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눈짓을 보내자 알리사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녀는 내가 아까 짚어준 위치―가장 지반이 약한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멀든, 여기 아래부터 성벽 쪽을 쭉 따라 뿌리를 뻗어줘.”
콰드득! 쿠웅!
그녀의 부탁을 듣자마자 멀든은 바로 바닥에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마나로 인해 알리사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나는 그녀가 버티기 쉽도록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뿌리가 충분히 뻗기를 기다린 후 알리사는 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깊게 파고들어서, 큰 균열을 만들어!”
쿠궁! 쿠구구궁!
이번에도 멀든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땅의 기운이 더 짙어졌고, 멀든의 뿌리가 마구 땅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성벽 쪽은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요동쳤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뭐, 뭐야!”
“땅이 흔들린다!”
“지진! 지진이다!”
위쪽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기분일 것이다.
‘지반을 무너트려 성벽을 허문다.’
이게 바로 나와 알리사가 세운 계획이었다. 건물이라는 것은 땅을 기반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지어져도 지반이 무너지면 버티지 못한다. 마법 방어진은 외부의 힘을 막기만 할 뿐, 땅속까지 방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바깥의 공격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 틈에 허를 찌르자는 생각이었다. 마침 땅의 정령은 이런 일에 활약하기에 가장 최적의 존재였다. 중급 정령이라곤 해도 지반 한 부분 정도는 망가트릴 수 있다. 다음으로 이어가는 부분은 내가 도우면 되니 딱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우르릉! 콰드드득!
오래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부터 굵은 균열이 생겨났다. 나는 물을 끌어들여 압력을 더 강하게 받도록 했다. 덕분에 가속화되는 속도를 이기지 못한 바닥이 다른 쪽에도 마구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균열은 빠른 속도로 성벽 전체로 뻗어 나갔다.
한번 무너진 균형은 도미노처럼 다른 부분까지 끌어내린다. 이젠 멀든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비틀어지는 중이었다. 내가 물을 끌어들인 덕분에 더 빠르게 진행되기도 했다.
성벽 위를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다수 몸을 피한 듯했다. 성벽을 파괴하더라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기에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그때쯤 알리사는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에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체력을 보충해준 다음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지막이야, 알리사. 이제 마무리하자.”
“응! ―멀든!”
그녀의 힘찬 신호에 지하를 장악하고 있던 멀든이 바로 응답했다. 한껏 파고들었던 뿌리를 일시에 회수한 것이다. 그만큼 빈 공간이 생기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지면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웅! 쿠콰과과아앙!
더불어 까마득히 높던 성벽이 속절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주변은 자욱한 흙먼지로 가득해졌다. 한 치 앞의 상황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퍼져 있던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시야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뿌옇던 하늘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을 때쯤 나는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드높던 성벽 대부분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처참하게 쌓여 있는 돌무더기의 잔해였다.
“해낸 거야?”
“응, 해냈어.”
함께 같은 광경을 확인한 알리사가 지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세워진 이래 단 한 번도 적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는, 철옹성 같은 요새가 역사에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 *
이후의 상황은 상당히 싱겁게 진행됐다. 성벽이 무너진 충격이 컸는지 성 안의 병사들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모든 공격이 멈췄고, 중간 지점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우리 진영의 병사들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당도한 사람은 카웰 공작이었다. 그는 페리스의 도움을 받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호수를 건너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혼비백산하던 상대 병사들은 카웰 공작을 발견한 즉시 전의를 전부 상실했다. 성벽이 사라짐으로써 그것을 기반으로 세워진 마법 방어진 또한 기능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드 마스터인 그의 등장은 토끼 우리에 배고픈 사자가 나타난 격이었다. 선두에 있던 자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리자 다른 자들도 일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이후 창백한 얼굴을 한 두 영주가 항복과 충성의 서한을 바침으로써 전투의 종결을 알렸다. 나중에 들어 보니 공성전 역사상 가장 빠른 함락이라고 했다.
