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더는 그자의 뜻대로 진행되도록 놔두진 않을 겁니다.”
무릎 위에 놓인 공작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는 이미 저택의 봉문을 해지하고 군사를 편성하는 등, 본격적으로 대공에게 맞설 준비에 돌입한 상태였다. 클모어에 주둔하고 있던 대공의 병사들과 그들에게 협조하던 사람들도 전부 추격해서 잡아들이는 중이었다. 이제 곧 대공이 반역자임을 세상에 공표하고 황성이 있는 수도로 진격할 터였다.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공국의 주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실 공작에게 걸려 있는 저주가 풀린 순간부터 대공의 계획은 어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사나를 놓쳤던 바로 그 시점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이사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미소 지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숙부에 대해서는 충분히 놀랄 만큼 놀란 것 같으니 이제 하나씩 돌려줄 차례군요. 내 사람들을 건드린 값을 반드시 받아낼 겁니다.”
오랫동안 품어 왔을 다짐이 단호한 음성으로 내뱉어졌다. 여유를 잃지 않는 얼굴은 충분한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공작의 눈빛에 감회가 서렸다.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뜻대로.”
엄숙한 구령에 따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와 내 일행들은 서로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 * *
“흐음, 일이 그렇게 된 거구나.”
긴 시간 이어진 설명을 묵묵히 듣던 여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혹적인 붉은 머리칼을 폭포수처럼 흐트러트린 채 푹신한 방석에 느긋하게 몸을 누인 여인은 클리프 상단의 총수 이카나―아니, 이프리트였다. 그동안 신세를 진 것도 있고, 지난 일들에 대해 설명도 해줄 겸 겸사겸사 상단에 들린 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프리트는 굉장히 바쁜 상태였지만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그동안 에이프릴을 보호해 준 공을 인정받은 덕분에 앞으로 상단에 출셋길이 트였기 때문이다. 공작은 자신과 여동생을 만나게 하기 위해 상단 총수의 권한까지 쓴 이카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녀가 이후에도 에이프릴을 보호해 준 것을 크게 고마워했다. 그 보상으로 상단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는 모양이다.
집요하게 괴롭히던 마신관들은 공작이 칩거를 풀자 곧장 신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해져서 찾아보기도 어려워졌다. 덕분에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운영이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작이 정신을 차려서 정말 잘 됐어. 덕분에 우리 상단은 지금 최고조야. 네가 하도 못미더워서 제대로 될까 싶었는데. 너도 의외로 쓸 만하구나?”
“……그걸 지금 칭찬이라고 하는 말이야?”
“물론 칭찬이지. 쓸모없다는 말보다는 낫잖아.”
“너 말이야…….”
“어쨌든 이참에 공작한테 잔뜩 얻어내야지. 곧 전쟁이 시작될 테니 군수품 매매 독점권을 달라고 해야겠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도와준 은인인데 당연히 그 정도는 내주겠지?”
“이 와중에 그런 생각밖에 없냐.”
“당연하지. 내가 뭘 위해 에이프릴을 돌봐줬는데?”
새침하게 대꾸하는 얼굴에 근심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마왕이라든가 악신에 대한 건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했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왜 다들 이렇게 태평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내가 더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뭘 그렇게 걱정이니? 트로웰도 아니면서 예감이 좋지 않다느니, 그런 말은 그만둬. 정작 트로웰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거야 그렇지만. 카노스와 헤어진 이후로 벌써 보름이 넘었는걸. 그런데 아직도 조용하니 뭔가 불안해.”
물론 그가 마계 쪽 진행 상황을 내게 알려올 의무는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다른 소식이 없다는 건 일이 원만히 해결되고 있다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도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건 답답했다.
“대공 쪽은 어떤데?”
“그쪽도 아직 별다른 반응은 없는 것 같아. ……아마도.”
“왜 아마도야? 네가 직접 알아본 게 아닌 거야?”
“아니, 알아본 건 맞아.”
그 부분만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사나 측 사람들이 활발히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 역시 틈틈이 ‘눈’을 사용해서 황성의 동태를 살펴왔다. 대공의 처분은 이사나에게 맡기더라도, 그 사이에 그가 진행할 사악한 일들까지 방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행여 또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훼방을 놓을 작정이었는데 대공은 요 며칠 잠잠하기만 했다. 정확히는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 건데?”
“……그의 모습이 흐리게 보여.”
