 늘 함께했던 존재였던 이사나인 만큼, 한동안 보지 못할 걸 생각하니 조금 묘한 기분도 들었다. 이사나도 같은 마음인지 못내 섭섭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 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바로 그곳이 이사나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단 위에 서서 군중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위화감이 없다. 마치 황제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자 그 또한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짧은 이별을 위한 인사가 끝났다.
이후의 일정은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웠다. 처음 길을 나섰을 때만 해도 당장 전투가 벌어질 것만 같았는데, 막상 출발한 이후로는 묵묵히 이동만 할 뿐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진 않았다. 클모어와 황성은 서로 거리가 있기 때문에 대다수 이동에 시간을 잡아먹는 구조일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접점은 한 달 후에나 있을 거라는 예측이 내려진 가운데, 종일 걷다가 밤이 되면 야영을 하는 생활이 엿새째 이어졌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보낸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오늘도 어김없이 굵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남들 하나보다 덩치가 큰 남자가 엄중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며 명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봉장인 마커스 백작이었다. 그는 상급 기사이자, 일전 라센성의 전투에서도 선봉을 맡았던 무장이었다. 알리사의 능력에 감화되어 그녀를 선발에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기도 했다.
현재 알리사의 부대는 그의 부대와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배치된 상태였다. 지금 행렬에선 선두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이미 정찰 부대가 출정식 이틀 전에 먼저 출발한 상태라 실제로는 (선발대 안에서)중군에 가까운 위치였다. 내가 보기엔 뭐가 다른가 싶은데, 정찰에 비해 위험하지는 않다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찰보다 위험하지만 않을 뿐이다.
명이 떨어지자 빠르게 흩어진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진을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천막을 세우고 모닥불을 지핀 후 저녁 식사 준비에 들어가는 건 이젠 익숙해진 일과 중 하나였다. 음식은 지급 받은 재료로 부대마다 각자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마커스 백작은 ‘목숨을 건 전우는 전부 평등하다’는 훌륭한 방침을 지닌 지휘관이었고, 그렇기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부 똑같은 음식을 배식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부대마다 지급되는 음식 재료는 전부 동일했다.
그러나 모든 요리가 다 그렇듯, 같은 재료라도 요리사의 솜씨에 따라 음식 맛은 크게 좌우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대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지간한 전문 요리사보다 솜씨가 좋은 시벨리우스가 있었으므로.
“자, 다 됐으니까 다들 각자 그릇 가져와.”
“오오오오!”
기다렸던 신호가 떨어지자 병사들이 눈을 반짝이며 시벨리우스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 또한 익숙해진 광경 중 하나였다. 식사시간이 되면 시벨리우스의 주도하에 요리가 진행되고, 이후 음식이 완성되면 다들 얌전하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배식을 받는다. 이 순간만큼은 이 구역에서 시벨리우스를 거역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구도였던 것은 아니다. 시벨리우스는 알리사의 호위 자격으로 참전했을 뿐이고, 취사를 맡은 병사들은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그에게 요리를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첫날 그들이 만든 음식을 먹어본 시벨리우스가 먼저 견뎌내지 못했다.
그는 부실한 식단만큼이나 맛없는 식사도 싫어하는 섬세한 미각의 소유자였다. 물론 이건 라피스도 동일하게 해당하는 사항이다. 차이점이라면 라피스는 짜증만 내는 반면, 시벨리우스는 그걸 변화시킬 행동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옆에 붙어 훈수를 두기 시작하더니, 도저히 안 되겠던지 이튿날 오후부터는 아예 자청해서 요리를 떠맡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본래의 취사병들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나 보조 역할만 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었으나 그 사실에 불만을 품은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취사병 본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그의 간섭을 환영하고 나섰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이왕이면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한 욕구일 테니까.
요즘은 옆 부대까지 소문이 나서 날이 갈수록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어제부터는 마커스 백작도 은근슬쩍 이쪽에 끼어들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공평함을 외치는 그라도 맛있는 요리에 대한 유혹은 떨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시벨리우스 입장에서는 매우 귀찮은 일을 떠맡은 셈이었지만, 덕분에 그는 부대 안에 완전히 동화됐다. 그건 조금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알리사의 개인 호위라는 위치, 더불어 황제의 동료로 알려진 우리는 이 부대 안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벨리우스는 이종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외향 때문에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음식 하나로 급격하게 그 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주방장님! 저 한 그릇 더 먹으면 안 되겠습니까!”
“주방장은 누가 주방장이냐? 난 알리사의 호위무사거든?”
“에이, 그래도 제 맘속에선 최고의 주방장님이십니다!”
“시끄럽고, 필요하면 더 가져다 먹어. 오늘은 재료를 더 줘서 넉넉히 만들어놨으니까.”
“우와아아, 사랑합니다!”
“시커먼 사내놈 사랑은 안 받아!”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무리들을 보다가 나는 피식 웃었다. 당사자인 시벨리우스의 생각은 어떨지 몰라도, 서로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사실이었다. 저 모습만 보면 시작된 전쟁도 전부 남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라피스조차 이 시간만큼은 다소 관대해졌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맛있는 음식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아이템일지도 모르겠다. ……정작 나는 그 평화를 누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지만.
“하아.”
생각만 해도 서글퍼지는 기분에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음식이 맛있건, 맛이 없건. 식사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나와는 전부 상관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끼니때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올 장소를 찾아야 해서 조금 귀찮기도 했다.
