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어쨌든 결론은 그거네. 한마디로 말해서 넌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 엘뤼엔에게선 확답을 받았지만, 트로웰의 생각은 아직 모르니까.”
속으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동안 이프리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것 같아.”
“흐음, 그야 그렇겠지. 확실히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한 일이긴 해. 정확히 알아 둘 필요는 있겠어.”
엉뚱한 일에 집착한다며 타박부터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프리트는 내 입장에 공감한 것 같았다. 그것도 꽤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었다. 힐끗 나를 살피는 그의 얼굴에 망설임이 보여서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이프리트는 몇 번을 더 그런 행동을 취하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시벨리우스란 성마 말인데, 엘뤼엔은 모르는 녀석이라고 했댔지? 그런 과거는 없었다고?”
“아, 응. 맞아.”
“하지만 그거, 그 성마에 대한 기억만 없다는 소리일 거야. 내가 알기론 그 성마가 말했던 시기에 트로웰이 인간들을 없애려고 했던 건 사실이거든.”
“……어?”
“물론 나도 들은 이야기야. 그 당시엔 내가 아닌 전대의 이프리트가 있었을 시기였으니까. 그래도 워낙 유명한 일화라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그 일이 정말 사실이었다고? 나는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멍해졌다. 트로웰에 관한 건 시벨리우스가 했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믿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의 기억이 불안정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당연히 그에 대한 것 역시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 성마의 주장을 뒷받침하진 못해. 오랫동안 봉인된 충격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킨 걸 수도 있으니까. 주워들은 소문을 자신이 겪은 일이라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카노스의 말로는, 그런 것치곤 기억이 너무 분명하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너무 섬세하게 미친놈일 수도 있지. 평범한 인간도 아니고 성마, 그것도 고귀한 혈통이라며. 자기가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시간을 봉인되어 있었는데, 불안정한 기억 속 허점 따위야 충분히 그럴듯하게 메울 수 있지 않았겠어?”
“그, 그런가.”
“문제는 트로웰이 줬다는 동화책의 내용인데…….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 소년과 백마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정말로?”
“으응, 그런 내용이었다고 했어.”
“흠, 그건 정말 이상한걸. 한 사람만 그런 주장을 하는 거라면 헛소리로 무시할 수 있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본능보다, 시벨리우스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쪽에 마음이 더 기울었었다. 아마 가짜 엘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분명 언젠가는 이 문제에 직면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적극적으로 해명을 요구하지도 못했을 테니 좀 더 음침하고 갑갑한 형식으로 진행되었겠지. 어쩌면 카노스가 작정하고 터트려 준 덕분에 더 원만히 해결된 걸지도 모르겠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네. 뭐,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해 봐야 진상은 당사자가 제일 정확히 알겠지만 말이야. 안 그래, 트로웰?”
돌아보며 묻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트로웰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조금 난처한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에 채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엿보여서, 나는 조금 움찔했다.
“으음, 굉장히 곤란한 상황인데.”
“……!”
“뭐야, 정말 다 알고서 꾸민 거야?”
눈을 크게 뜬 이프리트에게서 나보다 더 과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정작 나는 어땠냐면, 그냥 가만히 숨을 삼키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긴장한 내 모습을 보고 트로웰은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건 그저 내 자만이었던 모양이다. 점점 부정적으로 치닫는 생각에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때였다.
“아, 진짜 답답해 죽겠네! 트로웰! 애매하게 피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아니, 잠깐. 너무 다그치지 마, 이프리트. 나도 지금 말을 고르는 중이니까.”
“그건 혐의를 인정한다는 소리야?”
“나 참.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야.”
“……!”
아니라고? 한숨과 함께 이어진 즉답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트로웰은 조금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진작 그렇다고 할 것이지, 뭘 그렇게 망설이는데?”
“그야 당연히 민망하니까 그렇지. 설마 이제 와서 다시 예전 일이 언급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재차 이어지는 추궁이 귀찮았는지 대답하는 어조가 퉁명스러웠다. 민망하다는 게 그냥 지어낸 말은 아닌 듯 드물게 두 뺨도 붉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곤란한 기색이긴 해도 정곡을 찔려 당황한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엘한테 들킬 줄이야. 엘은 인간으로 산 경험이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그때 일은 알리고 싶지 않았어.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했네. 미안해, 엘. 나한테 실망했지?”
