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55화 (255/608)

제255화

“남길 말은 없습니까.”

“글쎄, 늘 이런 때를 대비한 말을 생각해 두었던 것 같은데.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떠오르는 것이 없군.”

“그래도 뭐든 말하십시오. 아무거나, 하다못해 욕이라도 좋으니 잔뜩 떠들고 가란 말입니다. 당신이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면 내가 더 화날 것 같으니까.”

심장 끝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데자크는 처음엔 자신이 떨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진동은 그의 심장에 닿은 손 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을 따라가 시선을 보내자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데자크는 피식 웃었다.

“항상 호시탐탐 날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았나, 애송이? 막상 판이 벌어지니 지나치게 수줍어하는군.”

“제기랄. 당신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 힘으로 뺏고 싶었지 이딴 식으로 던져 주는 걸 받으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하긴, 자네는 약한 것과의 승부엔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 내가 나약해지니 죽이는 것도 재미가 없나?”

“……죽는 순간까지 날 도발해서 뭘 어쩌려는 겁니까?”

분노에 차 이글거리는 눈빛에 데자크는 씁쓸히 웃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을 비장한 것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스치는 일상처럼 지나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눈앞의 젊은 친구는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자신 또한 삶에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득 시선을 내렸을 때, 데자크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조금 전 자신이 억지로 밀어 넣은, 데르온의 품 안에 안겨 있는 황금색 알이 다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에 담긴 아쉬움은 데르온도 읽어냈다. 그가 지켜보는 것을 깨달은 데자크가 얼굴에 묻어난 감정을 바로 털어냈다.

“아이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 성장 속도가 느린 편이긴 하나 이는 정수를 조금만 흡수해도 해결될 거다. 하나라도 무사해서 다행이긴 한데, 태어날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군. 강한 운명을 타고 났다, 루카르엠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물의 정령왕이 대부가 되어줬다니. 앞으로도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물론 그럴 겁니다.”

“내가 이름을, 지어줘도 되나?”

담담하게 의향을 물어보는 목소리에 데르온은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소리까지 떨릴 것 같았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당신의 의무이자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나도, 세르피스도, 카류안조차. 전부 당신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새삼스럽게 묻지 마십시오.”

“……그래, 그렇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데자크는 온기를 담은 시선으로 알을 바라보았다.

“아스모델. 아스모델이라고 하지.”

이름이 정해지는 순간은 짧았다.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기다리던 데르온이 그 말에 이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압니다. 고대에 마신을 섬기던 12명의 대천사 중에서 마계의 4월을 관장한다고 알려진 천사의 이름 아닙니까?”

“그가 맞다. 천마대전에서 마지막까지 마계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소멸한 전사이기도 하지.”

데자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번식기는 4월에 있었거든. 카르텐에 만발하는 봄꽃을 보면서, 가장 먼저 태어나는 아이에게 붙여주자고 생각한 이름이었다.”

쏴아아―

스치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흐트러졌다. 흐릿하게 웃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데르온은 다시금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위태롭다니. 이 얼마나 데자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가. 태어나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늘 한결같이 강하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 막힐 듯 전해지는 존재감과 마력에 늘 압도되는 것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남자에게선 그런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싹 말라 부스러지기만을 기다리는 낙엽 같았다.

이번엔 데르온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절히 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시작해주지 않겠나, 데르온. 난 한계야. 이러다 자네가 거두기 전에 내 숨이 먼저 넘어갈 것 같다.”

끝을 직감한 건 데자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데르온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되었습니까?”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심장에 대어진 데르온의 손 위로, 데자크의 손이 포개어졌다. 이미 온기를 거의 담고 있지 않은 체온에 데르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뒷일을 잘 부탁한다.”

“……네.”

“루카르엠 님께도 먼저 가는 불충한 신하의 인사를 대신 전해줬으면 한다. 카류안을 봉인하신 이후로 소식이 없어서 걱정되는군. 혹여 심하게 다치진 않으셨을지…….”

“그분은……무사하실 겁니다.”

