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너무 걱정하지 마, 엘. 내가 알리사의 호위를 맡기로 했으니까.”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나를 구제한 건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시벨리우스였다. 드래곤과 유니콘, 마족으로 구성된 이종족 팀(?) 중에서 그는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그만은 성실하게 이곳의 일에 참여해 왔다고 했다. 실제적으로 내 부재를 커버해 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시벨, 네가 알리사를 호위한다고?”
“응, 여자아이를 혼자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수야 없지. 이래 봬도 다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마음이 진정됐다. 시벨리우스가 곁에 있다면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설령 상황이 급작스레 나빠진대도 그는 충분히 알리사를 구출해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두 명은 불안한데.’
두 사람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전장에선 얼마든지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다. 이렇게 찜찜한 기분으로 얌전히 뒤따라가자니 성미에도 맞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 쪽에서는 카리브디스 공작이 움직이겠지. 그자의 소식을 빠르게 접하려면 나도 선발대에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살짝 심호흡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 나도 선발에 있을게.”
“무슨 소리야. 엘 님은 이사나 씨를 지켜야지. 제일 중요한 사람이잖아.”
“그런 게 어딨어. 나한텐 알리사 너도 중요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이번엔 알리사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계속 뭔가 불만에 찬 듯 보였는데, 왠지 그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렇게 해도 괜찮지, 이사나?”
“응, 난 상관없어. 엘이 원하는 대로 해.”
의견을 구하는 말에 이사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에게 양해도 구했겠다, 이러면 더 할 말이 없겠지. 나는 산뜻해진 기분으로 알리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를 맞이한 건 다시 뚱해진 소녀의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뚱해진 것 같았다.
* * *
회의가 파한 뒤에도 알리사의 굳은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토끼처럼 재빨리 사라지는 소녀를 얼른 따라나섰다. 덩달아 뒤쫓으려는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는 일부러 오지 못하게 했다.
“알리사!”
“…….”
“알리사, 기다려!”
“…….”
“알리사!”
반복된 부름이 지겨웠는지 묵묵히 걷기만 하던 알리사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토라진 거야?”
“토라진 거 아냐.”
“그럼 왜 그렇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말에 알리사가 입술을 깨물더니 시선을 떨어트렸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거칠다는 걸 자각한 듯, 조금 진정하려는 모습이었다.
“……이사나 씨 말이야. 요즘 매일 기분이 안 좋았었어. 얼마 전엔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울기도 하더라고. 근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말해주지는 않는 거야.”
“아, 그래. 들었어.”
“응, 그래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근데 오늘은 괜찮아 보이더라? 시벨 씨가 그러는데, 엘 님이랑 만나서 꽤 오랫동안 대화했다며?”
“응, 그랬는데……. 그게 왜?”
그 순간 알리사가 사나운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부릅떠진 눈에선 시퍼런 안광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토끼가 몬스터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흠칫 놀라 나도 모르게 물러섰을 때였다.
“엘 님 말이야! 대체 왜 그렇게 헷갈리게 생긴 거야?”
“……뭐?”
“남자면 남자답게 좀 우락부락하게 생기면 안 돼? 쓸데없이 여자보다 예쁠 필요는 없잖아!”
“무슨…….”
“엘 님이랑 이사나 씨랑 같이 있으면 내가 얼마나 심란한지 알아? 이사나 씨는 엘 님한테만 힘든 이야기 털어놓고! 나도 들어줄 수 있었는데! 정말 나빴어! 치사해!”
일방적으로 퍼부은 뒤 알리사는 빠르게 사라졌다. 이번엔 나도 그녀를 뒤쫓지 못했다. 그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뭔가 엄청난 소리들을 연타로 들은 것 같은데, 기억에 남은 건 마지막에 외친 치사하다는 말뿐이었다.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라서 더 충격이 큰 것 같았다.
“자네.”
바로 정신을 차린 건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나는 조금 당황했다. 카웰 공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절 부르신 건가요?”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한 후로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황해서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폐하를 뵈었다지? 내가 괜한 말씀을 드린 탓에 최근 몹시 불안정해 보이셨는데, 자네를 만난 후로 괜찮아지신 것 같더군. 고맙네.”
