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이미 내가 찾아온 초반의 용건은 희석된 지 오래고, 대화의 내용은 엘뤼엔에 대한 것으로만 가득 찬 상태였다. 내버려 두었다간 몇 날 며칠이고 끝나지 않을 기세라 나는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럼 상황은 다 말해 뒀으니 난 이만 돌아가 볼게.”
“아, 잠깐. 그전에 물어볼 게 있어.”
“으응? 뭔데?”
설마 또 엘뤼엔 얘기는 아니겠지. 그렇게 지겹도록 해놓고 또 뭘 말하려는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행히 이프리트의 용건은 다른 부분이었다.
“공작의 저주를 정화할 때 말이야. 다른 마검을 썼다고 했지? ……그럼 던전에 있던 건 어떻게 했어?”
질문하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던전에 있던 것이라는 건 에고 소드인 파이어 버스터를 말하는 거겠지. 이프리트가 그 검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입장에선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어나려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 다시 눌러앉았다.
“파이어 버스터 말이지? 그것도 일단 가져오긴 했어. 어쩌다 보니 지금은 이사나의 검이 됐지만.”
“그래?”
혹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이프리트는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던 걸 해소했으니 그걸로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 태연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괜찮아?”
“뭐가? 아아, 네 계약자가 검의 주인이 된 거 말이야? 상관없어. 어차피 맘대로 하라고 내어준 건데 뭐. 어떻게 쓰이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게다가 네 인간 계약자라면 성격도 온화하고 신분도 확실하잖아. 검을 함부로 다루진 않을 테니 그 애 입장에선 오히려 잘됐네. 한동안 성검 흉내 좀 내겠어.”
무심한 척 중얼거리는 말투와는 다르게 따뜻해진 눈동자엔 숨기지 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저 이프리트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정도면 정말 많이 아끼긴 했나 보다. 파이어 버스터가 정화에 쓰였다면 당장 티를 내진 않아도 정말 속상해했을 것 같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원망을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다른 마검을 구한 게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비록 성검 대접을 받을지의 여부는 따져볼 문제이긴 하지만.
“그냥 저 검으로 정화하면 안 됩니까?”
심각하고 진지하게 묻던 친위대 기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작 저에 잠입을 막 앞두고 있을 때, 우리를 일부러 찾아와 했던 말이었다. 당시 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가리키던 곳엔 파이어 버스터가 있었다.
<저 쓸모없는 자들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예요? 용사님! 저런 무례한 자들은 당장 내쫓아버려요!>
분노에 타올라 악을 쓰던 파이어 버스터의 목소리도 생생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요즘 기사들과 파이어 버스터는 철천지원수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마주치기만 하면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서로 할퀴고 빈정거리기에 바빴다. 황제의 검과 그 기사들의 관계라 보기엔 너무 험악했으나 개선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일단 그들은 첫인상부터 나빴다. 나는 잠시간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모든 일은 친위 기사들과 일행들이 처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 시작됐다.
이사나와 감격스러운 상봉을 마친 직후, 기사들은 곧장 우리를 찾아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정령사 소녀와 블루 엘프, 그리고 마족으로 구성된 일원을 본 기사들은 잠시 놀란 모습을 보였으나 노련하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황제 폐하를 많이 도와주셨다 들었습니다. 제국민들의 몫까지 합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들의 정중한 인사에 오히려 머쓱해한 쪽은 알리사와 시벨리우스였다. 그동안 말로만 접해서 막연하기만 하던 이사나의 신분을 새삼 실감한 것이다.
<용사와 기사들이라니, 완벽해요! 예로부터 영웅의 곁엔 기사들이 따르는 법이죠!>
바로 그때 파이어 버스터가 신나서 재잘거렸다. 내게 경고를 받은 이후로는 내내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 순간만은 끼어들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었던 것 같았다. 피식 웃고 넘어가려는데 기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퍼졌다. 왜 그러나 싶어서 바라보자 케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어디서 말소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아.”
