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이제 라피스는 확연히 복잡해진 눈빛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주시한 후 그는 주위의 구경꾼들을 의식했는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가는 쪽이 저택이 있는 쪽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라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방해받지 않는 곳. 너 이쪽으로 오자마자 바로 나한테 온 거냐? 중간에 누구 만난 녀석은 없어?”
“없어. 트로웰이 너한테 제일 먼저 들리라고 했어. 다른 사람은 세 시간 정도 후에 만나라던데?”
“젠장, 그 자식……! 아무튼 내가 제일 만만하지.”
앞서 걷는 라피스에게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향한 곳은 광장 밖으로 연결된 울창한 숲 안이었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장소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춘 후 다시 빤히 나를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건지 모르겠네. 이유나 말하고 노려보지그래?”
“너 말이야. 평소랑 달라진 점 없어? 감각이 둔해졌다거나, 머리가 멍하다거나.”
“감각?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굉장히 개운해서 좋아. 꼭 커피 마신 것처럼.”
“커피?”
“각성 효과가 있는 음료야. 졸릴 때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
“……나참,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만하네. 아무래도 새 정령왕의 탄생에 영향을 받아 잠시 본성이 눈을 뜬 모양인데. 아무튼 재미는 있군.”
“무슨 뜻이야?”
“타고난 성향보다 주변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뜻. 넌 다른 곳에서 잘못 태어났다 오길 정말 잘했다. 장담하는데, 그대로 태어났으면 전대 엘퀴네스보다 더 재수 없었을 거야.”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오히려 유감이네. 너한테 재수 없게 굴 기회를 놓쳤다는 소리잖아.”
“……미치겠군. 이걸 세 시간이나 견디란 말이지.”
이글거리는 눈빛에서 오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대체 왜 저러는 건가 싶어 의아해하다가,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을 말했다.
“라피스,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난 네가 곤란해하면 재밌는 것 같아.”
“알았으니까 입 다물고 있어. 속 뒤집지 말고.”
“싫은데. 네가 곤란한 게 재밌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나한테 명령하지 마. 짜증 나.”
“짜증은 내가 더 나거든!”
이후로도 나와 라피스의 의미 없는 입씨름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하늘은 화창했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 라피스와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심했지만,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나 원래 이렇게 꼬인 성격이었나?’
무심코 중얼거리다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트로웰도 그렇고 라피스도, 오늘따라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닌 것도 같다. 여느 때보다 상태가 좋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찝찝한 여운이 남는 건지 모르겠다. 굉장히 긴 세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 *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던 것 같아.”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트로웰의 혜안은 늘 옳다. 무슨 말이냐면, 시간이 지나자 슬슬 내가 했던 말들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솟아난 자신감이었던 건지. 기분이 과격해질 때나 속으로 꿍얼거릴 말들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지껄여댄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뒷감당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새삼 너무 심했다는 자각이 들고 나니 수습할 길이 막막했다. 꼭 뭔가에 홀려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것 기분이었다.
조심스럽게 건넨 사과에 라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백 년은 한꺼번에 늙은 듯한 얼굴로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정확히 세 시간이군. 이제 좀 수습할 마음이 드냐?”
“……미안.”
아무래도 내가 잠시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대체 어쩌려고 그렇게 막말을 내뱉었던 걸까. 물밀 듯이 치밀어 오르는 창피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나마 상대가 라피스라서 다행이었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린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죄책감이 덜했다. 역시 트로웰의 조언에 따르기로 한 건 백번 잘한 선택이었다. 내심 안도하는데 그 기색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라피스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무난히 넘어갔다고 안심하기엔 이를걸.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까.”
“뭐, 뭐가?”
“본성이 살아났다는 건 그만큼 네가 정서적으로 안정됐다는 뜻이거든. 좋게 보자면 좋은 일이겠지만, 또 그 거지 같은 성격이 발현하는 때가 있을 거라는 말이지.”
“으음, 그게 언젠데?”
“네가 감정적이 되는 순간이면 아무 때든. 예전보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도 많아질 거다. 지금처럼 뒷감당 걱정하기 싫으면 평소에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할 거야.”
“으으,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뭘 잘못 먹은 것도 없었는데.”
