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41화 (241/608)

제241화

주인이 없는 고즈넉한 바람의 영역에서 우리들은 하룻밤을 꼬박 머물렀다. 왕이 사라졌어도 그 휘하의 바람의 정령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평소와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듯한 적막함과 공허감이 수시로 차오르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단순히 지인을 잃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상실감만은 아니었다. 세상을 구축하는 중요한 틀 하나가 빠진 것 같은, 몹시 허전하고 불안정한 감각이 느껴졌다. 실제로 정령계의 균형을 이루는 주축 하나가 사라진 상태인 만큼 당연한 현상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지 않는 동안에도 다들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거겠지. 뭐든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더니, 반대쪽 입장이 되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지독한 일이었는지 실감이 들었다. 심지어 나 때는 남은 물의 정령들마저 전부 소멸한 상태였으니 지금보다 더 비틀린 균형에 시달렸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낭떠러지 끝에 한계까지 떠밀린 기분이 아니었을까. 트로웰이 나를 보자마자 대뜸 접촉을 해 온 것도, 이프리트가 시비부터 건 이유도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직접 그 시절을 겪은 심정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래선지 어느 정도 슬픔이 진정되고 나자 두 정령왕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번 미네르바는 제대로 태어나겠지? 또 그런 일 생기기만 해봐.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하하, 설마. 생각이 너무 지나쳐, 이프리트. 명계에 머저리들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얼간이 같은 짓을 또 할 리가 있겠어?”

이를 가는 이프리트에 이어, 상큼하게 웃는 얼굴을 한 트로웰의 입에서도 과격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며칠 사이에 새 미네르바가 태어나지 않으면 명계와 전쟁이라도 불사할 기세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일단 건너가지도 못한다), 어쨌거나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두 정령왕들 사이에서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지난 재앙에는 나 역시 피해자라고는 하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한 이상 죄인이 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내내 우울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분위기가 더 나았다. 특히 트로웰이 평소대로 돌아온 게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이프리트와 어울려 한창 전쟁 계획을 세우고 있는 트로웰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은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눈물을 그치지 못해서 한참이나 애를 먹었었다. 그대로 슬픔에 먹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어느 정도 진정한 후에도 얼굴에 그늘이 사라지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완전히 좋아진 것 같았다. 실컷 울고 나서인지 어딘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색을 살핀다는 것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걸까. 시선을 느꼈는지 트로웰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향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다시금 안심했다. 노골적으로 안도하는 나를 보고 그는 더 짙게 웃었다.

“일단 지금은 명계를 믿고 기다려볼까? 제대로 승계가 이뤄진다면 앞으로 2,3일 안에 새 미네르바가 태어날 거야. 그때까지 시간도 때울 겸 느긋하게 지난 이야기나 하자.”

“지난 이야기?”

“그동안 다들 흩어져 있었잖아. 특히 엘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어. 얼마 전에 마신을 만났다면서? 그의 결계에 갇혔었다고 들었는데 좀 어때?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어?”

아직 이실직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 내 상황을 파악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걱정스럽게 살피는 눈길에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괜찮아. 난 멀쩡해.”

“그래? 다행이다. 마신의 장난은 워낙 악명이 높아서 말이야. 한동안 물의 기운이 불안정하길래 걱정했는데 설마 그가 난입했을 줄은 몰랐어. 미안해, 엘.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니야, 미안하긴.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이프리트가 전령을 보내왔거든.”

“어? 이프리트?”

“그에게 대강의 전말은 들었어. 마왕이 금기를 어긴 정황이 드러났다는 것, 관련 사건을 마신이 개인적으로 조사 중이라는 것도. 지금 그와는 연락이 안 되는 중이라지?”

“응, 그렇긴 한데…….”

이프리트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을 보니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내 앞에서는 태연하게 굴더니, 돌아서서는 부리나케 트로웰부터 찾았던 모양이다.

“이프리트에게도 말해 뒀지만, 그 건에 관해선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 하지만 마신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만이라면. 엘, 네가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 내가?”