항복한 두 영주는 황제에게 맞설 의도는 없었으며, 오히려 그를 클모어에서 구해내려 했다고 주장했다. 카웰 공작이 황제의 실종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중이라 그것을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반역죄까지는 적용되지 않아 즉결 처분은 면했으나 영지전에서 패배한 자의 규율대로 포로의 신분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사나가 황성에 복직하고 나면 작위가 거둬지고 평민으로 강등될 것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영지와 백성들은 그대로 클모어에 귀속되었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주인만 바뀌는 것뿐이지만, 인사의 재편성은 필요하기에 한동안은 내부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카웰 공작은 그 일을 부관에게 위임한 후 그 자신은 바로 다음 전투를 위한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첫 승을 올리긴 했으나 이제 시작인 전쟁이었고, 앞으로 거쳐야 할 전투가 더 많았다. 병사들에겐 충분한 휴식과 승전의 기쁨을 누리게 하면서도 지휘관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똑같은 일상을 유지했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소소한 변화들이 생겼다. 먼저 작전 회의에 나와 일행들도 참여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정해진 결과를 전달만 해주는 형식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직접 회의에 참여해 발언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들의 품행에 대한 건 여전히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이전만큼 질색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특히 알리사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리에 있어도 모를 정도로 관심을 주지 않던 자들이 이젠 알리사를 발견하기만 하면 경어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직 소녀이지만 이번 승전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존재이므로, 기사에 준하는 대우를 하기로 했다는 것 같았다.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거의 우상처럼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승리의 여신 스피어의 딸 알리사!’
벌써부터 거창한 호칭까지 붙은 모양이었다. 진영을 지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이름과 함께 찬양가가 울려 퍼지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성벽을 무너트린 게 정말 인상적이긴 했나 보다. 의도했던 일이긴 한데,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더 뜨거워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정말 창피해서 미치겠어.”
그러나 당사자인 알리사는 아주 괴로워했다. 사람들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짓궂은 일행들은 피식 피식 웃었다. 나 역시 웃으며 말했다.
“네 공로를 칭송하는 거잖아. 그냥 좋게 생각해.”
“그치만 나 혼자 한 게 아니라 엘 님이랑 같이 한 거잖아. 그것도 사실대로 말하면 엘 님이 거의 다 한 거고! 근데 정작 나 혼자서 한 일처럼 칭찬 받으니까 너무 부끄럽고 속상해.”
“속상할 게 뭐 있어. 내가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건데. 그리고 내가 도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일이 대단하지 않은 건 아냐. 당당하게 자랑스러워해도 돼.”
“그래 봤자 난 중급 정령사에 불과한걸.”
“그래 봤자가 아니라 굉장한 거야. 주위에 상급 정령사만 있어서 네가 실감을 잘 못하는 것 같은데. 원래는 이게 이상한 거고, 보통 네 나이엔 하급 정령사가 되기도 쉽지 않아. 타고난 재능만으로 치면 너보다 뛰어난 정령사는 없을걸?”
“정말?”
“그렇다니까. 오죽하면 트로웰이 직접 관심을 보였겠어.”
“응? 트로웰이라면 땅의 정령왕 말이야? 땅의 정령왕이 나한테 관심을 보였다고?”
“그래, 그래서 널 만나러 온 거겠지. 네 재능을 알아보고 정령술을 익히게 하려고.”
“날 만나러 와?”
상기된 얼굴로 듣던 알리사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한테 동화책을 줬던 그 오빠가 트로웰이었다고?”
“어? 내가 말 안 했었나?”
“안 했어! 지금까지 그런 내색은 한 번도 없었거든?”
“아…….”
그러고 보니 그 사실을 알았을 당시엔 아직 내 정체도 밝히지 않았을 때였다. 선뜻 아는 척하기 조심스러웠던 시기라 말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이 떠올랐다. 이후에는 워낙 정신없는 일들만 연이어져서 알려준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 깜빡했다.”
난처한 기분으로 사과를 건네자 알리사의 얼굴은 더 멍해졌다. 느닷없이 알게 된 진실이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언젠가는 소환하겠다고 벼르고 있던 땅의 정령왕의 정체가 알고 보니 가슴 속에 고이 품어둔 첫사랑 남자아이인 셈이었으니까.
“세상에……! 믿을 수 없어! 그 신비롭고 아름다웠던 오빠가 바로 트로웰 님이었다니!”
그녀의 탄성에 시벨리우스와 라피스의 얼굴이 똑같이 일그러졌다. 마치 못 먹을 걸 삼킨 듯 불쾌감으로 치를 떠는 모습이었다.
“누가 신비롭고 아름다워? 젠장, 귀가 더럽혀진 것 같아. 살다 보니 별 소리를 다 듣는군.”
“어릴 때의 기억은 미화되는 법이지. 인간이라면 더더욱.”
“하긴, 겉모습에 미혹되기 쉬운 종족이니까. 조금만 잘해 줘도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더라.”
“인간들이 너무 순진해서 그래.”
심각하게 주거니 받거니 의견을 모으는 두 사람을 보니 이제 절친이 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 자신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면 트로웰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전후 사정을 모르겠구나. 무슨 이야기냐면…….”
