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33화 (233/608)

제233화

힘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검이 알고 보니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을 줄이야. 망설이는 이사나에게 내가 떠맡긴 거나 다름없었던지라 머릿속이 더 아득해졌다. 아무리 봐도 마검이라고 수군거리더라니, 이렇게 되면 친위 기사들에게 선견지명이 있던 셈이다.

지금껏 어느 한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는데 그들 쪽으로 급격히 마음이 기울었다. 어쩌면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위험을 감지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시 던전에 던져두고 올까.

사정이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이사나에게 위협이 되는 건 전혀 별개의 일이다. 설령 대상이 이사나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검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차마 파괴할 수는 없으니 있던 곳에 돌려놓고 다시 봉인하는 게 최선책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이프리트는 도리어 적반하장 식으로 나왔다.

“너 설마 이제 와서 그 불쌍한 아이를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이미 주인까지 맞이한 아이야. 정령 계약과 마찬가지로 서로 동의하에 협의된 관계라고. 신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폭주한다며!”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그렇게 쉽게 폭주하진 않아. 너무 심각하게 볼 건 없어.”

“이게 지금 심각하지 않게 생겼냐!”

차라리 말을 하지나 말지. 속을 뒤집을 대로 다 뒤집어놓고 괜찮다고 달래는 게 더 열 받았다.

이건 단순히 상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프리트, 저 녀석의 성격에 결함이 있는 거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결함!

“폭주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야. 평소에 관리만 잘하면 된다니까?”

“……좋아. 그럼 어떤 일에 폭주하는 건데?”

“알고 있겠지만 이그니스처럼 자아를 가진 검은 소유주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마검화가 되면 이게 좀 더 극단적이 되는 것뿐이야. 한마디로 주인의 정신이 불안정할수록 위험해진다고 보면 돼. 물론 이것도 아주 심한 상태에 한에서야.”

“예를 들면?”

“평생의 신념이 무너질 만큼 큰 좌절과 절망을 겪는다거나, 인격이 달라질 정도로 이상한 사상에 사로잡힌다거나. 자기 자신까지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악독한 마음을 품는 경우 말이야. 다행히 네 계약자는 온화하고 성정이 바른 아이 같으니 그런 일은 거의 없지 않겠어?”

“으음, 그렇긴 한데…….”

“그것 봐. 그 점만 봐도 이미 이그니스가 폭주할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해.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야. 온화한 주인과 함께하면 반대로 상태가 좋아져. 일부이긴 하지만 사기가 정화되기도 해.”

“정화가 된다고?”

“그렇다니까. 물론 그런 만큼 폭주할 가능성은 더 낮아지겠지. 검은 검대로 나쁜 기운을 덜어내서 좋고, 주인은 주인대로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좋고.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옛날엔 미친 마검을 진정시키기 위해 순수한 아이들에게 맡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어. 자, 어때? 들을수록 별거 아니지? 그런 의미에서 네 계약자가 그의 주인이 되어 줘서 정말 잘 됐지 뭐야.”

……그래, 이제 알겠다. 내게 지도를 줬을 때부터 이프리트가 구상한 진정한 계획이 뭐였는지. 그게 결코 나나 이사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이걸 노렸던 거지?”

“글쎄, 어쩔까나.”

“너 진짜 나하고 무슨 원수졌어?”

당장 달려들어 멱살을 잡지 않은 건 이프리트가 여성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카나로 꾸몄을 때의 그는 어디를 봐도 여성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차마 거칠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인간일 때 들인 습관이 이렇게 짜증 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 하필 내 근처에 있는 정령왕이 이프리트인 건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트로웰과 미네르바가 몹시 그리워졌다.

* * *

수도에서 유명한 저택을 꼽으라면 카리브디스 공작 저를 빼놓을 수 없다. 카리브디스 공작이 워낙 알려진 사람이기도 했지만, 저택 자체도 무척 아름답기로 이름난 편이었다.

작위를 받을 때 선황으로부터 함께 하사받은 저택은 말이 좋아 저택이지 성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지었고, 시공 단계의 시세만으로도 같은 수도 내에 다른 저택을 몇 채는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고가였기에 완성될 당시부터 이미 유명세를 탔다.

먼 지방에서부터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하러 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다르게 정작 저택의 내부는 몹시 단출하게 이뤄져 있었다. 아니, 저택 자체는 꾸미기 좋게끔 충분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나, 거주자가 그것을 활용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게 더 옳았다.

백여 개에 가까운 방들 중에서 제대로 사용되는 건 5개 정도에 불과할 뿐. 백작가만 되어도 수십 명씩 있기 마련인 고용인들이 이곳에서는 고작 10명도 되지 않았다. 귀족들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정원은 내버려 둔 상태로 방치되어 야생의 숲처럼 된 지 오래였다. 카리브디스 공작 본인이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기도 했거니와, 체면치레에는 워낙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택보다 관저에서 머무는 날이 더 많았다.

