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또 물어보면 안 됩니까?”
“……아니야. 질문이 뭔데?”
“아까 전부터 엘퀴네스를 부르는 호칭 말입니다. 왜 엘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엘퀴네스는 엘퀴네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응? 그건 그냥 애칭인데.”
“흐음. 애칭이요? 그렇다면 이프리트나 트로웰은 어째서 애칭으로 불리지 않습니까? 정령왕은 모두 평등한 존재인데, 전부가 애칭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차별 아닙니까?”
묻는 어조는 진지했고, 어딘지 모르게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트로웰과 이프리트도 천천히 웃음을 멈추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렇게 심각하게 볼 일은 아닌 것 같아, 미네르바. 엘은 애칭이기도 하지만 유희명(名)이기도 하니까. 우리도 유희명은 따로 있는걸. 누가 지었느냐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딱히 차별 대우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럼 여러분은 따로 애칭을 만들 생각은 없는 겁니까?”
“난 지금이 더 편해서 별로. 이프리트는 어때?”
“나도 여기서 더 호칭을 늘릴 생각은 없어. 누가 붙여준다고 해도 싫을 거야.”
“그렇습니까? 그것참 유감이군요…….”
어째선지 미네르바의 표정이 흐려졌다. 진심으로 애석해하는 기색이라 지켜보는 게 더 조마조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트로웰이 물었다.
“혹시 미네르바도 애칭을 갖고 싶은 거야?”
“……”
그 순간 우리는 보고야 말았다. 굳게 입을 다문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이 아주 조그맣게 일그러지는 것을.
‘그랬구나!’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파악하길, 저 얼굴은 분명 수줍게 미소 짓는 표정이다. 우리들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아하하! 그,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도 애칭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아? 하하하!”
“으응, 그러게.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
“응, 나도 찬성이야. 우리 미네르바에게도 예쁜 애칭을 지어 주자.”
힐끗 돌아보니 미네르바의 눈빛이 매우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이번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 헛기침했다. 트로웰과 이프리트도 입술을 억지로 앙다무느라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떤 게 좋을까? 일단 여성체니까 귀여운 이름이 낫겠지?”
“엘퀴네스를 ‘엘’이라고 했으니까, 미네르바는 ‘미네’라고 하면 어때?”
“아, 그거 괜찮다!”
“그러게. 마음에 드는데?”
이프리트가 제안했고, 우리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즉석에서 만든 것치곤 썩 나쁘지 않은 이름인 것 같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미네르바?”
“……미네? 그게 제 애칭입니까?”
“응. 애칭이라곤 해도 본인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네가 싫다고 하면 다시 고민해 볼게.”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미네르바는 곧바로 대답했다. 표정이 굉장히 이상해져 있었지만 이제 아무도 그 얼굴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첫인상에 비해 의외로 알기 쉬운 성격이다. 벌써 그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한 기분이었다.
독특한 매력이 넘치는 바람의 정령왕, 미네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물건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방금 전 내리쳐진 책상에서 장식품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였다. 뿔뿔이 흩어진 서류들과 책들. 그 사이에 섞여 굴러다니던 잉크병이 채 잦아들지 않은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입구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온 검은 잉크가 카펫을 더럽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패(大敗). 대패란 말이지.”
이를 갈 듯이 낮아진 음성, 그 속에 서린 짙은 노기에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특히 바로 앞에서 보고하던 자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가 전달한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라센 성의 전투 결과였다. 불과 이틀. 눈앞에 적혀있는 처참한 숫자에 유카르테 대공은 다시금 이를 갈았다.
소드 마스터인 카웰 공작이 출전할 때부터 이미 승패가 정해진 전투이긴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어줄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무너져 버렸다. 이렇다 할 전투를 하지도 않고 대다수 투항하는 바람에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도 못했다. 클모어 공작 쪽에선 그냥 앉은 자리에서 몇만의 군대가 통째로 굴러들어 온 격이었다.
“성벽이 무너진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습니다. 설마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알려진 라센 성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정령사가 활약했다고 했나?”