“본성이 살아났다고 말했잖아. 엘퀴네스는 타고난 성질 자체가 사나운 편이라 대대로 다들 성격이 거지 같았어. 너도 역시 엘퀴네스였다는 거지.”
“자꾸 거지 같다고 할래?”
“왜, 또 막말로 되받아쳐 보시지? 아깐 아주 잘하시더만.”
“너 뒤끝 있다는 소리 엄청 자주 듣지!”
또다시 투닥거리는 동안 하늘이 많이 어둑해졌다. 어느새 오후가 다 지나고 저녁 시간에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하나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별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라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계속 이곳에 머물 건지 네 의사를 묻는 거야. 표현 방식이 좀 나쁘긴 했지만 아까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긴 했어. 싫은데 억지로 어울리진 않았으면 해.”
“그래서 이만 꺼지라고?”
“그런 식으로 곡해하지 마. 나름대로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억지로 끌려다니는 건 괴롭잖아.”
말해 놓고 나니 괜히 우울해져서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더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라피스가 정말 떠나면 상당히 허전해질 것 같다. 침울해진 내 기분을 읽었는지 라피스는 피식 웃었다.
“날 생각해 준다니 꽤 기특하긴 한데. 난 딱히 억지로 끌려다니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한 적도 없어. 이 정도 귀찮아질 것쯤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온 거야. 네가 동료의식 같은 귀찮은 관계성만 강요하지 않으면 돼.”
“다른 사람들하고 잘 지낼 마음은 없는 거야?”
“필요한 협력은 하고 있잖아. 여기서 얼마나 더 잘 지내?”
“그래도…….”
“난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아. 네가 진짜 날 생각한다면 내 방식도 배려해. 세상 모두가 다 너처럼 화기애애하게 지내야 편한 건 아니야.”
담담하게 말하는 얼굴엔 평소처럼 타박하거나 빈정거리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게. 대신 시키는 건 전부 해야 해. 그건 불만 없는 거 맞지? 네 입으로 협력은 한다고 했으니까.”
“……야.”
“그래, 알아. 네 말대로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데 무조건 내 방식이 옳다고 고집할 수는 없지. 나도 그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제멋대로인 네 성격을 감안해 주는 것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까지야. 그건 생각하면서 행동해 줬으면 해. 우리 서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고. 너도 머리가 나쁘진 않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내 나름대로 부드럽게 달랬다고 생각했는데 라피스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그를 의아하게 보다가 나는 살짝 낭패감을 느꼈다.
“아, 미안. 지금도 말하는 방식이 좀 그랬나……?”
그와 동시에 라피스가 이마를 짚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체류 한 시간 더 연장.”
* * *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한 후 돌아왔을 땐 이미 자정에 다다른 시각이었다. 한밤이나 다름없는 시간에도 저택 안은 아직 환했다. 정문 앞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수레들과 상자들, 각 층에는 저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치는 중이었다. 그 주위를 무장한 병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한 경계를 펼친 채 지키고 있었다.
공간이동을 해서 들어갈까 하다가 나는 그냥 이곳 규칙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을 텐데 튀는 행동으로 쓸데없는 자극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입구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순순히 문을 터 주었기에 통과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엘! 돌아왔구나!”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며 달려오는 그에게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벨, 안녕. 아직 안 자고 있었네?”
“나참. 태연하게 인사할 때가 아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해. 피치 못할 사정이 좀 있었어. 그동안 별일 없었지? 다른 사람들은?”
“알리사는 시간이 늦어서 재웠고, 마족 녀석은 아마 제 방에 있을 거야. 그리고 이사나는…… 연무장에 있어.”
“연무장? 이 시간에?”
성실한 이사나는 아무리 바빠도 틈틈이 몸을 단련하는 편이었다. 그가 연무장에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어리둥절해졌다.
“오늘 그렇게 바빴어?”
“일이 많기는 한데,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요즘 매일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와. 정확히는 업혀 오는 거지만.”
“뭐?”
놀라서 되물은 말에 시벨리우스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진 그의 설명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요 며칠 이사나는 한번 연무장에 들어가면 녹초가 될 때까지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가 기절하듯이 쓰러지면 그때서야 기사들이 방으로 옮겨 둔다는 것이다.