“그에게서 문장을 받았지? 네게 마신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고 부랴부랴 장갑을 벗었다. 손등을 감싸고 있던 얇은 천(정확히는 비늘이지만)을 치우자 그 아래 자리 잡고 있던 마신의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을 본 트로웰이 살짝 안심한 얼굴을 했다.

“응,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정말?”

“문장은 신과 연결되는 통로나 마찬가지거든. 신의 힘으로 유지되는 거라서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게 가장 먼저 징후를 보였을 거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문장을 빤히 살펴보았다. 괜찮다는 트로웰의 말처럼 색이나 형태 모두 처음 받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구나. 아직 아무 일 없는 거구나. 큰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를 보고 이프리트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것 봐.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지? 괜히 유난 떨기는.”

“……네가 할 소리냐. 트로웰한테 바로 자문부터 구한 주제에.”

“뭐, 뭐가! 그것도 네가 하도 걱정하니까 그런 거지!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였다고!”

“아, 그러십니까.”

“그래! 내가 얼마나 속이 깊은지 이제 좀 알겠어? 하아, 정말이지 난 정말 너무 다정해서 탈이라니까. 역시 네 엄마가 될 자격을 가진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아.”

“…….”

아무튼 말이나 못하면 얄밉진 않을 텐데. 너무 기가 막히니 오히려 화낼 의욕도 사라졌다. 할 말을 잃고 건조한 표정만 짓고 있는 내 옆에서 트로웰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쨌든 마신이 건재하다니 한시름 덜었어. 마왕의 영향력 또한 여전하다고 하니 결국 둘 다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네.”

“그러게. 왜 아직도 잠잠하지?”

단조롭게 중얼거리는 트로웰의 말에 이프리트가 동의하며 의문을 표했다. 워낙 진지한 사안이라서인지 대화를 주고받는 두 정령왕의 얼굴이 심각했다.

“주술이 사실이 아니었던 걸까? 혹은 조사에 진척이 없는 상황이라거나.”

“그럴 수도 있고, 반대로 더 최악인 상황일 수도 있지.”

“최악이라니?”

“이미 각성이 너무 진행돼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든가.”

“……설마. 말도 안 돼. 마신이 직접 나섰는데 손을 쓸 수가 없다고?”

“그거야 모를 일이지. 다른 것도 아니고 악신과 관련된 일이잖아. 악신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주신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 보는데.”

이프리트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주위를 감도는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나는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두 정령왕의 눈치만 살폈다.

“어쨌든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라도 신계에선 가능한 한 이 일을 은폐하려 할 거야. 여기까지 파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로선 큰 수확인 셈이지. 엘에게 감사해야겠는걸.”

“응? 나?”

생각지 못한 치사에 당황하자 트로웰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 쪽에선 신계에서 정보를 주지 않으면 그곳의 상황을 파악할 방법이 없잖아. 엘, 네가 지닌 문장이 아니었다면 마신의 안위조차 확인하지 못했을 거야.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 봐야 신전의 동태를 살피는 것뿐인데, 지금 마신전에는 제대로 된 신관도 없으니까.”

“아, 하긴…….”

“아마 마신이 네게 문장을 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가장 확실한 행적을 남겨준 거지. 자신의 안위를 바로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손등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변덕을 부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카노스는 이런 부분까지 전부 계산에 넣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소 종잡을 수 없긴 하지만 역시 미워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신의 문장이란 거, 그저 사제의 표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훌륭한 교류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 거였네. 고마워, 엘. 덕분에 나도 큰 깨달음을 얻었어.”

“아니, 인사를 받을 정도까지는……. 나는 그냥 주니까 얼결에 받은 것뿐인데.”

“하하, 그게 대단한 거야. 말했다시피 문장은 사제의 표식이란 인상이 강해서 보통은 준다고 해도 거절하거나 불쾌해하기 마련이거든. 하지만 엘, 너는 그걸 호의로 받아들였잖아. 아마 마신도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문장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그, 그런가?”

