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최면에 걸린 관리자는 본래 혼을 인도하는 부서 소속으로, 마계 본성이 있는 중앙 구역을 담당하던 자였다. 평소 기존 업무에 충실하던 편이었는데 엘퀴네스의 교체 주간에 갑자기 분배 쪽으로 부서를 변경했다고 했다. 정황상 마왕이 개입한 게 분명했으나 지금까지는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마계가 같은 대차원에 속해 있다곤 해도 구성원인 마족은 엄연히 육체를 지닌 존재였다. 영의 세계인 명계에는 접근할 수도, 그들의 모습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석이었다. 접촉하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최면을 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과정을 파악하는 것이 명계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최악의 경우 다른 동조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사태가 매우 복잡해졌다.
그러나 오늘, 섀넌은 마왕의 단독 범행이라는 것에 무게를 싣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유니콘의 눈’이었다. 혼령을 볼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만질 수도 있게 만드는 영물. 그걸 이용한다면 마왕 혼자서도 충분히 이 모든 상황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동안 유니콘의 눈은 특별한 장난감 정도의 개념이었죠. 그걸 이렇게 활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허를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시기에 맞춰 부서를 바꾸게 했다는 건 미리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정령왕의 소멸일을 어떻게 알고 일을 꾸민 거지?”
“최면을 시도한 흔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대로 되는 게 맞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험해 봤던 것 같습니다. 그때 생명부와 사망부를 확인한 거겠죠.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양은 아닙니다만, 특정인을 지정해서 찾는 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대상을 정령왕으로 한정했다면 특히 더 간단했을 겁니다.”
“그 모든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나?”
“마왕이 한때 수하들을 풀어 유니콘의 눈을 모은 적이 있습니다. 최면에 걸린 시점이 그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엘뤼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제 와서 파악한다고 해 봤자 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넘어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유니콘의 눈을 이런 식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걸 파악했으니, 이제부터는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유니콘의 눈은 전부 회수 조치될 것이고, 살아 있는 성마 일족 또한 엄중한 보호를 받게 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엘 옆에도 한 마리 있었지.’
그 사실을 말해 줄까 하다가 엘뤼엔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보호 처분이 내려지면 그 성마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계로 강제 귀속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없었지만 그건 왠지 엘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신계의 규율은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서 그 정도쯤은 눈감아 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엘뤼엔이었다. 일단 내버려 두면 알아서 굴러갈 일을 괜히 나서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쪽에게는 잘된 일이겠군. 더는 마신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가 관련되어 있을까 봐 꽤 곤혹스러워했지 않았나.”
“알아주시니 고맙군요.”
다소 도발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섀넌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넘겼다.
“그런 의미에서 말입니다만. 카노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당신이라면 분명히 알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디에서 기인한 확신인지 모르겠는데.”
“라데카가 당신에게 붉은 만남이 내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전 그게 카노스를 뜻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닙니까?”
붉은 만남이라. 확실히 붉기는 했었다. 어차피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엘뤼엔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을 이미 예상한 섀넌이 다시 빙긋 웃었다.
“회의 내용은 들으셨습니까? 참석하시지 않아 따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긴 했습니다만.”
“악신을 없애는 데 필요한 재료에 대한 거라면, 확인하긴 했다.”
“재료라니. 씁쓸하지만 정확한 표현이긴 하군요. 요즘 그 때문에 신계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가급적 자원을 받을 생각이지만 끝까지 지원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엔 운명의 조건에 맞춰 강제로 선출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겠지.”
“당신은 긴장되지 않습니까? 당신도 상급신인 이상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한순간에 신의 자리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글쎄, 딱히 신의 자리 같은 것에 미련이 있지는 않아서. 난 원래 신이 될 생각도 없었으니까.”
“……다른 자리에선 그런 말은 삼가 주십시오. 다들 한마음으로 당신을 재료 속에 밀어 넣으려고 할까 봐 우려되는군요. 개인적으로는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그 능력을 몹시 아끼고 있습니다만, 다수결이 되면 저도 보호하기가 힘듭니다.”
“쓸데없는 걱정이군. 미안하지만 미련이 없다 해서 남 좋은 일을 시켜 줄 생각도 없다. 내 마지막을 타인의 뜻에 맡길 예정은 더더욱.”
“그거 참 다행스러운 다짐이긴 합니다만……. 지원자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선 그건 그것대로 유감이긴 하네요.”
