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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34화 (234/608)

제234화

화창한 햇살이 가득한 정원은 여름 중반이란 시기에 걸맞게 온통 짙푸른 색으로 가득했다. 강렬한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공기는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흉포하기만 했다. 이런 날엔 성인들조차 버텨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나무들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에겐 조금도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어디에 계세요, 레이 도련님!”

하녀의 복장을 한 여인들이 애타게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분주한 발걸음이 지척까지 이어졌지만, 그녀들은 나무 아래 숨어 있는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의 그림자는 수풀 근처만 잠시 맴돌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이― 레이는 하녀들의 모습이 멀찍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와도 돼.”

불편하게 굽혔던 몸을 조금 편 후 레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블라우스의 안쪽에서 작고 투명한 요정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린.”

속삭이듯 부른 음성에 린이라 불린 요정이 방긋 웃었다. 레이의 품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요정은 성인의 손바닥 크기만 했다. 상체는 솜사탕처럼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으나,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로 되어 있었다.

‘나이아스.’

다른 사람들에게 요정은 그런 호칭으로 불린다고 했다. 그 이름도 예뻤지만 레이는 자신이 지어준 ‘린’이란 이름을 더 좋아했다. 린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가워.”

손바닥에 올린 린은 얼음처럼 차갑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차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한겨울 강물처럼 시렸다가도 어떨 때는 막 데운 찻물처럼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대체로는 딱 품에 넣고 다니기 좋을 만큼 따뜻한 편이었다. 언뜻 보기엔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 같지만 린이 몸의 온도를 바꾸는 것엔 단 한 가지 규칙이 있었다. 그건 전부 레이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금 린의 몸이 차가운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레이는 그 호의를 마음껏 받아들여 두 뺨 가득 달아오른 더위를 식혔다.

“넌 정말 신기해. 어떻게 이런 걸 할 줄 알아? 정령이라서 그런 거야?”

린이 나이아스라는 존재라는 걸 알려줬던 남자는 또한 린이 물의 정령이라고도 했다. 레이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요정과 정령의 차이점을 잘 몰랐다. 하지만 린이 움직일 때마다 그 몸에서 물방울이 톡톡 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물고기의 다리를 갖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레이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해맑은 질문에 린은 말없이 웃어 보이기만 했다. 레이가 기억할 때부터 린은 말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입을 벙긋거리긴 했지만 발음을 읽어내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린의 표정이 워낙 풍부해서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레이는 품 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목걸이 끝에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 안에는 예쁜 금색의 펜던트가 들어있다.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넣어둔 것이다.

“알고 있어, 린? 이 목걸이 말이야. 난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귀인이 나한테 준 선물이래. 언제고 때가 되면 이 목걸이가 그분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어 줄 거라고 하셨어. 만나게 되면 꼭 고마웠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는데, 어떤 분이실까? 린은 그분을 아는 거지? 넌 이 목걸이 안에서 나왔으니까.”

레이는 하루 중에서 린과 교감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린을 부르면 이상하리만치 몸에 기운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시간은 항상 5분에서 10분 정도로 짧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레이는 그 점이 항상 아쉬웠다.

“난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워. 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면 아저씨가 싫어해. 너에 대해서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하고, 목걸이도 꺼내지 말라고만 해.”

레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원 구석에 숨어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린을 부르고 싶은데 사람이 많이 오가는 저택 안에서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조심성 없이 방 안에서 린을 꺼냈다가 집사 루벤한테 들켰다. 그때 레이는 남자한테 불려가 꽤 오랜 시간 훈계를 들어야 했다.

“왜일까? 린, 너는 나를 구해줬는데.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난 다 봤어. 마차가 나랑 엄마를 덮칠 때, 네가 이 목걸이에서 나와서 나를 감싸줬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때 죽었을 거야.”

레이는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행인이 많은 거리에 마구잡이로 마차 한 대가 돌진해 왔다. 재빠르게 흩어진 사람들은 화를 면했지만, 아이와 걷고 있던 여인이 그 속도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이어진 사고는 레이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고, 그를 이루고 있던 전부가 달라졌다.

“하지만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갈 곳 없는 나를 데려와서 이곳에서 지내게 해줬는걸. 조금 무섭긴 하지만.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동물이랑 아이에게 친절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전에 엄마도 그랬어.”

익숙한 호칭을 입에 담자 그리운 마음이 차올랐다. 레이는 목걸이를 다시 품속에 갈무리했다. 두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엄마 보고 싶다.”

이곳의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집은 굉장히 넓었고 매끼마다 풍족한 식사가 나왔으며,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그를 데려온 남자는 무뚝뚝했지만 레이의 상태를 늘 세심히 살펴봐 주었다. 가끔은 사탕과 초콜릿 같은 달콤한 것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기쁜 마음이 들수록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존재에 대한 상실감도 더 커졌다. 엄마도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더 괴로웠다.

우울해하는 레이의 곁에서 린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워하는 그의 작은 요정에게 레이가 억지로 웃어 주었을 때였다.

“흐음, 길을 잃은 꼬마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

머리 위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든 레이는 바로 앞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를 발견하고 몸을 움찔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사람이 서 있는데도 다가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 더운 날씨에도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이 남자의 옷차림은 특히 눈에 띄었다. 겉옷은 이음새 없이 전부 통짜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치 여인들이 입는 옷처럼 옷자락이 길었다. 장식이라고는 어깨에 두른 망토와 소매를 비롯한 옷의 밑단에 새겨진 붉은 자수가 전부였다. 이런 형식의 옷차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전의 엄마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신관이다.