“아, 아니. 그렇지는…….”
“그렇게 말해도 많이 놀랐을 거 알아. 흠, 시벨리우스라고 했던가? 멋대로 그 일을 엘에게 알려버리다니 괘씸한걸?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언제 한번 얼굴이나 보러 가야겠네.”
생긋 웃는 트로웰의 눈빛이 표정과는 다르게 스산해서,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프리트는 그 말의 의미를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렇다는 건, 너도 그 성마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네?”
“응, 몰라. 당시 룬의 혈통을 이은 유니콘이 그런 이름이었다는 건 들어본 적 있긴 해. 하지만 그자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 엘과 똑같다는 인간도 전혀 모르는 일이야.”
“그 알리사라는 소녀에게 줬다는 책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뭔데?”
“으음, 그게 나도 지금 굉장히 당황스러운데. 일단 해명부터 하자면, 그 책은 나도 그냥 아무 서점에 들어가 적당히 사들인 거야. 자연스럽게 정령을 접하게 할 목적이었는데 아직 어린아이라서 동화책 형식을 택한 것뿐이고. 흥미만 유발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정말 대충 아무거나 골랐어. 그 안에 그런 내용이 있는 줄도 지금 처음 알았다고.”
“즉, 그냥 우연의 일치시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해.”
“그렇다는데?”
그 말과 함께 두 정령왕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눈길을 받고 있으려니 비로소 이 상황에 실감이 들었다. 결국 트로웰에 대한 것도 전부 오해였던 거다.
엘뤼엔 때도 그랬지만,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정말 창피하다. 그러길 바랐으면서도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눈앞에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미,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머리 위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사람은 트로웰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당혹감만 드러냈다.
“트, 트로웰?”
“우리 엘, 그동안 굉장히 고생했었네. 혼자서 많이 불안했지? 이제 괜찮아.”
“…….”
<이제 괜찮아.>
다정한 목소리가 봄을 알리는 단비처럼 가슴 속에 촉촉이 스며들었다. 퍼져나간 여운은 그 안에서도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몽글몽글한 꽃을 피워 나갔다.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
가볍게 넘겼던 그 말의 의미가 바로 이 순간 사무치도록 와 닿았다. 아아, 그래. 여긴 정말 내가 돌아올 장소였구나.
나는 어정쩡하게 떨어트리고 있던 팔을 들어 트로웰을 힘껏 마주 안았다.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등에 닿은 그의 손이 부드럽게 나를 다독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짙은 초원의 향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무 행복한데, 그래서 더 무섭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뜨면 전부 다 꿈이었다고 할까 봐. 또다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강지훈으로 돌아가 버리게 될까 봐.
가지기 전엔 잃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 알지 못했다. 한때는 눈을 뜨는 하루하루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소망을 꿈꾼다. 지금 이 시간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평생 무서워도 괜찮으니까. 이 아름다운 세상이 현실이 아닌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이 마음을 내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그들이 힘들고 지치는 순간에 지탱해 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기를. 내 형제들의 따뜻한 품 안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원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하루였다.
* * *
바람의 영역에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한 건 새벽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진공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공간에 갑자기 부드러운 바람이 감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빠른 공기의 흐름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점차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났다. 영역의 중심부에 작은 바람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트, 트로웰!”
당황해서 돌아보자 그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 바람이 오고 있어. 생각보다 빠른걸. 이번엔 명계에서도 단단히 준비했나 보네.”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시큰둥하게 말하는 이프리트의 얼굴에도 반가운 기색이 만연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두 정령왕의 얼굴을 보니 정말 새 미네르바가 태어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소용돌이는 고정된 상태에서 점차 크기를 불려 나갔다. 어린아이만 하던 크기가 성인을 넘는 덩치로, 이어서 거대한 토네이도로 부풀어 오르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세찬 바람이 휘감는다고 느꼈을 땐 온 세상을 찢어낼 듯 위협적인 회오리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공간 자체가 회오리바람이 된 것 같았다.