“헛소리는 관두고 본론으로나 들어가지. 카노스에 대해 궁금한 건 그걸로 끝인가? 좀 더 집요하게 캐물을 줄 알았는데.”
“아아, 그를 만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방을 파악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데.”
“예?”
의아해져서 반문하던 섀넌은 엘뤼엔이 자신의 뒤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심코 돌아본 순간 그는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곳에 새카만 흑발을 지닌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카, 카노스!”
깜짝 놀란 섀넌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카노스는 당황한 섀넌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검은 암흑의 눈동자를 마주 본 섀넌은 긴장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감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평소 가면처럼 쓰고 있던 웃는 얼굴조차 지워진 상태라 더욱 그랬다.
“……카노스?”
“섀넌이네.”
한 박자 늦게 카노스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여전히 무표정에 가깝긴 했으나, 조금은 웃는 것 같은 인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차라리 웃지 않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그 모습이 더 섬뜩한 느낌을 풍겼다. 섀넌은 바짝 굳어진 상태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카노스? 그동안 당신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이…….”
“응, 그랬구나. 그보다 마침 만나서 잘됐어, 섀넌. 네게 부탁할 게 있었는데.”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 넘기는 태도에 얼굴을 찌푸리던 섀넌은 바로 이어진 말에 다시 당혹감을 드러냈다.
“부탁이라고 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는 달리, 카노스의 시선은 그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초점 없이 맴도는 눈동자가 지독하리만치 공허하다. 섀넌은 초조해지는 기분으로 그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늘의 그는 마치 꿈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늘 본심을 감추듯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은 더욱 달갑지 않았다.
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어둠이 잠식하기 시작한다. 조금만 가까이 접근해도 새카만 암흑 속에 삼켜져 그대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 독처럼 지독한 어둠이 아마도 마신 본연의 기운에 가까울 것이다. 힘을 갈무리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위험했던가. 섀넌은 질린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그가 돌아다니면서 치던 짓궂은 장난들이 차라리 배려였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덕분에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지금 카노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을 대할 때면 의식적으로 쓰던 가면마저 잊을 정도로. 굉장히 많이.
“……조금 전에, 내가, 아주 싫은 감각을 느꼈거든.”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한 상태에서, 카노스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면 더 나았을까. 섀넌은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침착하게 그의 모습을 살폈다.
“싫은 감각이라면…….”
“아무래도 내가 아끼던 아이가 죽은 모양이야.”
“……!”
눈을 크게 뜬 섀넌이 급히 카노스를 바라보았다. 건조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허탈해 보였다.
“사후의 세계는 섀넌, 네 영역이지. 그 아이를 부탁할게. 평생 고단하게 일하던 아이라 죽어서도 생전의 의무에 얽매여 있으려고 할 거야. 편하게 쉬도록 해줘.”
“……만나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응, 그건 됐어.”
여전히 건조한 어조로 답한 후 카노스는 지친 듯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텅 빈 시선을 들어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엘뤼엔 또한 마찬가지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이 조금 곤란하게 됐어, 엘뤼엔. 봉인이 생각보다 더 일찍 풀릴 것 같아.”
“……뭐?”
“아직 마지막 장치까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묶어 뒀던 속박이 풀렸어. 이미 육체는 자유로워졌을 거야. 남은 금제를 풀기 위해 힘을 모으려 하겠지. 지금까지 했던 대로, 인간의 피를 모으는 방식으로. 그걸 위해 이미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소로 향했어.”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소라면…….”
“조력자가 있는 곳이겠지. 이를테면 그의 계약자 같은.”
“……아크아돈 말인가?”
“네 아들……위험해질 거다.”
나직한 발언은 경고라기보다는 예언에 가까웠다. 담담히 듣고 있던 엘뤼엔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카노스? 지금 악신에 대해 말하신 겁니까? 그가 아크아돈으로 향할 거라고요?”
섀넌이 다급히 묻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대답을 듣기 위해 허둥거리고 있는 동안 엘뤼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카노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들이 있는 공간에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윽고 눈앞에 똑바로 선 엘뤼엔이 자신을 향해 팔을 뻗을 때까지, 카노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목을 조르더라도 저항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뤼엔의 목적은 처음부터 따로 있었다. 투둑, 팔을 뻗음과 동시에 목 부근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뒤늦게 그 의미를 알아차린 카노스가 얼굴을 굳혔다. 엘뤼엔이 그가 걸고 있던 목걸이를 옷 안에서 꺼내 잡아 뜯은 것이다.
