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29화 (229/608)

제229화

해가 정오에 뜬 시각, 굳게 닫혀 있는 클모어 공작 저에 후드를 눌러쓴 네 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통한 불시의 기습이었다. 서재 안에서 독서 중이던 카웰 공작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와 동시에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택 내부에 펼쳐져 있던 마나 감지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서재 쪽이다!”

“모두 공작님을 모셔라!”

사방에 울려 퍼지는 경보음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병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 괴한들은 서둘러 서재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중 한 사람이 굳게 닫힌 문 위에 손가락으로 빠르게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자 쿵쿵 울리던 진동이 멈추더니 이내 주위가 고요해졌다.

“10분밖에 못 버텨.”

“그 정도면 충분해.”

문을 잠근 괴한의 말에 다른 쪽 괴한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는 품 안에서 꺼내 든 종이를 바닥에 펼친 후 그 위에 빼곡한 마법진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이 빈틈없이 신속하게 진행됐다.

“자네들은 누구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그때까지 굳은 얼굴로 서 있던 공작이 괴한들을 경계하며 물었다. 처음엔 큰 동요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였는데, 괴한의 손짓 한 번으로 바깥의 자극이 완전히 차단되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당신을 구하러 왔다, 라고 말해 봤자 통하지 않겠지. 괴한들― 아니, 우리들은 서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벌건 대낮에 공작 저를 침입한, 대담한 괴한들의 정체는 바로 소인원으로만 구성된 내 일행들이었다. 사실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공작이 저택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선 정화 의식을 치러야 하는데, 제대로 성공하려면 당사자와 직접 접촉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새벽에 기습하지 않은 건 저택에 깔려 있는 마나 감지 마법의 영향이 컸다. 순간적으로 침입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공간이동 마법만 한 것이 없고, 그러자니 경보 또한 피할 길이 없었다. 어차피 일어날 소란이라면 아예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대를 대놓고 노리자는 생각이었다. 단순히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려는 의도였지만, 굳어 있는 공작을 보니 오히려 그게 허를 찌른 것 같기도 했다.

“형님.”

선두에 서 있던 이사나가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히며 공작의 앞에 나섰다. 클모어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감격스러운 광경이기도 했다. 이 순간에 이르기 위해 그가 어떤 일들을 감당했는지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먼 사막의 여정도 그렇지만, 직전에 치른 고초도 그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 심하지 않았나 싶다.

<폐하가 직접 가신다고요? 안 돼요!>

에이프릴이 경악하며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공작의 저주를 풀러 가는 인원에 이사나도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터져 나온 말이었다. 사실 그 결정에는 에이프릴만이 아니라 공작의 가신이라는 사람들도 전부 반대하고 나섰다. 타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황제가 또다시 위험한 현장에 직접 간다고 나서니 전부 혈안이 되어 말리는 분위기였다. 무시하면 그만이긴 했지만,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들인 만큼 굳이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물리치기 위해 이사나는 상당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타일러야 했다.

그중에서 가장 그들을 납득시킨 건 ‘공작이 나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저주에 걸려 있는 상태에서도 카웰 공작은 오매불망 황제만 걱정하고 있었고,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부풀리는 것에 집중한 이사나는 그들이 수긍할 만한 내용으로 현혹시켰다. 충성심이 깊은 공작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알아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를 설득할 수 있을 테니 정화의 의식을 치르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거라고 했다. 더 ‘편하게’ 진행할 수도 있는데 왜 ‘일부러’ 돌아가야 하느냐고도 물었다. 말이 좋아 설득이지, 공작을 믿지 못하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게 제법 그럴듯했는지 반대하던 자들이 더는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계속 만류하면 공작의 충정을 의심하는 셈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이사나가 설득한 논리대로라면 지금이 바로 승부의 시점인 셈이다. 그러나 이 순간, 완벽하게 드러난 이사나의 얼굴을 보면서도 공작의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자네는 모르는 얼굴인데. 왜 나를 형님이라 부르는 거지?”

“……역시 알아보지 못하는군요.”