그때서야 우리들은 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 셈이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건 이쪽이다.”
이사나가 서둘러 허리띠에서 검을 풀어냈고, 기사들의 앞에 처음으로 파이어 버스터를 선보였다. 짙은 흑색으로 이루어진 날렵한 형태의 검을 바라본 기사들은 저마다 눈빛을 번뜩였다.
“설마 그것은……!”
<후후후, 내 존재를 알아보는군요.>
기사들이 숨을 삼키자 파이어 버스터는 더 우쭐해졌다. 나직한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기사들은 눈을 더 휘둥그렇게 떴다.
“……헉!”
“거, 검이 말을?”
<놀라운가요? 그래요, 마음껏 놀라도록 해요. 말로만 듣던 날 직접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겠어요. 역시 나란 검의 위용이란…….>
아마 그걸로 끝났다면 별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밝히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게 바로 구해 오신 마검이로군요!”
“과연! 정말 사악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손만 대도 오염될 것 같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덕분에 파이어 버스터는 한껏 도취되어 있던 기분에서 깨어났고, 그것은 곧 기사들을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익! 지금 말 다했어요? 감히 누굴 마검 따위로 보는 거예요?>
“음? 아니라고?”
<당연하죠! 귓구멍을 열고 똑바로 들어요! 난 불의 검이자 영웅의 검! 성검 파이어 버스터라고요!>
“서, 성검?”
<그래요! 성검! 성검이라고요! 아니 무슨 기사들이 성검과 마검도 구분 못 해요?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눈을 장식으로 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용사님을 따르겠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제대로 좀 살라구요, 이 얼간이들아!>
극도로 흥분한 탓인지 쏘아붙인 말도 거칠었다. 그게 기사들의 자긍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그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마검인데요.”
“전 이보다 사악한 검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무식한 검이네요. 마검과 성검의 뜻을 반대로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 정말!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이후로는 앞서 언급한 그대로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전혀 누그러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툭하면 터지는 말싸움은 어느 한쪽이 잘못을 인정할 때까진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검…… 원래는 정령으로 태어났어야 할 아이였다던데.”
머릿속을 환기시킬 겸 꺼내 든 서두에 이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제대로 태어났다면 이그니스였겠지. 원래 내가 그 아이에게 붙여줬던 이름도 이그니스였어. 인간들 손을 떠돌면서 이상한 이름으로 변형됐지만.”
“아, 그래서 그 애가 자신을 이그니스로 알고 있는 거구나. 어떻게 발견한 거야?”
“뭐, 어쩌다 보니 우연히……. 발견하자마자 정령으로 돌려놨어야 했는데 괜히 미적대는 바람에 망쳤어. 운이 굉장히 나빴지, 뭐. 아무튼 명계 놈들은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 왜 멀쩡한 정령들을 자꾸 인간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거야? 심지어 상급 정령이라고, 상급 정령! 걔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정령계에도 손해란 말이야! 생각할수록 정말 짜증나. 뭐, 그래 봤자 네가 잘못 태어났을 때 입은 손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하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땅히 할 말이 없는지라 어색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나를 탓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관련 얘기가 나오면 움츠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프리트는 다시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그 애 너랑 이래저래 공통점이 많네. 정령인데 인간으로 태어난 거 하며, 떨어지는 상황 판단력과 눈치 없는 성격하며. 원래대로라면 나이도 같았을 텐데 말이야.”
“내 성격이 뭐 어쨌다는…… 근데 나랑 나이가 같다니?”
“제작 시기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야. 그 애는 엘뤼엔이 소멸한 해에 만들어졌거든. 정상적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면 너도 그 해에 태어났을 테니까.”
아아, 그렇구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잠깐, 그 해에 만들어진 거면 아직 30년도 안 된 거 아니야?”
“음, 아마 그럴걸? 올해로 26년쯤 됐나?”
“카노스 말로는 수세대 동안 피를 묻혔다던데?”
“……아, 그거 말이지.”