“……!”
그의 손가락 사이에 감겨든 줄 안에서 붉은 돌이 흔들렸다. 마신의 굳은 시선을 응시하는 엘뤼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 목걸이가 주신의 인장이던가. 신이 중간계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였지.”
“엘뤼엔, 너…….”
“잘 받았다. 고맙게 써 주마.”
느긋한 웃음과 함께 돌아서려는 엘뤼엔을 카노스가 서둘러 붙잡아 세웠다. 늘 어떤 일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 속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안 돼, 엘뤼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 아들이 위험해진다고, 지금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내가 그걸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것 같나?”
“그래서 뭘 하겠다고? 설마 봉인이라도 다시 시도할 예정이야?”
“가능하다면.”
“무모한 소리 마! 지난 번 내 꼴을 보고도 몰라? 금제가 남아있긴 해도 놈은 거의 악신이야! 네가 혼자 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상관없어. 적어도 내 아들은 지킬 수 있겠지.”
“내 말 좀 들어! 이런 식의 행동은 냉철하게 판단하는 너답지 않아! 지금 이렇게 가 봤자……!”
“너야말로 답지 않게 군말이 많군, 카노스. 그렇게 기운이 넘치면 이제 그만 놀고 일이나 해. 아, 그동안 네놈이 나한테 떠넘긴 서류들도 전부 다 해 놔.”
“엘뤼엔!”
비명과도 같은 부름이 이어졌지만 엘뤼엔은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대로 중간계에 내려가 버린 것이다. 붙들 곳을 잃은 채 망연히 서 있는 카노스의 모습을 섀넌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카노스…….”
쿠웅! 말을 걸기 무섭게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카노스가 주먹으로 옆에 있던 벽을 내리친 것이다.
“……아무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말은 죽어도 안 듣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의 두 눈이 위험하게 번뜩거렸다. 화가 난 탓인지 오히려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왠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라 섀넌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조금 전 꺼질 듯이 공허하던 모습보단 나았지만 저럴 때의 카노스도 대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라는, 지극히 당연한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섀넌, 진은 얼마나 완성됐어?”
“예?”
“소멸진, 만들고 있을 거 아냐.”
예상치 못한 말에 섀넌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악신에 대해 직감한 순간부터 그는 개인적으로 소멸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존에 알려져 있는 악신의 제거 방법이 아닌,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방식을 고안해 본 것이었다. 시험 작에 가까운 상태라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큰 만큼 어느 정도 토대를 마련한 후에 밝힐 예정이었는데, 설마 그걸 카노스가 짐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황망해하던 섀넌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완성한다고 해도 얼마나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내야지. 저 아들 바보가 제 아들 눈앞에서 죽어버리기 전에.”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아 섀넌은 마른침만 삼켰다. 당연히 해내야 한다는 말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가 바라는 대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악신이 소멸하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 해도 편해질 것 같지 않았다. 섀넌이 긴장하는 것은 카노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피식 웃었다.
“겁먹지 마. 너 혼자 하라고 안 하니까.”
“네? 그럼……?”
“내가 도와주면 더 빨리 완성될 거야. 하지만 틀에 필요한 신력은 한 명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네. 일단 상급신들을 소집해줘.”
“아, 아아! 네, 알겠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후 섀넌은 모두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설마 카노스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다니! 그가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엘뤼엔의 돌발 행동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위험한 도화선을 지핀 것이 분명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사실 엘뤼엔의 그 모습에는 섀넌도 상당히 놀랐다. 한때 소문이 무성하던 그의 양자가 이번 세대의 엘퀴네스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 봤자 어디까지나 가벼운 변덕으로 정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깊은 감정일 거라곤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지키러 갈 정도였던가.
<고립된 채 고독한 자.>
<부드러운 냉혹함.>
<엄격하나 관대한 심판관.>
<고결한 지주.>
<그리고……아버지.>
떠오르는 예언의 문구를 되새길 때마다 섀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는 초조한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넘실거리는 파란이 제멋대로 튈 곳을 찾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가늠하는 것보다 더 지독하게 끝나고, 더 많은 것을 잃을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