예상했던 반응에 이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정작 우리들 중에서는 공작이 이사나를 알아볼 거라고 기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나뿐인 여동생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이사나를 알아본다면 그거야말로 질 나쁜 희극일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보니 딱히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속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걸까. 나는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사나를 힐끔 보았다. 담담한 표정이긴 했지만 막상 공작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니 착잡했는지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평소보다 기운이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그냥 사람들의 말처럼 놔두고 올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사실 이번 일에 이사나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키려는 존재를 가장 안전한 곳에 두고 싶어 하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심리일 테니까. 실제로 이사나 본인은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알리사를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납득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파이어 버스터를 강제로 쥐어주고는, 검을 향해 그녀를 지키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사실은 허튼짓(몰래 따라온다거나)을 못 하게 감시하라는 쪽에 더 가깝겠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모두가 이 일에 관여하는 건 나 때문이잖아. 내 일을 맡겨두고 나 혼자 편한 곳에 있고 싶진 않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전부 함께 하고 싶어.>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향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쉽게 과신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는 점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은 철없이 의지하고 응석을 부려도 좋을 텐데. 그가 지닌 지위와 삶의 무게들이 원래 그 나이에 누려야 할 권리마저 삼켜버리는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까웠다.

“괜찮습니다, 형님. 곧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본인이 더 속상할 텐데도 이사나는 오히려 공작을 위로했다. 아니, 스스로 의연해지기 위해 하는 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공작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눈썹을 찌푸렸다.

“낫게 해? 마치 내가 아프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하는군.”

“맞습니다. 형님은 지금 아프신 겁니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것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초조해진 듯, 카웰 공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던 공작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검을 뽑아들려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인 그가 날뛰기 시작하면 쉽게 끝날 일도 매우 어려워진다.

나는 급히 물을 일으켜 공작의 몸을 결박시켰다.

“큭! 무, 슨 짓을!”

기회를 놓친 것으로 모자라 간단히 제압까지 당하자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물론 나 역시 그를 제압하고 있는 것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 누가 검술의 경지에 이른 존재 아니랄까 봐 저항하는 힘이 생각보다 더 강했다.

“준비는?”

“거의 다 됐어.”

한창 마법진을 그려가던 라피스가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우리에게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려준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지금 그 책임을 온몸으로 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투덜거리지 않고 얌전히 협조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입에 뭐라도 물려 둬.”

라피스의 지시에 이사나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공작의 입에 물렸고, 당연히 공작은 더 크게 버둥거렸다.

“미안합니다, 형님. 곧 풀어 드릴 테니 잠시만 참으세요.”

“으읍! 읍! 읍!”

사납게 노려보는 눈길에 핏발이 섰다. 눈빛만으로 저주를 걸 수 있다면 몇 번이든 걸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니까 우리가 꼭 악당이 된 것 같아.”

문에 걸어둔 술법을 지키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으니 문득 남의 시선으로 보기엔 이 광경이 어떤 식으로 비춰질까 싶었다. 멋대로 난입한 것으로 모자라 강제로 팔을 결박시키고, 천으로 입을 틀어막고. ……차마 반박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악당이 뭐 어때서.”

그즈음 마법진을 완성시킨 라피스가 가볍게 목을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증오로 번들거리는 공작의 눈을 태연히 마주 보았다.

“건전한 방식은 그게 통하는 상대한테나 하는 거고. 필요할 땐 무력도 쓰는 거지. 나중에 시끄러워질 것 같으면 상대가 아무 말도 못 하게 하면 돼. 그럼 없던 일이 되거든.”

“……그 대사 진짜 악당 같다.”

“흥, 당하고 사는 것보다야 백배는 낫지. 하지만 일단 이 상황에서 그 표현은 틀렸어. 이런 수고를 들여가며 도와주는 악당이 세상에 어딨냐? 내가 보기엔 호구가 따로 없구만.”

“그건 그것대로 극단적인데. 중간 표현은 없어?”

“지금 그딴 걸 고민할 때냐? 어쨌든 시간 안에 끝내고 싶으면 저 녀석이나 바닥에 눕혀. 바로 시작할 거니까.”