대공을 지켜보면서 제일 신경 쓰이던 점을 고백했다. 처음 살펴보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쭉, 단 한 번도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본 적이 없었다. 동일한 장소에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전부 훤하게 보이는 반면, 유독 그의 모습과 목소리만은 조금 탁한 느낌으로 전해졌다. 마치 두꺼운 장막이 한 꺼풀 덮여 있는 것 같았다. 황궁 안에 마력을 차단하고 감지하는 기운이 흐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힘이다. 정령왕인 내가 뚜렷하게 볼 수 없을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그를 눈앞에 두고도 기척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황성 바로 아래에서 버젓이 의식을 치르고도 지금껏 들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짜 마신관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그가 이런 힘을 지니고 있는 건 마왕과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힘이 대공을 보호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태연하게 듣고 있던 이프리트 역시 그 말에는 눈썹을 찌푸렸다.
“여전히 마왕의 보호를 받고 있단 말이지. 아직 마왕이 건재하다는 소리네. 죽었다면 계약도 풀렸을 테니까.”
“역시 그렇지? 설마 카노스가 실패한 건…….”
“말도 안 돼. 다른 신도 아니고 마신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
되묻는 얼굴엔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단지 기분 탓인 게 아니라 수습에 나선 존재가 마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연히 성공할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도 마신이 나섰다는 사실을 제일 크게 받아들이는 것 같긴 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나 싶어서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마신이 그렇게 굉장해? 주신을 제외하면 신들 중에서 제일 강하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당연하지. 최고신이잖아. 상급신은 원래 다 강하지만, 최고신들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어. 신계를 열고 초석을 다진 존재들이라 그 의미부터가 남다르다고. 게다가 엘퀴네스였다고 했지? 그럼 그가 바로 최초의 엘퀴네스였을 거야.”
“응, 들었어. 그게 뭐?”
“쯧쯧, 그걸 알면서도 실감을 못 한단 말이야? 아직도 멀었구나?”
가볍게 혀를 찬 후 이프리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직도 우리들의 구조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으니 제대로 설명해 주지. 잘 들어, 엘. 정령왕은 말이지, 반(半)영체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하되 완전하지 않은 존재야. 그래서 타고난 힘과는 별개로 살아가는 동안 혼에 힘이 축적돼. 한마디로 성장한다는 거지.”
“성장을 한다고?”
“그래, 물론 혼이 성장하는 거라서 실제적인 힘으로 볼 수는 없어. 어차피 정령왕이야 넷이서 서로 균형을 맞춰야 하는 구조니 누가 더 강하다는 걸 따질 필요도 없지만 말이야. 사실 지금까지는 무엇을 위해 생기는 힘인지도 잘 몰랐어. 그냥 후생에 보탬이 되는 건가 보다 했지, 설마 소멸하고 나서 신이 되는 건 줄 누가 알았겠어? 이건 보기보다 중요한 문제야. 신들의 세상은 우리 정령들과는 달라서 소유한 힘의 차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같은 상급신이라도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이 완전히 다르다는 거지.”
“여기서 성장하는 만큼 강한 신이 된다는 말이야?”
“바로 그거야. 오래 살수록 더 많이 성장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겠지? 자, 그럼 여기서 바로 본론을 말할게. 최초의 정령왕들 중에선 엘퀴네스가 제일 먼저 태어났고, 가장 나중에 소멸했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그 당시엔 지금처럼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았거든.”
“……!”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건 신들처럼 무한하게 살아갔다는 뜻이다.
놀라 있는 나를 향해 이프리트는 다음 말을 마저 이었다. 당시 정령계는 막 만들어진 상태라 몹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없이 공허했고, 정령왕들은 서로 몇억 년이라는 차이를 두고 하나씩 태어났다. 심지어 가장 마지막으로 태어난 이프리트의 경우, 그 전에 태어난 미네르바와 8억 년이나 차이가 났다고 했다.
“그 엄청난 간격을 알겠어? 그런데도 그들 중에서 엘퀴네스가 제일 마지막으로 소멸했단 말이야. 아마 엘퀴네스 혼자 수십억 년은 살았을걸?”
“수, 수십억?”
“그렇다니까. 한마디로 수십억 년 치의 힘을 쌓았다는 말이지. 그게 바로 지금의 마신이란 소리야. 이제 얼마나 엄청난지 알겠어?”
나는 반쯤은 넋이 나간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굉장한 존재였구나. 그가 지닌 힘을 수치화할 수는 없더라도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다는 것은 알겠다. 엘뤼엔한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모습만 봐서 조금은 편하게 여긴 것도 사실인데, 역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프리트가 그의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마신이 그렇게 강하다니 안심은 되네. 그런데 왜 아직도 마왕이 살아 있는 거지?”
“아직 마계 쪽 일이 진행 전인 거 아니야? 아니면 마무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중이거나.”
“그런가……?”
