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47화 (247/608)

제247화

“이사나.”

조심스럽게 불러본 이름에도 반응이 없다.

“이사나!”

조금 더 크게 불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살짝 한숨을 삼킨 다음 그대로 걸어가 막 내리치려는 이사나의 팔을 붙잡았다. 강제로 멈추게 한 후에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가 멍하니 나를 돌아보았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오면서 당혹감이 떠오르는 것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엘?”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에서 검을 떼어냈다. 억지로 손가락을 벌리고 검을 빼내자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손바닥 안이 온통 퉁퉁 불어 있었으니까. 피부가 거의 다 벗겨지다시피 한 상태이니 아파서 잡고 있는 것조차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미 터져버린 물집에선 진물과 함께 피고름까지 흐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하루 만에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이런 손으로 용케 검을 휘두를 생각을 했다 싶었다. 유심히 상처를 살피자 이사나는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어어, 정말 엘이네? 언제 돌아왔어? 미안해, 내가 너무 집중했나 봐. 전혀 몰랐어.”

어색하게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 조금 전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나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말없이 손바닥의 상처를 치료하자 이사나는 개운하다는 듯이 웃었다.

“와, 사실 조금 아팠는데. 고마워, 엘.”

미성숙한 소년의 얼굴인데도 표정만큼은 완벽한 어른의 그것이다. 차라리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순간에조차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하는 그가 속상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응? 뭐가?”

“힘든 일 있는 거지? 속으로 눌러 참기만 하는 건 별로 도움 안 돼.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 내가 다 들어줄게.”

덧씌운 가면 아래, 유리처럼 비어 있던 푸른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 찰나에 스친 망설임을 나는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그런 주제에 이사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였나? 아무 일 없었어.”

“그렇게 넘어가려고 해 봤자 안 통해.”

“정말이야. 그냥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져서……. 뭔가에 집중하고 싶었을 뿐.”

“머릿속이 왜 복잡해졌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꾸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서……. 그…… 전쟁이 시작되니까 내가 좀 예민해졌나 봐. 긴장이 되기도 하고 또…….”

“이사나.”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아직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마주한 얼굴은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굳어 있었다. 이제야 조금은 봐줄만 하다는 생각에 나는 쓰게 웃었다.

“속내를 감추는 건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지.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는 건 강해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고. 황제로 살아가기 위해선 특히 필요한 부분일지도 몰라. 하지만 혼자서 끌어안는 건 한계가 있어. 그리고 그런 건 솔직히 너무 외롭잖아.”

“엘…… 나는…….”

“난 네 친구이지만 보호자이기도 해.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쓸 만한 보호자일 거야. 이럴 때야말로 날 의지해 줬으면 좋겠어. 네게 약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나한테 문제가 될 것도 없고, 그걸로 우리 관계가 변하지도 않아. 네가 내 앞에서까지 강하게 있을 필요는 없어.”

눈동자의 떨림이 더 짙어졌다. 이사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없이 나를, 그리고 자신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엉망이었으나 아까만큼 공허한 눈빛은 아니었다. 살피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살짝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은, 카웰 형님한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 카웰 공작과 관련이 있었구나.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기에 애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었다.

“무슨 이야기?”

“숙부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인 건 아니었던 것 같아.”

“숙부라면, 유카르테 대공 말이야?”

이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털어놓기 시작하니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두 눈 가득 물기를 담은 채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렸을 때 죽은 그의 모친이 알고 보니 대공과 오랜 벗이었다는 것. 그녀가 죽기 전에 보인 의미심장한 행동과 말들. 지금까지 피의자라고만 생각했던 대공에게도 숨겨진 사연이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이사나의 아버지인 선황이 깊이 개입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아버님이…… 숙부를 그렇게 만든 걸지도 몰라. 아버님이 그를 괴물로 만든 거야.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아버님 때문에…….”

혼란과 불안으로 범벅된 얼굴이 마침내 완전히 일그러졌다. 속으로 꾸역꾸역 끌어안고만 있던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선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얼굴엔 언제나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온전한 희생자였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억울한 죽임을 당한 가엾은 사람이었다.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이면을 확인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모든 신념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기분과 닮지 않았을까.

전혀 다른 상황이긴 하지만 한때 나도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아직 어리고 작은 강지훈이었을 때, 그 시절의 나는 가족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관심을 덜 받는 것은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라서, 유난히 엄격하고 손찌검이 잦은 것은 내가 철부지고 잘못한 게 많아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 또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 속에 나를 가두었지만, 그래서 행복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달라지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같은 종류의 공포였다. 그 세계가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수록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두려운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결국은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라서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사나, 사람은 완벽하지 않아.”

담담하게 건넨 말에 이사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혼란스럽게 올려다보는 얼굴을 보며 나는 씁쓸히 웃었다. 그에게는 아직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다. 난 이사나가 그것까지 부정하길 바라지 않았다.

“누구도 좋은 점만 가지고 있을 순 없어. 대공을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자들이 있는 것처럼, 네 아버지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었을 뿐이야. 설령 그게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해도, 악을 더한 악으로 갚는 것도 평범한 선택이라고 할 순 없어. 대공이 괴물이 된 건 결국 그 스스로 선택한 길이야.”

“하지만…….”