라피스가 다시 지시를 내렸고, 공작을 제압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던 나는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버둥거리는 몸을 강하게 압박해서 꼼짝 못 하게 만든 다음 바닥에 똑바로 눕히자, 공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왠지 제정신이 돌아와도 이 일에 대한 것만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라피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공작의 복부 위에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펼친 후 손바닥으로 그 위를 감싸듯이 덮었다.

“발동.”

그의 입에서 묘한 울림을 담은 단어가 뱉어졌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새파란 빛이 솟구쳤다. 분명 평범한 잉크로 그려졌을 그림이 그의 손길을 따라 파란색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역순. 정화. 순환.”

연이어서 짧은 단어들이 뱉어졌고, 라피스는 품 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내게 미리 건네받았던 마검이었다. 검이 가까이 다가오자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검 끝이 공작의 배 위에 똑바로 세워졌을 땐 지켜보던 나도 흠칫했다.

“라, 라피스?”

“왜.”

“그……지금 뭐하는 거야?”

방해하지 말라는 듯, 귀찮은 표정을 짓던 라피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저주를 정화하려는 거잖아.”

“그건 아는데…… 왜 검을 찌를 것처럼 세우는 건데?”

“찌를 거니까.”

가벼운 대꾸와 동시에 라피스가 카웰 공작의 복부에 마검을 푹 찔러 넣었다. 정확히는 마법진의 정중앙을 관통한 위치였다.

“큭!”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놀란 이사나가 크게 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당황하긴 했지만 저주를 푸는 진행 과정 중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니 동요를 금방 가라앉힐 수 있었다.

당장 아픈 건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치료하면 생명엔 지장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마냥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기엔 다음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단순히 찌른 정도가 아니라 마검을 공작의 몸 안으로 점점 깊숙이 밀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가 붉은 피로 젖어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럴수록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빛도 강해졌다.

“크으……으아아악!”

“혀, 형님!”

고통을 참지 못한 공작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사나의 얼굴은 완전히 새파래졌다.

“저, 저기.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걱정스러운 마음에 묻자 라피스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턱짓을 했다. 그 무성의한 대답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이어 보이는 광경이 모든 불만을 가로막았다. 라피스가 손을 떼어냈음에도 마검이 계속 공작의 몸속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몸이 스스로 검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사나 역시 그 광경을 발견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시벨리우스는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지만 대신 다른 부분을 감탄했다.

“굉장하네. 정말 시간 안에 성공할 줄은 몰랐어. 정화의 주술을 이렇게 빨리 완성하다니. 보통은 진을 그리는 것만 해도 수십 분은 걸리는 편인데.”

사실 그는 이 계획에 참여할 때부터 단 한 가지만 신경 썼었다. 촉박한 시간 안에 완벽한 주술을 완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였다. 물론 그 염려에는 라피스를 향한 기본적인 불신도 깔려 있었다. 그런데 라피스가 당연하다는 듯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이다.

대놓고 내색하진 않아도 시벨리우스는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그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 마주치기만 하면 불꽃이 튀던 눈동자가 처음으로 온화한 빛을 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았다. 호의도 순순히 받아주지 않는 성격답게, 라피스가 코웃음을 쳤기 때문이다.

“이게 뭐 별거라고.”

“……우와, 바로 잘난 척이냐. 진짜 귀엽지 않네.”

“너한테 귀엽게 보여서 뭐하게. 내가 귀엽게 굴길 바라는 거냐?”

“으악! 상상했잖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하?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이 퍼런 엘프가.”

“뭐? 퍼런 엘프라니?”

“시퍼런 색이니까 퍼런 엘프.”

“블루 엘프거든! 호칭은 제대로 쓰라고! 아니, 그보다 나는 원래 엘프도 아니거든?”

“시끄러, 너 같은 건 그냥 퍼런 엘프면 충분해.”

“엘! 들었어? 얘가 날 이상하게 불러!”

“……둘 다 그만해.”

이런 때마저도 지치지 않고 다투는 두 사람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서로 아예 무시했을 텐데. 티격태격하기라도 하는 걸 보니 오히려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