구름으로 장식되어 있던 가구며 바닥까지 그 안에 휘말려 전부 흩어진 탓에 우리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상태가 됐다. 그러나 그렇게 강한 바람에도 정작 나와 정령왕들은 옷자락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배경과 연출이 각자 따로 노는 듯한 기묘한 광경이었다. 물의 영역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것처럼, 그와 동일한 현상인 것 같았다.
이곳의 바람은 아무리 강력해도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물론 전적으로 정령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일 뿐. 다른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 들어왔다가는 아주 큰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다.
“저길 봐, 엘. 태어나고 있어.”
“……!”
속삭이듯 들려오는 트로웰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의 말대로 소용돌이 안에서 뿌연 형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아직은 투명한 덩어리에 가까워서 전체적인 실루엣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가냘픈 체형이라는 것과 키가 작은 편이라는 건 한눈에 보였다. 이대로 태어난다면 우리들 중에서 제일 작을 것 같았다.
“작군. 이번 미네르바는 어린 외형인가.”
“왠지 갈수록 작아지는 것 같지 않아? 저 크기면 잘 쳐줘 봐야 십 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일 것 같은데.”
함께 지켜보고 있던 트로웰과 이프리트가 번갈아 감상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실루엣 위쪽에서 새하얀 빛 무리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점차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빛 무리가 내려갈 때마다 미네르바의 형태는 점차 뚜렷해져 갔다. 가장 먼저 새하얀 머리카락이 드러났고, 그 아래를 따라 매끄러운 얼굴선이 그려지듯 이어졌다. 굳게 감은 두 눈, 곧은 선을 지닌 콧대부터 조각처럼 수려한 입술까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반짝이는 빛 속에서 하나둘씩 드러날 때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 속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서 가장 경이롭고 찬란한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답지?”
홀린 듯이 멍해져 있는 나를 보고 트로웰이 가볍게 웃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예뻐. 바람으로 빚어낸 도자기를 빛으로 조각해 내는 것 같아.”
“빛으로 조각한다라, 멋진 표현이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보이는걸. 으으, 이렇게 예쁜 광경을 눈으로만 담아 둬야 한다니 아깝다. 한국이었다면 동영상이라도 찍어둘 텐데.”
“영상? 그거라면 지금도 되는데?”
“어? 된다고?”
생각지 못한 말에 놀라서 돌아보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머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구슬이었다.
“영상석이란 거야. 마석을 가공해서 만들어지는 건데, 현장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어. 이런 걸 말하는 거 맞지?”
“응, 맞아. 여기도 이런 게 있었구나. 이거 내가 써도 될까?”
“얼마든지. 근데 탄생 장면을 굳이 저장할 필요가 있어? 회상만 해도 언제든 선명하게 떠오를 텐데.”
“그렇긴 한데, 그냥 뭔가 기록을 남기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중에 미네르바한테도 보여주면 기념이 되고 좋지 않을까?”
“아, 그거 재밌겠다.”
“그치?”
“응, 얼른 찍자.”
그리하여 우리는 정령계 최초로 정령왕의 탄생을 영상석에 담는 기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를 이프리트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엘은 그렇다 쳐, 트로웰 너까지 동참하는 건 무슨 생각이야?”
“왜?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지금까지 자기가 태어난 모습을 본 정령왕은 아무도 없었잖아. 이게 완성되면 미네르바가 바로 그 최초가 되는 거야. 정말 굉장해.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하여튼 엘이 멀쩡한 정령계를 다 버려 놨다니까. 너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
노려보는 눈길을 느끼지 못하는 척, 나는 꿋꿋이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미네르바의 모습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가는 팔과 손가락이 생겨났고, 이어서 두 다리가 만들어졌다. 아직 투명하다 싶은 몸 위를 새하얀 옷자락이 덮었을 무렵,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광대하게 몰아치던 바람이 멈췄다. 드디어 탄생의 과정이 마무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