“예, 알리사라는 이름의 땅의 정령사가 큰 지진을 일으켜 지반을 무너트리는 방법을 썼다는 것 같습니다.”
“땅의 정령사? ……물이 아니라?”
“예. 틀림없이 땅의 정령사였습니다. 심지어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아니라 땅이라.
유카르테는 미간을 좁힌 채 턱을 쓸었다. 당연히 물의 정령왕이 나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하긴 정령왕이 나섰다면 수고스럽게 성벽을 무너트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맹랑한 그의 조카는 정령왕과 계약한 사실을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밝히기만 하면 판도를 단숨에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일인데도 침묵한다는 건 아직 밑바닥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하물며 그를 돕는 또 다른 전력이라니. 행방을 놓친 이후의 행적을 알지 못하는 만큼, 유카르테는 더욱 초조해졌다.
“그 땅의 정령사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현재까진 알폰프 제국 출신이라는 것까지만 밝혀냈습니다.”
“알폰프?”
그 순간 유카르테는 얼마 전에 받았던 불쾌한 보고를 떠올렸다. 알폰프 제국 쪽에서 진행 중이었던 모종의 계획에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학술원을 찾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을 꾸준히 모아오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바로 얼마 전 한 지점이 발각되면서 모든 일을 망쳤다. 비밀 통로로 괴한이 침입하여 납치한 아이들을 전부 빼돌린 것이다.
그 당시 달아났던 아이들 중에 땅의 정령사인 소녀가 있었다. 흔치 않은 능력이었기에 더욱 아까워했던지라 잘못 기억할 리가 없었다. 알폰프 제국인이면서 약관이 되지 않은 소녀. 그중에 땅의 정령사라는 조건을 갖춘 이가 두 번이나 자신의 일에 연관될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 답은 놀라울 정도로 분명해졌다.
“……이사나, 네가 개입한 거였나.”
“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유카르테는 허탈하게 웃었다. 당시 비밀 통로는 철저한 보안 속에 감춰진 채 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괴한은 너무나 쉽게 침입했고, 알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해서 병사들을 전부 잠재운 후 유유히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제껏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는데 설마 여기서 해답을 찾게 될 줄이야.
‘알폰프 제국에 가 있었던 거였군. 그러니 국내를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할 수밖에.’
심지어 그곳에서 가서도 자신의 일을 망치다니. 정말이지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조카였다. 미리 그 사실을 알고 건너갔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우연히 개입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하늘이 정해 준 악연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하늘이 아니다. 유카르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악연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이미 예고된 저주이기도 했다. 그래,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부터.
<그만둬, 유카. 너까지 괴물이 될 생각이야?>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음성이 그에게 소리쳤다. 그렇게 말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는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의 유일한 영혼이었던 여인이었다. 친 혈육보다 더 진한 피를 나눈 누이였으며, 가장 사랑했던 친우였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감정에 울먹이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터였다.
<내가 널 막을 거야.>
붙잡아오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돌아서서 걷는 그의 뒤를 향해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막지 못하면 내 아이가! 반드시 네 앞을 막아설 거야! 알겠어, 유카?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됐군, 로아. 그래, 넌 언제나 옳았지.’
유카르테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녀를 뿌리친 손은 내내 얼음처럼 차갑다. 그 한기를 자각할 때마다 누군가의 목을 비틀어 조르고 싶은 잔인한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오랫동안 피를 보지 못했다. 피를 받아야 할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래도 연락이 규칙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보름이 넘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기는 처음이었다. 수많은 위험 부담을 안고 진행하는 일인 만큼 중간에서 일이 틀어졌을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다. 사실 가뭄이 끝났을 때부터 예감은 좋지 않았었다. 물의 정령왕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태어났다. 예상했던 대로라면 몇 년은 더 가뭄이 지속되어야 했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이미 지난 일에 가정을 세우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유카르테는 애석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를 잃어 가는 것을 스스로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끝날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 외각에 배치한 황군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리고 각 지에 군사들을 집결시켜라.”