최소한의 관리로만 유지하는, 인기척조차 거의 없이 고요한 저택은 그저 겉모습만 아름다운 유령의 성에 불과했다. 그래서 집사 루벤은 늘 시름에 잠겨 있었다. 관리자로서 그는 활기차고 사람 냄새가 가득한 저택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빈껍데기 같은 저택의 관리는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안주인이라도 있으면 이 아름다운 저택을 그냥 놀리지 않을 텐데. 무심한 그의 주인은 혼인에도 뜻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해도 주인의 결정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루벤은 슬슬 체념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공작이 외출을 다녀오는 길에 웬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올해 여덟 살이 된, 레이라는 이름의 평민 아이였다. 전후 사정을 아는 마부의 말에 의하면 마차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은 아이라고 했다.

그 아이를 데려온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공작은 루벤에게 아이를 씻기고 먹이라고 말했다. 고아원에 보내기 전에 하룻밤 은혜를 베푸는 건가 싶었는데, 다음날이 돼도 그 다음 날이 돼도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루벤 쪽에서 먼저 운을 떼 보아도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공작은 레이의 처우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든 결단이 빠른 그치고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결정이 유보되는 동안 레이가 저택에서 지내게 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사이 저택에는 아이가 머물 방이 꾸며지고 필요한 비품들이 들어섰다. 심심해하는 레이를 위해 그림책들과 장난감들을 사 오고, 보살펴 줄 고용인들도 추가로 더 채용했다. 물론 대다수 루벤이 한 일이었지만, 공작이 승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가 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적은 곳은 인원이 조금만 늘어도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특히 어린아이란 활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덕분에 삭막하던 저택 안엔 요즘 때 아닌 봄바람이 돌고 있었다. 공작은 레이의 일정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식사만은 늘 같이했다. 때때로 일과를 살피고 어떻게 지내는지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그의 행보가 그렇다 보니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공작이 레이를 양자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한창 말이 퍼지는 중이었다. 물론 루벤은 이미 한참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엔 그 예상을 확신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비록 공작이 함구를 명했기에 지금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정식으로 공표하시겠지.’

그 생각만 하면 루벤은 벌써부터 입이 벌어졌다. 아름다운 안주인이 아쉽긴 하지만 후계자가 생기는 게 어딘가. 뒤를 이을 존재가 생기면 공작도 예전보다 좀 더 저택의 일에 신경 쓰게 될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주인이 평생 쓸쓸히 혼자 살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세간에 알려진 화려한 명성과는 다르게 카리브디스 공작은 고독한 사람이었다. 평생 따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조차 거부하고 돌려보낼 뿐, 사담을 나누는 친우는커녕 주로 교류하는 지인조차 만들지 않았다. 극단적이다시피 남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그를 두고 오만하다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루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의 눈에 공작은 그저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안정을 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작은 아이 하나는 달랐다. 레이에 관한 한 공작은 무엇 하나 그답게 행동하는 것이 없었다. 갈 곳 없는 아이를 불쑥 데려온 것도 그렇고, 머물 곳을 내주고 이것저것 살피는 것도 예전의 그에게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민 출신인 공작은 마신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사제가 아닌 바에야 신전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고아인 경우가 대다수고, 그건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부모를 잃은 레이를 보며 동질감을 느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대공에게만 충실하던 공작에게 그 외의 특별한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공작 본인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레이를 대할 때 그는 의식적으로 다감하게 말하는 편이기도 했다. 덕분에 최근에 들어온 하녀들은 그의 성격이 원래 부드러운 편인 줄 알고 있었다. 고작 두 달 만인데도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레이의 존재는 앞으로 이 공작가에 더 많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루벤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사님!”

한참 즐거운 상념에 빠져 있던 루벤이 정신을 차린 건 다급하게 울려 퍼진 여인의 음성 때문이었다. 돌아본 곳에는 신입 하녀인 로란이 헐레벌떡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풍성한 치맛자락을 종아리까지 걷어붙인 로란을 보며 루벤은 얼굴을 찌푸렸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로란. 게다가 그 단정치 못한 차림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집사님! 큰일 났어요!”

“큰일?”

“레이 도련님이 사라지셨어요!”

“……!”

의아한 표정을 짓던 루벤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방금 전까지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들떠 있던 그에겐 그 무엇보다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도련님이 사라지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아침부터 오전 내내 찾아봐도 보이시지가 않아요. 저택 안 구석구석 전부 다 찾아봤는데 안 계셔요.”

“마구간에는 가본 겐가? 정원 쪽은?”

“마구간에는 가봤지만 안 계셨고, 정원은 지금 찾고 있는 중이에요.”

“으음, 알았네. 일단 나도 바로 찾아볼 테니 자네는 문지기들한테 가서 도련님이 출입문을 지나셨는지 알아보게.”

“예!”

다급해진 두 사람이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그들 근처에 있던 문이 열리더니 불쑥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

안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카리브디스 공작이었다. 루벤은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가장 들키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모든 상황을 노골적으로 노출하고 만 것이다. 하녀 로란은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방금 레이가 사라졌다고 들은 것 같은데.”

“……별일 아닙니다, 공작님. 도련님이 아무래도 정원 산책이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다년의 집사 경력을 가진 그답게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루벤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공작은 시선을 들어 바로 옆쪽의 창을 바라보았다. 정오가 넘어가는 시각이라 태양 빛이 선명하게 직선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산책을 하기엔 너무 더운 시간 아닌가?”

“예,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걱정하던 중이었습니다. 지금 바로 도련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서둘러 건넨 말에 공작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로란과 루벤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 쪽을 향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곳까지 내려다본 그의 시야에, 풀숲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이미 찾은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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