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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30화 (230/608)

제230화

그사이 꾸역꾸역 파고들어 가던 마검이 공작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흡수된 마검은 그 안에서 완전히 녹아 사기(死氣)만 남게 된다고 했다. 이로 인해 저주는 숙주가 죽었다고 착각, 모든 활동을 멈춘 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사기에 스며들어 동화된다. 한마디로 죽어야만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소리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지독한 방식이었다.

잠시 후 마법진을 밝히고 있던 푸른빛이 그의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공작은 발작하는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마구 몸부림치는 그를 고정하기 위해 나 역시 진땀을 흘려야 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건가 걱정스러워졌을 때쯤, 불현듯 그의 부릅떠진 눈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흰자위가 까맣게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변색된 거라기보다는 마치 먹물을 머금은 것 같았다. 실제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그의 눈 속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공작의 눈을 새카맣게 뒤덮는 것으로 모자라 주르륵 양 옆으로 흘러내렸다.

“커헉, 컥!”

공작은 숨을 꺽꺽 삼키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의 눈을 가득 채운 검은 액체가 빠져나가면서, 원래의 눈동자가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저주가 빠져나오는 거야.”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이사나에게 시벨리우스가 검은 액체의 정체를 설명했다. 마검은 그저 저주의 활동을 멈추게 하고 흡수할 뿐으로, 그것을 밖으로 배출해내는 건 정화의 주술이 하는 일이었다. 지금 공작에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저주가 순조롭게 정화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헉, 허억! 헉!”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급박하던 호흡이 진정된 건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그때쯤엔 대부분의 액체가 빠져나가고 눈이 거의 맑아져 있었다.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마법진의 푸른빛도 점차 사그라졌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공작의 복부 위에 놓여 있던 마법진이 파스스 재가 되어 흩어졌다. 정화가 완전히 끝난 것이다. 공작은 몹시 지쳐 보이긴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맥박과 안색도 정상이었고, 마검이 박혔던 부분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형님, 괜찮습니까?”

잠잠해지고도 공작에게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이사나가 다가섰다. 공작은 식은땀에 푹 절은 상태로 거친 숨만 쌕쌕 내뱉을 뿐이었다. 당황한 이사나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부터 풀어주었다. 미동 없이 늘어져 있던 공작이 힘없이 눈을 굴렸다. 딱히 상황을 인지해서가 아니라 그저 건드리는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인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사나를 눈에 담은 그의 얼굴이 짧게 경직됐다.

“……폐하?”

“……!”

염려하는 얼굴로 공작을 살피던 이사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정작 공작 본인이 자신이 내뱉은 말에 더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사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찬찬히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작의 눈은 점점 더 크게 떠졌다. 그의 얼굴 가득 동요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폐, 폐하?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분이 진정 폐하이신 겁니까?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닌 거지요?”

“날 알아보겠습니까, 형님?”

이사나의 얼굴이 환해지자 공작은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가움과 경악, 부정하면서도 납득하는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얼굴 위에서 빠르게 교차했다.

“……그럴 수가. 이게 대체 무슨…….”

지금쯤이면 괜찮겠다 싶어 나는 그를 제압해 두고 있던 결박을 풀었다. 공작은 자유로워지자마자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오기 전부터 쭉 머물고 있던 장소였으면서 마치 처음 본 장소를 탐색하는 것처럼 낯설어하는 모습이었다. 새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것 같기도 했다.

“맙소사…….”

한참 동안 넋을 잃은 상태로 굳어 있던 그가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제가, 저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상황을 알겠습니까?”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공작은 주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머릿속이 어수선합니다만. 거의 대부분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저는 폐하를 눈앞에 두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얼굴을 뵈면서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누군가 제게 암시를 걸은 것 같습니다만, 제 생각이 맞는지요.”

공국을 다스리는 사람답게 확실히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빨랐다. 이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작은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눈을 감았다.

“역시 그렇군요. 얼마 전엔 저를 찾아온 가신들을 내쫓았습니다. 그중 몇 명도 알아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들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들이 아니라 제가 이상했던 거였군요.”

“형님 탓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못나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수작에 당한 겁니다. 폐하, 이 죄를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체 무슨 짓을…….”

참담한 어조로 사죄하던 공작이 그 순간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가 경악한 얼굴을 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

“형님?”

“폐, 폐하.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에, 에릴! 에릴, 그 아이가 절 찾아왔었는데. 제가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쫓아냈습니다. 맙소사! 제가 그 아이를……!”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난 기억들에서 지나쳤던 진실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한참이나 됐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아, 이럴 수가! 폐하, 제가 에릴을 죽였습니다! 제 하나뿐인 여동생을! 그 착하고 순하던 아이를! 제가……!”

“형님, 진정하세요. 에릴 누님은 무사합니다.”

겉잡을 수 없이 흥분한 공작을 이사나가 급히 달랬다.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공작이 그의 말에 눈을 부릅뜬 채 굳었다.

“예? 무, 무사하다고요?”

“이곳에서 누님을 만났습니다. 누님은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위기를 잘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 안심하세요.”

그 말에 공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새빨갛게 핏줄이 돋아 있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폐하……!”

그러나 그는 마음껏 감격을 누릴 수 없었다. 돌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진지한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말이야. 그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든.”

“……?”

중간에 난입해서 강제로 화제를 바꾼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우리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10분 다 됐어.”

쿠콰앙!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에서 요란한 소음이 울리더니 병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그가 걸어둔 술법이 풀리면서, 바깥에서 문을 박살 낸 것이다.

“공작 각하! 무사하십니까!”