“마침 엘이 돌아와 줘서 다행이야.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 몇 번 말려 봤는데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이사나한테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요즘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물어봐도 별일 없다고만 하더라고.”
나는 바로 라피스부터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바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몰라.”
“…….”
기대한 적도 없지만 역시나 도움이라곤 쥐뿔도 안 되는 답변이었다. 나는 괜한 분풀이를 하지 않기 위해 속을 차분히 다스렸다. 왠지 손끝이 간질거렸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쉬울 거라고 하더니 확실히 예전보다 손속이 과감해지려고 한다. 지금은 완전히 진정한 상태였으니 망정이지, 몇십 분 전의 나였다면 저놈의 뒤통수부터 후려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이사나부터 만나봐야겠네.’
이사나는 돌출 행동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그가 며칠 째 몸이 축나도록 단련에 매달리고 있다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징후였다.
나는 일단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외각으로 향하자 뿌연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건물이 보였다. 그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내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친위대장 케이를 비롯한 이사나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초조한 얼굴로 문만 주시하고 있었다.
“저택 안인데 호위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
나는 굳어진 공기를 풀어낼 겸 가볍게 말을 걸었다. 흠칫 놀란 기사들이 황급히 돌아보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엘님!”
“오오, 엘님!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엘님!”
적막한 공간을 단숨에 가르는 소리들이 여기저기 파도처럼 쏟아져 들었다.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닌데 마치 몇 년 만에나 만난 것처럼 절박한 표정이었다.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한 공작 쪽 병사들만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듯이 살피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넓은 실내 안, 혼자서 반복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의 소란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무섭게 집중하고 있는 그는 이사나였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건지 그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푹 절어 있는 상태였다. 안색 역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창백했다. 걱정하면서 오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는지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어 하소연했다.
“엘 님,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제발 폐하를 말려 주십시오. 매일 밤 저렇게 녹초가 되도록 검을 휘두르십니다. 저러다 큰일 나실 것 같아서 몇 번이나 만류해 보았는데 전혀 듣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방해된다고 쫓겨나기만 했습니다.”
“들어오기만 해도 엄벌에 처하겠다하시니 저희로선 도저히 막을 재간이 없습니다. 동료분들이 만류하시는 것도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엘님. 엘님이 나서시면 폐하도 멈추실 겁니다.”
다 큰 남자들이 울먹이는 얼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해했다. 지금 이사나는 훈련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저건 그저 자학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침묵하는 입 대신 그의 온몸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보필하는 주군의 이런 모습을 담담하게 견딜 수 있는 신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지켜보는 게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사나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
“저희도 연유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중이었습니다. 카웰 공작님은 무언가 짐작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요…….”
카웰 공작만이 알고 있는 일이라면, 그와 개인적으로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다. 나는 편하게 결론을 내린 후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해 볼 테니까 잠시 자리 좀 비켜 줄래요?”
“폐하의 곁을 비울 수는……!”
반발은 공작의 병사들 쪽에서 튀어나왔다. 그러자 친위 기사들이 곧장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숫자는 병사들이 더 많았지만 상대는 귀족인 데다 황실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위압적인 그들의 분위기에 얼어붙은 병사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친위대장 케이가 그들을 데리고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어느 정도 멀어진 후 그가 나를 향해 정중히 목례했다.
“그럼 엘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담스럽도록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는 내가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내 뒤쪽에서 멀뚱히 서 있던 라피스와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너희들도 여기 있어줘.”
“혼자 만나 보려고?”
“응, 지금은 나 혼자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라피스, 안쪽 대화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주위에 마법 좀 걸어줄 수 있을까?”
부탁을 받은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곧 연무장 주변에 마나가 얇은 막처럼 깔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를 차단하는 침묵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나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가볍게 투덜거리는 시벨리우스를 향해 라피스가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비웃는 얼굴이었다. 마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에서 강렬한 불꽃이 터져 나오는 것을 뒤로 한 채, 나는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이사나는 여전히 무아지경 상태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굉장히 지쳤을 게 분명한데도 고통조차 드러내지 않은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텅 비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