“응, 타인을 믿고 그 의도를 섣불리 의심하지 않는 점.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트로웰의 얼굴이 나를 무척 대견해하는 듯해서 나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난 여행 내내 난 줄곧 그의 의도를 의심했고, 쉽게 흔들렸으며, 끝까지 믿어주지 못했다. 뜻하지 않은 칭찬이 오히려 질책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엔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늘 한결같은 시선이다. 돌이켜보면 그처럼 내게 다정했던 존재는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가슴이 무거워졌다.

“저기, 트로웰. 나 너한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미안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두서없이 꺼낸 말이 당황스러웠는지 그가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옆에 있던 이프리트 역시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분이니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세 좋게 사과를 건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다음 말을 이으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입술이 자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엘?”

내가 선뜻 말을 잇지 못하자 주시하는 눈길이 더 짙어졌다. 나는 크게 심호흡한 다음 떨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이미 결심했으면서도 망설이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난 지금 무서운 거다. 그것이 어떤 진실을 드러내든, 모든 이야기가 끝나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채 떨쳐내지 못한 불안감이 여전히 집요하게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해.’

여기서 물러서면 나는 날 괴롭히는 생각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쭉 그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실망을 사는 게 더 나았다.

“실은 나, 너한테 묻지도 않고 의심부터 했어.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의심이 풀리진 않은 것 같아.”

“흐음? 뭘 의심하는데?”

“그, 그게……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냐면…….”

나는 있는 힘껏 용기를 쥐어짜서 지난 일들을 고백했다. 시벨리우스를 만났던 과정, 그에게서 들었던 오래전 과거의 이야기. 알리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알게 된 일들이 마치 짜 맞춘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 그 약해진 심리를 파고들어 카노스가 짓궂은 장난을 쳤고, 이후 해결된 상황까지.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흥미롭게 듣던 트로웰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갔다. 그 모습에 덜컥 겁이 나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나는 꿋꿋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된 거야.”

“…….”

모든 설명을 끝마쳤을 땐 후련하면서 지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힐끗 트로웰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내 말이 끝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잠깐! 그렇다면 뭐야! 너 거기서 마신만이 아니라 엘뤼엔도 만났던 거야?”

오히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이프리트 쪽이었다. 누가 불의 정령왕 아니랄까 봐 태울 듯이 번뜩이는 눈빛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

“나한텐 그게 제일 중요해! 너 자꾸 나 몰래 엘뤼엔 만나고 그럴래? 게다가 지금까지 그 사실을 숨겼다 이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윽, 일부러 숨긴 거 아니야.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 아하, 너한테 내 존재는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네. 네 깊은 속사정 같은 건 털어놔도 그만, 안 털어놔도 그만인 대상이다, 이거야?”

“뭐?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으나 이프리트의 굳은 얼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단단히 상한 것 같았다.

“오해야, 이프리트. 나는 진짜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흥, 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그래? 농담이야, 바보야.”

“어?”

갑자기 달라진 말투에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프리트는 약간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튼 너란 애는 정말이지……. 너무 남의 기분을 살피는 거 아니야? 이런 말에 진심으로 위축되지 마.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괜히 찝찝해졌잖아.”

“어? 그럼 화 안 난 거야?”

“위급 상황이었고, 시시콜콜 털어놓을 이야기는 아니잖아.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거로는 화 안 내. 엘뤼엔과의 유대감을 마음껏 과시하는 게 얄미워서 쥐어박아 주고 싶지만, 그건 또 별개의 기분이니까.”

“……정말 화 안 난 거 맞아?”

“왜? 진짜 화내 줄까?”

“아하하, 아니.”

빠르게 고개를 젓자 사납게 치켜 올라가던 그의 눈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최근 들어 분명하게 느끼는 건데, 정령왕들 사이에 서열이 없다는 건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 자리를 수치화할 수 있다면 아마 저 밑바닥 어딘가쯤을 구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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