그는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카웰 공작은 곧 군사를 이끌고 황성까지 진격하려고 할 터였다. 화근이 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은 실패했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짓밟아야 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명이 떨어지는 순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귀족들의 움직임이 굼떴다. 그것을 본 유카르테가 두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앞에 굳은 얼굴을 한 젊은 귀족들이 나섰다. 유카르테는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 카웰 공작의 무용을 흠모하는 이들로, 평소에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었다.
“뭐지?”
“라센 성의 전투가 마무리 되면서 최근 백성들 사이에 소문 하나가 떠돌고 있습니다. 클모어 공작이 황제 폐하를 보호하고 있다고요.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섭정왕이 황제 폐하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강제로 유폐하고 제위를 찬탈하려고 한다……고 말입니다.”
“……호오, 그래?”
“저희는 황제 폐하가 불한당들에게 납치되었다는 대공 전하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말을 들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이에 관해 해명해 주셔야겠습니다.”
“해명이라……. 사실이 아니라면?”
“그럼 그 소문은…….”
“뻔하지 않은가. 카웰 공작이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 그럴 리가! 카웰 공작님은 그럴 분이…….”
“하하, 그대들도 상당히 순진하군. 카웰 공작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럼 그자가 제위를 노리고 있다는 건 더더욱 믿을 리가 없겠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그자가 자신의 혐의를 오히려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지. 그대들은 그 말에 속아 넘어갈 뻔한 거고. 이해는 한다. 폐하조차 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그가 하자는 대로 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 말이야. 매우 애석한 노릇이지.”
“거짓말!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는 대공 전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주위는 금세 고요해졌다. 긴장감이 흐르는 정적 속에서 유카르테는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손의 한기가 조금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뭐든 뜨거운 것이 필요했다. 금방이라도 데일 것처럼 축축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그런가. 믿을 수가 없다니 유감이군. 그렇다면 진실은 내 신께서 보여 주시겠지.”
“무슨…….”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항의하던 젊은 귀족들이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커헉!”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숨을 들이켜고는 몸을 비틀거렸다. 갑자기 옆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놀란 동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라셀 남작? 갑자기 무슨……컥!”
“비엘트 남작님! 아악!”
불행은 곧 나머지 이들에게도 이어졌다. 엄청난 압력과 함께 온몸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 그들에게 엄습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꺾였고, 몸에선 상처가 나지도 않았는데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마다 전부 피를 쏟아내는 것 같았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참 동안 허우적거리던 젊은 귀족들은 잠시 후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그들의 육체에 살아 있는 자의 온기는 이미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내 신께서 내가 맞았다고 하시는군.”
바닥에 쌓인 시체 더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유카르테가 말했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엔 숨을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유카르테는 느긋하게 시선을 들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몸을 덜덜 떨었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본 후, 그는 근처에 있던 시종장에게 명했다.
“저것들을 치우고 카리브디스 공작을 불러와라.”
“예, 예, 전하!”
급히 허리를 숙인 시종장이 주위에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분주해진 공간 속에서 유카르테만이 홀로 고요히 서 있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쓰러진 것들에서 튀었는지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몹시 만족스러운 감촉이었다.
‘괜찮아. 힘을 쓸 수 있다. 내 신은 여전히 건재해. 아직 아무것도 틀어지지 않았어.’
여기서 멈출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우와의 마지막 대화도 떠올랐다. 미처 답할 수 없어서 속으로만 삼켜야 했던 말 역시.
“내 앞을 막아서겠다고? 물론 그럴 수는 있을 거야, 로아. 넌 항상 옳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야. 살아남는 쪽은 내가 될 거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듯, 그녀의 귓가에서 말해주고 싶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들려주지는 못하는 것이 지금도 두고두고 아쉬울 정도였다.
“무엇이든 밟고 올라서 주지. 그것이 네 아들의 피라도.”
넌 차라리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야 했어.
유카르테는 나른하게 웃었다. 미쳤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끝은 정해져 있었고, 그는 나아갈 뿐이었으니까. 단지 그런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