“아니, 대충은 알겠어. 이미 들은 말도 있고.”
“어? 누구한테?”
“누구겠냐. 당연히 트로웰 본인이지.”
“정말요?”
그렇지 않아도 흥분해 있던 알리사의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평소엔 겁나서 라피스 쪽은 잘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지금만큼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알리사를 라피스가 희귀동물을 대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오빠…… 아니 트로웰 님이 저에 대해 말했어요? 절 기억하고 있대요? 또 뭐라고 했어요?”
“정령왕의 기억력이면 잊는 게 더 어려울걸? 너랑 이사나 사이에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기대하던데.”
“네? 저, 저랑 이사나 씨요?”
트로웰도 그들이 지닌 운명의 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지 못한 말에 놀랐는지 알리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두 뺨은 사과처럼 붉어진 채였다. 라피스가 은근한 미소를 짓고 그녀의 모습을 빤히 훑어 내렸다.
“뭐, 잘해 봐. 나이 차도 적당하고 좋은 커플이 될 것 같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랑 이사나 씨는 아직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흐응. 아직, 이라고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군. 인간들은 금방 자라니까 ‘아직’이 ‘곧’이 되는 날도 멀지 않겠는걸.”
“그,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응? 뭐가 아닌데, 알리사? 무슨 얘기야?”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이사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얼굴을 보자 그렇지 않아도 붉었던 알리사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것도 아냐!”
“어어? 잠깐, 알리사?”
알리사는 이사나를 밀치고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이사나가 우리에게 양해의 표시를 하곤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커플 지옥 솔로 천국.”
“무슨 주문이야, 그건?”
“주문이라면 주문이지. 내 인생을 가장 감미롭게 만든 명언 같은 거랄까.”
후후후, 음침하게 히죽거리자 라피스가 뭘 잘못 먹었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근데 트로웰한테 저런 얘기는 언제 들은 거야?”
“별로 오래되진 않았어. 그 녀석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었거든.”
“어? 그래? 나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수도로 출발했던 거 아니었나?”
“안 갔어. 동료가 경비를 잃어버려서 빈털터리가 됐다나. 별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머물고 있던데.”
“헉…….”
당시 경비가 든 주머니는 헤롤이 보관했던 걸로 기억한다. 소매치기를 당할 사람은 아니니 어딘가 돌아다니다 부주의하게 흘렸을 것이다. 샴페인 용병단은 유명한 만큼 벌이가 좋은 편이다. 그 수입이 전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잃어버리다니, 살아 있긴 한 걸까? 워낙 괄괄한 성정의 사람들이다 보니 헤롤의 목숨이 매우 염려스러웠다.
“그럼 용병길드 승급 시험도 못 치렀겠네. 올해엔 금패를 받을 거라고 했었는데.”
“그딴 거 알 게 뭐야. 어쨌든 덕분에 난 그 녀석한테 계속 시달렸다고. 로드도 안 하는 잔소리를 얼마나 해대던지.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전전긍긍하질 않나.”
“트로웰이 날 걱정했어?”
“물의 느낌이 좋지 않다는 둥, 네 기분이 저조한 것 같다는 둥, 사서 고민하던데?”
“……그랬구나.”
내가 심리적으로 한창 불안정했을 때 트로웰도 그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가 날 걱정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때쯤 난 그의 의도를 의심하기 바쁜 상태였던지라 조금 미안해졌다.
난 왜 그동안 혼자서 고민하고 웅크리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해답은 이렇게 명확히 보이고 있었는데. 과거의 엘이 실존인물이든 그렇지 않든, 이제 그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오해부터 쌓은 건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잘못한 거다. 겁이 나서 사실을 확인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그만큼 상대를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엘뤼엔에게 그 사실을 지적받았을 땐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온몸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가 날 걱정했다는 말을, 그동안 보여준 애정을 믿는다. 조만간 트로웰을 만나서 사과해야지. 그와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리고 나니 갑자기 다른 정령왕들도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다들 한자리에 모여본 지도 꽤 오래됐다.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가장 챙기지 않게 되는 것 같았다. 주기적으로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보자고 해볼까, 제법 나쁘지 않은 구상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문득 가슴 속에서 쿵, 작은 진동이 울렸다.
“……!”
일순간 눈앞에 보이는 모든 광경이 한꺼번에 까맣게 점멸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것은 마치 까마득한 하늘에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뭐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한번 느낀 감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지금, 아주 잠깐 세상의 ‘숨’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