하필이면 또 그 이야기다. 지금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화제였기에 얼굴이 저절로 굳어지려고 했다.
“……아닙니다.”
애써 태연하게 답하는 나를 공작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자네는 사내라고 들었는데.”
“네, 그런데요.”
“……흐으음. 그렇군.”
고개는 끄덕이는데 영 마뜩지 않은 눈빛이다. 왠지 조금 전의 패턴이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이사나는 내 동생인데 내가 아닌 널 의지하다니! 치사해!” 라고 외치고 달아나는 공작의 모습이 떠올라서 순간 오한이 들었다. 다행히 공작은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는 듯 여전히 차분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네, 정말 정령사인가?”
“예?”
“폐하의 손에 심한 상처가 있었네.”
“…….”
“하루 이틀 사이에 나을 상처가 아니었지. 어제 밤까지만 해도 펜대도 제대로 쥐지 못하셨을 정도였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말끔하시더군.”
자네가 치료한 건가? 입으로 내뱉지 않은 질문이 벌써부터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찰나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언젠가의 일이 번뜩 떠올랐다. 샴페인 용병단과 함께 지냈을 때, 모종의 사건으로 그들이 심하게 다쳤던 적이 있었다. 그날 마이티가 품속에서 꺼냈던…….
“아, 그거요. 성수예요!”
“……성수?”
“네, 제가 여행자로 지낸 시간이 많아서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던 성수가 있었거든요.”
“아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성수가 있었지.”
다행히 공작은 금방 납득한 듯이 보였다. 정령사인 내가 치료했다는 사실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이었으니 당연했다.
‘마이티! 고마워요!’
다음에 그를 만나게 되면 잊지 말고 꼭 이날의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에바스 에덴의 보석들을 가져다 한 아름 안겨줘야지. 마이티는 수전노니까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다.
카웰 공작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내가 가만히 응시하자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든 그가 쓰게 웃었다.
“실은 오랜 친우 중에 정령사가 한 명 있네. 그가 말하길 물의 정령왕은 치유 능력을 갖고 있다더군.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네.”
“…….”
“혹시 자네가…… 아니, 아니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아무래도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니 신경 쓰지 말게.”
아니, 그 혹시가 맞는데요.
나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멀어져 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사나를 위해 가장 헌신하고 있는 사람인데 비밀로 하고 있으려니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이런 건 이사나가 직접 말하는 쪽이 더 나을 거다. 그가 끝내 밝히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나는 평범한 유희를 하고 싶었던 거니까. ……이제 와서는 평범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진 것 같지만.
그나저나 오늘 무슨 날인가. 알리사에 이어 카웰 공작까지, 왜 돌아가면서 폭탄을 던지고 가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알리사를 붙잡아서 다시 제대로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알리사가 가면 갈수록 툴툴거리는 날이 많아지는 것 같다. 어리광을 너무 많이 받아줬나? 아니면 슬슬 사춘기가 오는 걸지도. 생각해 낼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을 가정해 보며 심각하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다방면으로 고생이 많으시군요.”
옆쪽에서 불쑥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건 활짝 열려진 창문이었다. 그 너머 드리운 굵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새카만 흑발 아래 강렬한 붉은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녕하십니까.”
“…….”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2층 창문 밖에서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대체 왜 저기에 있는 거야.
“나무에 오르는 게 취향인가 봐요, 데르온.”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여기 있으면 눈에 잘 안 띄어서 편하긴 합니다. 인간들이 몰려 있는 곳은 아무래도 불편하거든요.”
담담히 대답한 후 그는 몸을 일으켜 내가 있는 쪽으로 훌쩍 건너왔다. 누가 신체 능력이 월등한 마족 아니랄까 봐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었다.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그의 품에 뭔가가 안겨 있는 것이 보였다. 황금색을 띤 그것은 카노스가 맡긴 마족의 알이었다.