‘……그리고 자청해서 평화를 벗어난 사람도 한 명.’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두 팔을 베고 누워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굵은 나뭇가지에 아슬아슬 몸을 걸치고 있는 남자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는 상태였다.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잠이 든 것은 아니다. 차분히 뻗은 머리칼이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이마 위에서 넘실거렸다. 언뜻 보면 검게 보이는 그 색은 실제로는 남색에 더 가깝다. 그게 굉장히 낯설어서 볼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칠흑처럼 까맣기만 하던 색이었으니까.
‘데르온.’
이름을 부르려다 속으로만 삼켰다. 머리색이 바뀐 후로는 그에게 말을 거는 게 쉽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알을 쓰다듬는 쪽을 택했다. 알이 품고 있는 높은 체온 너머로 쿵쿵, 일정한 심박동이 느껴졌다. 데르온에게 건네받은 이후로 쭉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박자였다.
출정 나흘째 새벽, 그는 검은 공간을 가른 것처럼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 나는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느라 매일 밤 혼자 진영 밖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말해 준 망토의 유지기한은 진작 지났다. 지금쯤이면 아크아돈으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설마 마왕에게 발각된 건 아니겠지. 우리가 먼저 출발하긴 했지만 데르온의 실력이라면 따라잡는 게 문제가 될 리가 없었다.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건 당연했다. 궁금하고 걱정이 돼도 내가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라 더 갑갑했다. 그래서 그가 아무렇지 않게 멀쩡히 나타났을 땐 반가움보다 화가 더 앞섰다.
“데르온!”
“늦어서 죄송합니다.”
데르온은 담담히 사과를 건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미 그때부터 평소보다 몹시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를 붙잡고 따지듯이 캐묻다가 나는 말을 멈췄다. 밤중이라 한눈에 띄지 않던 그의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르온. 머리색이…….”
당황해서 건넨 말에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깨닫고 싶지 않은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에 동요가 담겼다. 이내 절규하는 듯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고 나는 가만히 숨을 가다듬었다.
달라진 건 머리색만이 아니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마력의 성질도 변했다. 강하다, 약하다는 것으로 구분한다면 전보다 더 강해진 쪽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알아보았지, 기척만 느꼈다면 그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무슨 일, 있었어요?”
“…….”
그제야 데르온의 모습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온통 엉망이다.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뼈가 두드러지도록 야위어 있는 데다 눈 밑이 온통 검었다. 지독하게 앓다가 막 일어난 병자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행색이었다.
“설마 알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위험을 무릅쓰고 마계까지 건너갔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 만큼 그것 외엔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불안해져서 쳐다보는 나를 향해 데르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주군은 무사하십니다.”
대답과 함께 그가 품에서 알을 꺼내 들었다. 멀쩡한 황금색의 알을 보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내게 알을 건네주었고,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단단한 표면 안에서 힘찬 생명력과 강한 약동이 전해졌다. 강제로 붙들고 있지 않으면 럭비공처럼 튀어 다닐 것 같았다. 이렇게 보니 지금까지가 얼마나 얌전했던 건지 알겠다. 이런 상태가 정상인 거라면, 데르온의 입장에서는 호들갑스럽게 걱정할 만도 했다.
다행히 갔던 용건은 무사히 마친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괴로운 모습인 걸까. 그의 달라진 머리색과 마력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겠는데, 왠지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드리면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데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용건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엘 님.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됩니까.”
“부탁이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아스모델이라고 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목소리가 짙은 여운을 담고 흔들린다. 가슴 속이 철렁해질 만큼 서글픈 울림이었다. 나는 그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끄덕였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이라는 듯 연거푸 인사하는 얼굴이 한층 밝아진다. 조금은 나아진 안색을 보고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머리색은, 왜 그래요?”
“아아, 이건…… 북 공작의 표식입니다.”
“북 공작이요?”
그 의미를 파악하느라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북 공작의 표식을 지니고 있다는 건 그가 마계의 북 공작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기존의 북 공작은 어떻게 된 거지? 의문을 담고 바라보자 데르온은 다시금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어색한 듯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던 그가 내 시선에 반응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는 얼굴에 힘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 이상은 설명을 꺼리는 표정이라 나 역시 더 묻지 못하고 속으로 의문을 삼켜야 했다. 마계의 상황도, 카노스의 안부도 묻지 못했다. 그저 굉장히 우울한 일이 있었다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그가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다시금 나무 위에 누워 있는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표정이 그리 다양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웃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은 차이가 상당히 크다. 지금 데르온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 상태였다.
며칠째 식사도 전부 거르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과는 아직 대화도 섞은 적이 없었다. 간간이 알의 상태를 신경 쓰기는 하지만, 그 또한 프로그래밍 된 시스템처럼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 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나한테 맡겨둔 채로, 홀로 멍하게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아무리 마족이라도 해도 저렇게 오랫동안 먹지 않는 건 위험할 텐데.’
언제쯤이면 그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지 모르겠다. 침울 속에 삼켜진 것이 분명하게 보이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난처했다. 그렇다고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는 부분을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 데르온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주는 것도 배려일 것이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걱정스럽더라도 당분간은 그가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네가 태어나면 조금 괜찮아질까? 응? 어떻게 생각해, 아스모델?”
다른 한적한 장소를 찾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알을 계속 쓰다듬었다. 이름을 불렀더니 품속의 태동이 더 커진다. 그게 마치 내 말에 화답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 순간, 그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