“저들이 침입자다! 저들을 잡아라!”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 병사들이 순식간에 주위를 장악했다. 카웰 공작은 황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 미간을 꾹 문질렀다.

“……그렇군요. 확실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던 평범한 오빠의 표정이 사라지고, 엄숙한 공작의 얼굴이 덧입혀졌다. 그가 한 손을 들자 달려들려던 병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주춤거리는 그들을 굳은 시선으로 바라본 후, 공작은 이사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오늘의 무례는 후에 전부 청하여 죄를 받겠습니다. 제 병사들의 잘못은 저를 탓해 주십시오.”

“주인을 지키려는 용기는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죠.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관대하신 처사에 감사드립니다.”

“고, 공작 각하?”

오가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카웰 공작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들 하느냐. 황제 폐하의 앞이다. 모두 무기를 내리고 무릎을 굽혀라.”

그가 명령했고, 멀뚱히 서 있던 병사들은 한발 늦게 경악한 얼굴을 했다. 너무 뜻밖의 상황인 나머지 공작의 명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하긴 황성에서 사라진 후 행방이 묘연하던 황제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곧 그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들이 일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병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부복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저택을 뒤흔들 듯이 울려 퍼졌다. 카웰 공작 역시 그의 황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가운데 의연하게 서 있는 이사나의 모습은 그의 본래 나이를 잊게 할 만큼 크고 강대해 보였다.

잃었던 것을 되찾고, 흩어졌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첫 단추가 순조롭게 채워지고 있었다.

* * *

정신을 차린 카웰 공작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택 안에 있을 마신전의 내통자를 색출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저주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부터 의심했다. 소드 마스터인 그에게 저주를 걸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 꾸준하게 접촉해야 한다. 늘 함께하면서 자신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는 건 그의 평소 습관이나 일정을 알고 있는 사람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예상은 맞아떨어져서 곧 내통자의 정체가 집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긴 했다. 혈육을 제외하고 공작에게 가장 밀도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는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에이프릴이 내쫓기던 과정에도 수상한 점이 많았다. 일하는 사람 중에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텐데, 공작이 그녀를 내칠 때 다들 가만히 방관했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나서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뜻이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집사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엄격하게 입단속을 해 왔던 듯했다. 윗선의 지시엔 무조건 따르라는 고압적인 방식으로 고용인들을 관리해 왔으며,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전부 해고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다들 그의 말 한마디면 군소리 없이 침묵하는 버릇이 들었고, 이는 공녀가 쫓겨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쫓겨난 여인은 공녀의 모습으로 위장한 첩자다. 공작님이 판단하신 일에 관여하지 말라.’ 병사들에게도 그렇게 당부했다고 했다. 그 말이 공작의 단호한 태도와 맞물려 진실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집사를 직접 잡아내어 이 모든 자백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쪽에 가까웠다는 사실이었다. 공작의 저주가 풀린 그 날 바로 그 시각에, 그자가 몸을 내빼고 도주했기 때문이다.

달아난 집사는 본래 이 지역 출신이 아니라 타지에서 온 사람이었다. 기존의 집사가 마땅한 후계자도 없이 갑자기 병환을 얻어 쓰러지는 바람에 서둘러 들이게 된 자라고 했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외지인이라는 사실이 꺼림칙하긴 했으나 워낙 일을 잘하는 편이었고, 주위에서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황이 건재하던 시기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격분한 공작은 그를 추적하기 위해 뒤를 조사했으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출신지도, 나이도, 하다못해 이름조차도. 그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심지어 공작에게 그를 추천해 줬다는 사람들마저 그자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공작가의 사람들이 지은 망연자실한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농락당한 셈이었다.

“정말 송구합니다.”

분노에 이를 갈면서도 카웰 공작은 그의 황제에게 사죄부터 했다. 함께한 공작의 가신들과 황제의 친위대들도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사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계획한 것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진 않았을 겁니다. 제 직위와 능력만을 믿고 너무 방심했었습니다. 이 못난 신하의 무능함 때문에 폐하께서 이런 고생을 하셨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릴, 네게도 정말 부끄럽구나.”

“아니에요, 오라버니. 전 오라버니가 나으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뻐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공작의 곁에 선 에이프릴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오빠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저택의 일이 정리되자마자 공작의 가신들과 함께 귀환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마법으로 변장했던 모습도 바꾸어 본래의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공작은 자신을 위로하는 동생을 애정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는, 그 어떤 자들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몇 년 만에 보는 여동생을 마주했을 때, 카웰 공작은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그렇게 맹세했다. 격정에 벅차오르면서도 울분을 삼키지 못한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그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으나 얼굴에 서린 그늘은 지우지 못했다. 자신으로 인해 하나뿐인 여동생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고, 섬기는 황제는 먼 타지에까지 나가 저주를 풀 마검을 구해 왔으니 그 심정이 편할 리가 없었다. 불길이 치솟는 눈동자만 봐도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훤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흥분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했다.

“정말 알면 알수록 굉장한 사람이네요, 숙부는. 설마 5년 전부터 이 모든 일들을 준비해 왔었다니.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일지도 모르겠군요.”

중얼거리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위조된 신관의 인장부터, 가짜 신탁. 그리고 클모어의 공작까지. 언제부터 깔아둔 건지 알 수 없는 포석이 속속들이 드러날 때마다 대공이란 남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처음엔 기회를 잘 포착한 야심가라고만 여겼는데, 알면 알수록 그가 짜둔 틀에 맞춰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더 깊은 진실은 알지 못하는 공작도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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