“누, 누구세요?”

낯선 얼굴에 겁먹은 레이가 엉덩이를 뒤로 뺐다. 반대로 린은 그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친구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린!”

레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잔뜩 경계하는 작은 정령의 모습에 신관의 복장을 한 남자는 이채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급 정령인가? 이건 꽤 놀랍군.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벌써 정령사라…….”

얼굴 가득 흥미를 드러낸 남자가 쓰다듬으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레이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레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레이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신관의 뒤편에서 친숙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가 늘 아저씨라 부르는 존재, 카리브디스 공작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안도감이 치솟아 올랐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레이는 얼른 그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신관 쪽에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더 빨랐다.

“아저……!”

“오랜만이군, 파이런. 그동안 잘 지냈나?”

“……!”

레이는 놀란 얼굴로 신관과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가장 많이 당황한 건 카리브디스 본인이었다. 아이를 찾으러 나온 곳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더불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인가 했지만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이 둘일 리는 없었다. 사적으로만 쓰는 호칭으로 그를 부르는 이 또한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유카르테 란느 스왈트. 제국의 대공이자 섭정왕이며, 그의 유일한 하늘인 남자. 말끔한 얼굴로 웃는 대공을 바라보다 카리브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는 어쩌신 겁니까?”

“뻔한 걸 묻는군. 난 혼자 다니는 게 더 안전해. 호위 따위 둬 봤자 오히려 어설프게 시선을 끌기나 할 뿐이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이런.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할 기세인가? 내가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나 보지?”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나 전하께서 직접 발걸음하실 건 없으셨습니다. 부르셨다면 제가 찾아뵈었을 겁니다.”

“응, 그렇겠지. 하지만 직접 보고 싶었거든.”

“무슨…….”

“같이 불러 봤자 그대 성격에 데려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대공의 시선이 아직 나무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레이를 향했다. 카리브디스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가 데려온 아이에 대한 소문이 어느새 대공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카리브디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를 한 번, 그리고 그의 옆을 맴돌고 있는 물의 정령을 한 번 보았다. 하필이면, 이란 생각이 얼핏 스치는 것을 깨닫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설마 주군을 대상으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평생에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달라진 건 그것만이 아니다. 예전엔 대공이 불쑥 찾아오면 걱정이 되긴 했어도 반가운 마음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별 없이 찾아온 그에게 곤혹스러움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 말대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까지 오랜만이었던가? 카리브디스는 속으로 날짜를 가늠해보다 조금 놀랐다. 마지막으로 입궁했던 것이 벌써 한 달은 훌쩍 넘었다. 근래 들어서는 대공이 그의 알현을 받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얼굴을 본 것은 거의 몇 달만이었다. 그런데 직접 날을 세어보기 전까진 시간이 그렇게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대공의 검이 된 이후로 그는 부름을 받으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항시 몸을 긴장시켜 왔었다. 주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서서 호출이 오기만을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그는 대공의 연락을 전혀 기다리지 않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호출이 없었는데도 초조하지 않았던 것도 처음이었다. 카리브디스는 그 모든 것들을 떳떳하지 못한 제 행동 탓이라 여겼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곳에 있다. 그는 복잡한 기분으로 레이를 응시했다. 황실의 문양이 찍힌 목걸이를 지니고 있는, 어쩌면 황제와 인연이 닿았을지도 모르는 아이. 본래 그가 레이를 데려온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황궁으로 데려가 조사하고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려고 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대공에게 보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데려가지 못했을까.

카리브디스는 드러나지 않게 입술을 악물었다. 바람의 검 블레스터에 대한 것도, 레이에 대한 것도. 최근엔 대공에게 숨기는 것만 늘고 있었다. 이런 행동이 자신답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생각할 뿐 행동을 제어하진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에게 아이를 들킨 김에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 이리로.”

그의 손짓에 서둘러 몸을 일으킨 레이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카리브디스는 몸을 굽히고 앉아 아이의 몸에 붙어 있는 풀과 먼지들을 조심스럽게 털어내 주었다.

“인사 드리거라. 대공 전하시다.”

높은 사람 앞에 선보이는 자리에서 나올 법한 무난한 말이 이어졌다. 레이는 쭈뼛거리는 얼굴로 눈치를 보다가 고개만 꾸벅 숙였다. 아이다운 천진한 행동에 카리브디스가 사죄를 표했다.

“아직 예법을 가르치지 않아서 많이 서투릅니다.”

“아니, 괜찮아. 이러고 있으니 그대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는군. 그대도 기억하고 있나? 그때 그대는 저 아이보다 더 심했어. 불한당을 보듯이 나를 잔뜩 노려보는 게, 꼭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새끼 같았지.”

“……글쎄요, 전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하하, 그대도 그런 농을 할 줄 아는군.”

즐겁다는 듯 유쾌하게 웃는 대공은 그리 기분이 상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의 시선은 탐색하듯 레이를 훑고 있었고, 카리브디스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기묘한 분위기였다. “루벤에게 가 있거라.” 카리브디스가 레이에게 나직하게 일렀다. 이 자리가 몹시 불편했던 아이에겐 가뭄의 단비와 같은 말이었다. 얼른 고개를 끄덕인 후, 레이는 곧장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에 또 보자, 레이.”

그 순간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끈적이는 것처럼 달라붙었다. 레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냥 평범하게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힐끔 돌아보자 대공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듯한 선량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이하리만치 무섭게 느껴졌다. 레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서둘러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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