“계속 알을 갖고 다니는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정성스럽게 닦고 어루만졌는지 알의 표면은 깨끗하다 못해 반질거릴 정도였다. 데르온은 자부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만 계시면 답답하시지 않겠습니까. 모시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구경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구경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알 속에 있잖아요.”
“그래도 이 시기쯤이면 바깥의 소리는 다 듣습니다. 외부 자극에도 영향을 받고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이제 곧 부화할 때 아닌가요?”
“예, 시기상으로는 거의 막바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본격적인 전쟁은 언제쯤에 시작하는 겁니까? 부화하시기 전에 투기와 살기를 많이 접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이곳 생활은 너무 평화로워서 아쉽군요. 양질의 피를 맛보시게 하려 해도 기껏해야 가축이나 몬스터의 피밖에 구할 수 없으니.”
“……대체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야!”
이러다 성격파탄자가 태어날지도 모르겠다. 기겁해서 알을 뺏어들자 데르온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들은 원래 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그런 자들의 정점에 있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그런 식으로 안 키워도 얘는 강할 거예요! 마신이 눈여겨본 애잖아요!”
“하지만 너무 얌전하시단 말입니다.”
“그게 왜요?”
알이라는 건 원래 얌전한 거 아닌가? 나는 품에 안은 알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단단한 껍질은 여전히 따뜻했고, 이전보다 한결 묵직해져 있었다. 큰 차이는 없지만 크기도 좀 더 커진 것 같다. 누가 보기에도 순조롭게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데르온의 시선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래 마족의 알은 부화할 시기가 다가오면 태동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안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걸 수시로 느낄 수 있어야 하죠. 지금 주군께선 과하게 조용하신 편입니다.”
“그, 그래요?”
확실히 태동이 있는 것 같진 않다. 연신 알을 쓰다듬어 보는 동안 데르온이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이었다.
“이곳이 본계가 아닌 걸 알고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면 부화도 현저히 느려집니다. 숲지기라도 곁에 있다면 정서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겠지만, 지금 이곳에 마족은 저 하나뿐이니까요. 그러니 하다못해 주변 환경만이라도 친근하게 만들어 안심을…….”
“숲지기?”
“마계의 북(北) 공작을 뜻합니다. 탄생의 숲 카르텐에서 마족의 알을 관리하는 존재죠. 북 공작의 마력은 특별한 기운을 담고 있어서 마신의 정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모든 마족의 알은 그의 마력을 통해 수정되고, 필요한 양분을 얻습니다.”
마력을 통한 수정이라. 물고기에게서 볼 수 있는 체외수정과 비슷한 형식인가 보다. 마족이란 알면 알수록 신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충격적이기로는 아직 신족의 탄생을 넘어설 만한 것은 없었지만.
‘과일 속에서 태어나는 건 정말 엄청났지.’
그 엄청난 과일들이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던 것도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 안에 갇혀 있다 태어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천사들은 깨물면 과일 맛이 날지도 모르겠다.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중얼거리다가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 북 공작이라는 마족을 데려오는 건 안 되나요?”
“자크…… 숲지기는 왕의 허가 없이는 마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마신의 정수를 다루는 존재의 숙명이고, 언어로 묶여진 계약이라서 무시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으음, 그렇군요. 그럼 안 되겠네요.”
하필이면 가장 경계해야 할 마왕의 허가라니. 아예 의심하라고 넙죽 갖다 바치는 꼴이다. 나는 찝찝한 마음으로 다시 데르온에게 알을 넘겨주었다.
“어쨌든 너무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당신네 종족은 눈에 띄는 편이니까요.”
“엘 님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 어폐가 좀…….”
“뭐요?”
“더욱 착실히 조심하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남자의 처세술만큼은 가히 신이 내려준 것 같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냉큼 공손하게 답하는 마족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데르온이 우리 일행들 중에선 가장 평범한 느낌이라는 거. 전투에 들어가 마력을 발산하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긴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의 그는 굉장히 무난한 인상이었다. 그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면 솔직히 말해서 단속이고 뭐고 할 필요 없이 그냥 라피스만 옆에 붙여 놓으면 된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은 그 얼굴에 정신 팔려서 데르온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