“그래, 그럴 테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얼굴에 그리움이 깃든다. 마지막 안부를 확인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끝내 마음에 남은 것이다. 그것을 본 데르온은 조급해지는 기분을 삼켰다. 아직 데자크는 루카르엠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상, 그의 정체를 감히 내가 멋대로 밝혀서는 안 된다. 데르온은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 심장에 마력을 불어넣는 순간엔 그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자크! 실은 루카르엠 님의 정체가…… 마신이었습니다!”

입안에서 맴돌던 고백이 입술이 열리자마자 해방된 것처럼 터져나갔다. 죽음이 파도처럼 스며드는 때. 귓가에 또렷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데자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데자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그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짧았다. 다음 순간 천천히 눈을 감은 데자크의 몸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그의 몸을 데르온이 다급히 두 손을 뻗어 받아냈다. 미동이 없는 차가운 육신이 그의 품 안으로 힘없이 쓰러져 내렸다.

“자크?”

응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데르온은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결과는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품 안에 안긴 남자는 여전히 미소 짓고만 있을 뿐, 그 눈이 다시 떠지는 일은 없었다.

들었을까? 진실은 전해 듣고 간 것일까?

조금 더 빨리 말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사무친 후회로 남기 전에 확인을 구하고 싶은데, 유일하게 그 답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존재의 입은 이제 열리지 않는다. 그에게 찾아든 침묵을 깰 방법을 데르온은 알지 못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일렁거리는 눈으로 데자크를 살피던 데르온의 얼굴이 어느 한 부분에 이르러 와락 일그러졌다. 푸른색이 감돌던 데자크의 머리칼이 점차 검은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아아…….”

데르온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붉어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오르는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입버릇처럼 언젠가는 그를 이기고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고 말하고 다녔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면서도 스스로 치기이자 허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일평생 데자크가 아닌 다른 북 공작은 상상해 보지 못했다. 검푸른색 머리카락이 아닌 그의 모습조차 떠올려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의 눈앞에서 그 머리칼이 암흑처럼 새카매지고 있었다. 그의 육신에서 빠져나간 숨의 증거가, 그만의 방식으로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아아아아아!”

완전히 캄캄해진 하늘, 피어오르기 시작한 별무리가 데르온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빛이 닿을 때마다 반사되는 색은 마계의 밤하늘만큼이나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한때는 그 앞에 잠든 남자가 지니고 있던 색이다.

기나긴 마계의 역사, 그 한 자락의 끝.

카르텐의 주인이 바뀐 밤이었다.

* * *

저벅―

내디딘 걸음이 바닥에 돋아난 풀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지금 막 카르텐 안으로 진입한 남자는 긴 망토로 온몸을 감싼 채였다. 창백한 피부에 탁해진 붉은 눈동자. 밤하늘보다 새카만 흑발은 윤기를 잃은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무덤 속에서 살아나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음습해 보였다.

실제로 그는 그 비슷한 곳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다. 그러나 꼴이야 어쨌건 자신의 힘으로 몸을 움직이고 걸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곧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얻게 될 테니까. 그때 만끽할 기쁨을 생각하면 잠깐의 불편함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온몸에 가득 차오르는 기대감을 즐기면서, 그는 들뜬 기분으로 이곳까지 당도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마침내 원하던 장소까지 도달했을 때, 그는 샘 앞에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데자크 룬. 한때 북의 공작이자 카르텐의 숲지기였던 남자였다. 두 눈을 감고 차게 식어 있는 그는 이미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다. 이때쯤 그가 죽을 거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기에 딱히 놀라진 않았다.

이변을 느낀 건 마력의 샘을 확인했을 때였다. 이미 한 번 전부 가져다 쓰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샘이 어느 정도 다시 차올라 있어야 할 시기였다. 데자크가 죽기 직전까지 피를 흘리게 해 두었으니 마신의 정수 역시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어야 했다. 그런데 샘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신의 정수는 물론, 본래 머금고 있어야 할 마력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샘이 아니었던 것처럼. 완전히 바짝 말라버린 흙바닥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현상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누군가 샘을 <거두었다>. 기존에 품고 있던 마력을 전부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명이 내려지기 전까지 다시는 생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두었다. 이런 명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숲지기이자 샘의 관리자인 북 공작뿐이었다. 하지만 데자크는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신에게 의식을 장악당한 상태였다. 그랬어야 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후 그는 자신의 옆에 인형처럼 서 있는 여인을 붙잡고 그 머리칼을 쓸어 넘겨 보았다.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운 밤중이었으나 그의 안력으로 머리색을 구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인의 머리칼은 늘 그랬듯이 검기만 했다. 북 공작이 죽었다면 당연히 이쪽으로 넘어와야 할 푸른색을 띠지 않았다.