“그야 상대도 각성을 앞둔 악신이니까 생각보다 간단하진 않겠지. 아무튼 지금은 별일 없을 거야. 만약 일이 틀어졌다면 신계가 제일 먼저 뒤집어졌을 테니까. 일단 엘뤼엔부터 가만히 있을 리 없어. 가장 먼저 너한테 소식을 전해 오지 않겠어?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엘뤼엔이 넌 잘 챙기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니 얼굴에 따끔따끔한 시선이 닿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프리트가 불타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물러서려는데 그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는 단숨에 나를 덮친 후, 한 팔로 내 목을 휘감고 마구 조르기 시작했다.
“우아악! 뭐야, 갑자기!”
“뭐긴, 미래의 새엄마가 주는 사랑의 응징이지! 엘뤼엔이 연락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그 표정! 진짜 열 받아아아! 네가 그의 아들이면 다야? 아들이면 다냐고!”
“아, 좀! 이딴 게 무슨 사랑의 응징이야!”
그와 한참을 아등바등하는 동안 온몸에서 진이 쭉 빠졌다. 제압을 풀고 간신히 빠져나왔을 땐 이프리트도 지쳤는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 혼자 방문한 거라 정말 다행이다. 다른 일행들이 이 꼴을 봤다면 정령왕들에 대한 평가를 맨틀까지 하향 조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정말, 애먼 사람한테 분풀이하는 것도 적당히 해. 스스로 치졸하다고 느끼지 않아? 정작 엘뤼엔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흥, 그거야 당연히 못 하지! 정령왕 시절만 해도 싸운 기억밖에 없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나쁜 인상을 주란 거야? 그때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성질 더러워서 나랑은 상종하기 싫다고 했었다고!”
“……너도 참 어지간히 했구나.”
“시끄러워! 아무튼 지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그가 나를 다시 볼 거 아냐!”
어쩐지 줄기차게 싸웠다는 것치곤 엘뤼엔한테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이기에 이상하다 싶었다. 감정을 자각하면 사람이 달라지는 건가 했더니 전부 의도해서 계산한 행동이었나 보다. 나름 고심해서 정한 방법인 것 같긴 한데 썩 좋은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엘뤼엔이 뭘 잘못 먹은 거 아니냐는 시선을 보냈던 것을 보면.
“내친김에 하는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정말 너무하지 않아? 그러는 저는 나보다 성질이 더 더러우면서! 이래서 얼굴값 하는 것들은 안 된다니까? ……하지만 먼저 반한 쪽이 지는 거니 할 수 없지. 아무리 고깝고 짜증 나도 엘뤼엔이 나한테 넘어올 때까진 참을 거야.”
“아, 그래. 그것참 가상하네.”
“알아들었으면 너도 제대로 협조해!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엘뤼엔한테 계속 언급하란 말이야! 알았어?”
“……그건 이미 늦은 것 같은데.”
“늦었다니?”
“나한테 엘뤼엔의 인장이 있다는 거 잊었어?”
“……어?”
“가끔 내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더라고.”
“…….”
어쩌면 방금 전 상황도 전부 다 봤을지 몰라. 한마디 더 덧붙이자 이프리트의 얼굴이 탈색된 것처럼 새하얘졌다.
이후로 한동안 나는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광경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차라도 홀짝여주고 싶었으나 손님 접대에 박한 이프리트가 그런 걸 내올 리가 없어서 빈손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물론 내줬다 해도 마시고 싶지 않았겠지만.
“봤을까? 봤으면 어떡하지?”
“글쎄, 그보다 굳이 성격이 달라진 것처럼 연기할 필요는 없지 않아? 네가 그런 애라는 건 너보다 엘뤼엔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백날 내숭을 떨어 봤자.”
“……너 그동안 많이 컸다?”
“이리저리 시달리다 보면 싫어도 성장하게 되어 있거든.”
지지 않고 받아친 대꾸에 이프리트는 얄밉다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다시 목을 조르려 들진 않는 것을 보면 엘뤼엔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크긴 큰 모양이다.
“좋아, 아들이니까 특별히 봐줬다. 내리사랑이라는데 엄마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누가 엄마냐? 그 말도 안 되는 관계는 제발 그만 주장할 수 없어?”
“시끄러워. 그보다 엘뤼엔 하니까 말인데, 너 그거 알아? 엘뤼엔이 그 마신과 거의 비등한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이 있어.”
“어? 정말?”
“그렇다니까. 그에 관해 떠도는 말들을 내가 조금 알아봤는데 말이지. 엘뤼엔의 혼은 처음부터 완성형에 가까웠대. 마신이 성장으로 힘을 쌓았다면, 엘뤼엔은 이미 타고난 힘 자체가 굉장하다는 거지. 정말 엄청나지 않아?”
이프리트는 마치 눈앞에 엘뤼엔이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관련된 소문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일인 양 자랑하며 들떠 있는 폼이 팔불출이 따로 없다. 사랑에 빠지면 정령왕도 별수 없구나 싶어 나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