평온하던 이프리트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뭔가 잘못 건드린 건가 싶어서 움찔하는데, 이를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튼 때문이야.”
“하이튼?”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나는 곧 그 이름이 뜻하는 한 존재를 떠올렸다.
“차원의 이동을 관장한다는 상급신 하이튼?”
“맞아, 그 녀석.”
이프리트의 눈빛이 더 스산해졌다.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사연은 이러했다. 정령검은 워낙 귀한 물건이라서 일단 만들어지면 신계에서도 주목을 한다고 했다. 심지어 인간의 혼을 담은 정령검이 만들어지자, 당시 수많은 신들이 구경하러 왔단다. 차원의 신 하이튼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검을 누구에게 줄 거냐고 물었고, 이프리트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에 하이튼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자기가 아크아돈 안에 무작위의 공간을 만들 테니 그곳에 검을 빠트려보는 건 어떻겠냐고.
“무작위면…… 신계에 갔을 때 날 청공의 방으로 떨어지게 한 그거 말이야?”
“그래. 바로 그거.”
알려준 방식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져서 당황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엘뤼엔을 만나게 된 셈이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했다.
무작위에 빠지면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게 된다. 이프리트는 그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주는 것보다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하이튼의 제안에 선뜻 응했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설마 그 무작위에 시공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지.”
“…….”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나는 아연해졌다. 한마디로 파이어 버스터는 과거로 떨어졌다. 그것도 무려 몇 천 년 전의 과거로 떨어졌다고 했다. 이프리트는 10년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부랴부랴 신계 쪽에 연락해 다시 검을 회수하도록 했다(이때가 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신계에 알려진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파이어 버스터는 간신히 본래의 시대로 귀환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수많은 인간들의 손을 전전한 끝에 마검화가 진행되어 있었단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 시대는 10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파이어 버스터를 발견한 것은 그가 과거에 떨어진 이후로 수백 년이 흐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시공간 속 시차가 워낙 불규칙하기도 했고, 애초에 무작위로 떨어진 거라 정확한 궤도를 계산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오차를 적게 잡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이른 시기로는 개입할 수 없었다고 했다. 되찾은 시점에서는 결과가 정해진 셈이라 재시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간신히 회수하고 나서 그녀석이 겪은 처참한 과거를 들여다봤는데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던지. 그 바보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제대로 자각도 못 하고 그저 용사님만 찾더라니까. 아무튼 그래서 실제로 제작된 시기는 26년쯤 됐는데, 살아온 시기는 팔백 년이 넘어.”
“……너 대체 파이어 버스터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아니라 하이튼 잘못이라니까?”
하나도 공감할 수 없는 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파이어 버스터의 성격이 왜 그 모양이 됐는지 이제야 알겠다. 저런 왕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낙천적이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애한테 잘해 줘. 불쌍한 애니까.”
“네가 할 말이냐!”
그 불행을 만든 장본인인 주제에 선심 쓰듯 말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화를 내지 못한 건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는 이프리트의 얼굴이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건 그 나름대로 죄책감과 속상함을 감추기 위한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를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좀 더 신경 쓸게.”
“그래, 정말 신경 써야 할 거야. 네 계약자를 위해서라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단순히 지나가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굴을 굳혔다. 이프리트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은 상태로 대답했다.
“마신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은 모양인데, 혼이 깃든 검은 마검화가 되면 조금 위험해져. 힘은 더 강해지는데 그게 양날의 검이 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관리를 잘 못하면 폭주할 수도 있어.”
“포, 폭주?”
“그래,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거지. 그렇게 되면 주인의 의식까지 침투해서 멋대로 장악하기 시작해. 대륙을 피로 물들인 광인들 중에선 그런 경우가 꽤 많아. 내가 괜히 그런 오지에 봉인해둔 게 아니라고.”
“……그런 건 제일 먼저 말해 주면 안 될까.”
왜 굳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내가 동정의 여지 없이 파이어 버스터를 처분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