“……누군가 가로챘나.”

이를 간 그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설마 그사이에 누가 카르텐에 들어왔던가. 짐작 가는 자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데자크는 하급 마족이라도 쉽게 죽일 수 있을 만큼 허약해진 상태였다. 누군가 우연히 숲에 들어왔다면 그를 죽이고 공작이 될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샘을 일부러 마르게 했다는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대부분의 마족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고 있는 상태였고, 그런 이들에겐 굳이 샘을 거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북 공작이 되었다는 사실에 들떠 정수를 더 만들어내려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침입자를 대비해 숲 입구 쪽에 감지 마법을 펼쳐둔 상태였다. 하지만 누군가 들어서는 흔적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제3자의 개입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결국 그는 가장 합당한 결론에 도출했다. 데자크가 죽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말이다.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샘을 폐하고 자결을 택했다면 이 모든 일이 간단히 설명됐다. 북 공작의 능력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대로 증발해 한동안 아무에게도 전승되지 않는다. 마계의 미래를 생각하면 극단적인 선택이었으나 데자크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자였다. 적의 손에 넘겨주느니 미래를 버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카류안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데자크가 숨을 거두기 전에 성급히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만들어 둔 마신의 정수 덕분에 육체가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봉인이 아직 다 풀리진 못했다. 남은 정수를 써서 마지막 금제를 풀려 했는데 그 계획이 전부 어그러졌다.

“할 수 없군. 다른 방식을 시도할 수밖에.”

카류안은 이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죽은 데자크의 시체를 차갑게 훑었다. 마지막까지 뜻대로 되지 않는가. 이런 점은 저가 섬기는 신과 똑같았다.

‘좋아, 누가 이기는지 해 보지.’

데자크는 틀린 선택을 했다. 그냥 그대로 죽었다면 그 공헌을 생각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 줬을 텐데. 공연히 마지막까지 쓸데없는 발악을 해서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릴 뿐, 결국 금제는 곧 풀리게 되어 있었다. 신이 되어 모든 대차원을 전부 자신의 발밑에 복속시키고 나면 그의 영혼까지 찾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자신에게 거역하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 일인지 온 세상에 똑똑히 증명하고 말리라.

“그때까지 짧은 안식을 취해라, 데자크.”

듣지 못할 상대를 향해 쏘아붙인 후 카류안은 몸을 털고 일어섰다. 그 옆을 세르피스가 정중한 모습으로 따랐다. 카류안은 미련 없이 숲에서 돌아섰다.

“유카르테에게 간다.”

* * *

“유니콘의 눈?”

서류를 검토하던 엘뤼엔이 한 대목에서 눈썹을 찌푸렸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의 질문에 맞은편에 앉은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엘뤼엔에게 서류를 건넨 장본인―명계의 신 섀넌이었다.

“정의와 분별의 신 루세프가 창조한 성마 일족의 눈을 말합니다. 그들의 눈은 사후에 더욱 특별해지죠. 사체가 전부 흙으로 돌아가도 눈만은 유리구슬 같은 형태로 남게 되는데, 그걸로 혼령이나 영체를 비출 수 있습니다. 삼키면 얼마간 혼령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고도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왕이 그걸 이용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서류는 마왕 카류안이 명계에 침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으로 의심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의 탄생 과정에 오류가 생긴 이유이기도 했다. 명계 내 혼을 분배하는 부서에서 관리자 한 명이 실수를 저질렀고, 그 탓에 정령왕의 영혼이 지구로 보내졌다. 있을 수 없는 일까진 아니지만 그에게서 최면에 걸린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실수를 유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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