“물론 정말 원인을 제공한 거라면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 그걸 감춰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널 사랑했던 아버지였던 건 사실이잖아. 너까지 그를 비난하고 탓할 필요는 없어.”

이사나의 눈동자가 파문이 이는 것처럼 동요했다. 나는 그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네가 사랑하는, 널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라진 게 아니야. 그의 몰랐던 면을 알게 돼서 실망스럽겠지만, 원망에 삼켜져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마.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숭고한 아버지라서 사랑했던 게 아니잖아? 그냥 예전보다 네가 감당하고 포용해야 할 것이 조금 더 많아진 것뿐이야. 원래 사랑이란 게 그런 거잖아.”

눌러 참았던 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상태에서 이사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의 두 뺨 가득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사랑하기에 미워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서글픈 감정 또한 한때의 나를 떠오르게 했다. 비록 내 경우엔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워하지도 못한, 엉망진창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그래서 결국은 전부 다 놓아버리는 쪽을 택하고 말았지만.

이사나는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는 그 시절의 어린 강지훈보다는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일방통행인 애정은 아니었으니까.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세상에서, 아이에게는 넘치도록 충분한 자산이었다. 지금의 내가 아무렇지 않게 힘든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내 가족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이 순간의 기억을 붙잡아 버텨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이 이사나에게도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터였다.

머리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자 이사나는 나를 붙들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이에 비해 의젓하긴 하지만 그도 아직은 어찌할 수 없는 아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때로는 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도 있을 평범한 십대 중 한명이었다. 그것을 내내 억제하고 다스려야 하는 삶이 고단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황제라는 지위에 부여된 책임과 역할, 오직 그만을 바라보며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이사나가 편하게 울 수 있는 장소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짧은 시간이 그에게 충분한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사나가 진정할 때까지 흐느끼는 그의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긴 밤의 끝,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나흘 후, 출정식을 거행합니다.”

아침 햇살이 이제 막 비추기 시작한 이른 시각. 사람들이 둘러앉은 회장에 차분한 소년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오전마다 잡혀 있는 일정 회의였지만, 이번 이사나의 발언은 평소와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차곡차곡 진행 중이던 준비가 드디어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가볍게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서 들뜬 공기가 감돌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이사나의 두 눈도 열기를 담고 있었다. 지난밤 지칠 때까지 눈물을 쏟아내던 모습은 이미 완전히 지워진 채였다.

새벽의 상황은 이사나가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어영부영 마무리됐다. 이후 다시 대화를 나눠 보진 않았으나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눈빛도 보다 또렷해졌고, 목소리에도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마음의 방황을 끝낸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느낀 것이 나만은 아닌지, 그를 지켜보는 친위 기사들의 분위기도 여느 때보다 밝았다. 이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부터는 그동안 당했던 것들을 갚아줄 일만 남아 있었다.

“……알리사를 선발대에?”

당황한 건 이후의 계획을 논하기 시작할 때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진행된 작전 회의에서 알리사를 선발대에 세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선발대는 앞서 출정하는 만큼 부여된 역할이 많은 데다 전투에도 가장 많이 노출되는 자리였다. 놀라서 얼굴을 굳히는 내게 이사나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라센 성 전투 때의 활약으로 알리사가 워낙 유명해졌잖아. 벌써 근방 지역에까지 알리사의 이름이 알려진 모양이야. 선발에 서면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질 거라고, 형님이 권유하셨어.”

“으음, 사정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

“응, 그래서 나도 반대하는 입장이긴 했는데, 알리사가 극구 하고 싶다고 해서…….”

알리사가 스스로 희망했다고? 나는 황망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대각선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늘하늘한 드레스, 풍성한 머리를 가득 장식한 리본들. 음침한 사내들만 가득한 장소에서 홀로 인형같이 어여쁘게 꾸며진 소녀가 그곳에 앉아 엄청난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화제의 장본인인 알리사였다.

긴 밤 내내 우는 이사나를 다독이느라 그녀와는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재회 인사를 나눈 참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리사는 새침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두 눈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에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아침에 만났을 때만 해도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는데 왠지 지금은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내내 뚱한 얼굴이었던 것 같다.

“알리…….”

“난 참전할 거야.”

말을 걸기 무섭게 반응이 즉각 돌아왔다. 대화를 하기 싫은 건 싫은 거고,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 점은 그녀다웠다. 물론 그 대답이 결코 반가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알리사.”

“엘 님이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없어. 내가 선발에 있으면 병사들의 사기가 오른다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고 싶어.”

“하지만 너무 위험…….”

“괜찮아. 선발이라고 해도 맨 앞줄에 있는 건 아니래. 전투가 벌어지면 뒤로 물러날 거고,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나도 내 몸 하나쯤은 충분히 지킬 수 있고.”

“그래도 안 돼. 전쟁에 끼어들기엔 넌 너무 어려.”

“엘 님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모순이야. 지난 전투에서는 참여하게 해 줬잖아. 그땐 되고 지금은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아?”

“그거야…….”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나를 본 이사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어.”

“……그래.”

어쩌자고 내가 그 전투에 알리사를 이용했을까. 때늦은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스스로 무덤을 파다 못해 관 뚜껑까지 알아서 열고 기어들어 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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