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루카르엠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던 카류안과 그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자, 그럼. 형식적인 도전의 조건은 채웠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얼마든지.”
“왜 그러셨습니까?”
두서없는 추궁에 어리둥절해진 세르피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의미를 알고 있는 카류안은 동요 없이 대꾸했다.
“그 이유는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게 진실을 가르쳐 준 건 그대가 아닌가.”
“……역시 그게 문제였군요.”
루카르엠의 얼굴이 흐려졌다.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였으나 낮게 토해진 신음 속에는 삼키지 못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카류안은 조소하듯이 웃었다.
“그대도 후회라는 걸 하는 건가?”
“가끔은요. 이렇게 되길 바란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니 기쁘군.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그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니. 정말로 기뻐서 미칠 지경이야.”
“…….”
“하긴. 아무리 그대라도 책임감을 느낄 만하지. 운명의 여신의 화원에서만 열린다고 하는 지혜의 열매. 바로 그대가 내게 가져다주었으니까.”
<전하, 받으세요. 선물입니다.>
그가 웃으며 건네주던 과실을 기억한다. 형태는 사과를, 색은 포도를, 맛은 복숭아를 닮았었다. 유리처럼 딱딱하기만 하던 표면이 입술이 닿는 순간 물렁하게 부드러워졌다. 놀라울 만큼 따뜻한 식감이었는데 떨어지는 과육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바로 그 날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다시 생각해도 희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카류안은 음산하게 웃었다.
그가 지혜의 열매에 대해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거대한 서재 속 아주 작은 틈새에서 발견한, 낡은 책 한 권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운명의 여신이 키우는 나무는 그녀의 신력을 담고 있어, 그 과실을 먹으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다고 했다.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 열매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족이 신계에 갈 수 있는 길은 오래전에 막혀 있었다. 유일한 방법은 중간계에서 큰 소란을 일으켜 천군에게 붙잡혀 가는 거였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열매를 훔쳐올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신계에 숨어들어 갈 방법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는 문득 루카르엠을 떠올렸다. 역대 마왕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오직 마왕만이 열람할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남공작 루카르엠은 신의 대리자로서 마신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라면 왠지 지혜의 열매도 구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류안은 루카르엠을 찾아가 요청했다. 그는 루카르엠을 어려워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 또한 자신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으며,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곤란해하는 그에게 매달려 몇날 며칠을 조르고 또 졸랐다. 그러자 얼마 후 루카르엠이 정말로 과일 하나를 구해왔다. 굉장히 힘들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그 과일을 먹으니 한순간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았다.
마신의 손가락 안에서 춤추듯이 흘러가는 마계, 쳇바퀴처럼 똑같이 맴도는 마족들의 운명.
부흥도 쇠락도 처음부터 전부 정해져 있었다.
그가 본 미래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뜻은 마신의 권속에 의해 가로막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슨 방법을 써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저항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 힘이 잡아끌어 강제로 굴복시켰다.
“우리는 그저 마신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지.”
검은 장막이 내려진 캄캄한 길에서 어둠의 날개가 눈을 가린다. 안락을 가장한 채 아름다운 피리 소리로 걸음을 인도하지만, 그 길의 끝에 있는 건 예고된 절망과 파멸뿐이다. 마계에서 단 네 명뿐인 공작들도, 마왕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신은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무도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무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 다른 신들의 손에 유린당하고 짓밟히도록 내버려두고 때로는 오히려 밀어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굴종과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는 그 앞잡이였다.”
붉은 눈이 증오를 담아 번들거렸다. 루카르엠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독한 배신감에 시달려 왔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대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덕분에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으니까.”
“새로운 길이라…….”
되새기듯 중얼거리는 입맛이 썼다. 루카르엠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서 금기를 어겼습니까?”
“어떻게 해서도 바꿀 수 없다면 완전히 부술 수밖에. 그것이 신의 섭리라면, 신 따위도 넘어서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요. 너무 뻔한 대답이라 딱히 실망스럽지도 않군요.”
“뭐라고?”
대번에 사나운 시선이 닿았지만 루카르엠은 오히려 느긋해졌다.
마주 응시해오는 서늘한 눈동자를 보며 표정이 굳은 건 카류안 쪽이었다.
“기억합니까, 전하? 과일을 드렸을 때 분명히 말했을 겁니다. 그 열매로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냥 재미로만 즐기시라고. 너무 과신하지도, 그것에 사로잡히지도 말라고요.”
“열매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아뇨, 잘못되었다면 먹은 쪽이겠죠.”
“뭣……?”
부릅뜬 눈이 꿈틀거렸다. 루카르엠은 불쾌함을 역력하게 드러낸 카류안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사람이란 결국 아는 만큼만 세상을 보는 법이거든요. 수많은 진실을 접해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눈에 담아요. 그렇게 가다 보면 어떤 진실도 왜곡됩니다. 그래서 지혜의 열매는 욕망을 비추는 거울에 더 가깝죠.”
“……!”
“더 제대로 말할까요? 당신은 이 세계의 구조에 늘 의문을 품고 있었고, 마신의 관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었죠. 그래서 지혜의 열매를 구하려고 한 거였고요. 자신이 옳다는 걸 확신하고 싶었을 겁니다. 당신이 어떤 미래를 보게 될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호수의 표면에 파문이 일어나듯 카류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정곡을 찔린 자의 동요라는 걸 알고 있는 루카르엠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왜 구해온 거지?”
“나한테 조금 나쁜 버릇이 있거든요.”
“나쁜 버릇?”
“의심이 워낙 많아서요. 툭하면 사람을 시험해보고 싶어 하죠. 당신이 그 욕망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이 내쉬어졌다. 명백히 후회하는 모습이었지만 카류안은 이번엔 그의 표정을 즐기는 대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결국 자신은 그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으며, 믿음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돌려 말한 셈이었으니까.
“그냥 날 싫어하고 마신을 원망하는 정도로 끝내지 그랬습니까. 천마 대전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했어도 좋았을 겁니다. 불합리를 증오하면서 정작 온몸으로 부딪쳐 권리를 되찾을 용기는 없었군요.”
“큭! 닥쳐라! 방자하구나, 루카르엠!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버리니 네 앞에 있는 이가 누군지도 잊은 건가?”
“아직도 당신이 내 왕이라 생각합니까? 먼저 그 자격을 버린 건 당신입니다.”
“흥, 이제 그딴 자격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더 높은 곳에 설 테니까.”
“높은 곳이라…….”
“모든 신들의 위, 가장 높은 곳이지. 알아들었다면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해라, 루카르엠! 충성을 맹세하고 넙죽 엎드려 나를 섬겨야 할 거다. 마음에 들게 굴면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내가 지배할 세상의 한 구석 정도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어주도록 하마. 마신을 네 발밑에 두고, 신들을 개처럼 부릴 수 있게 해주겠다.”
오만하다 못해 광포한 말이었다. 루카르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광기로 가득한 카류안의 모습에서 한때 그가 사랑했던 아이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이런 건 재미없었다.
“내가 저지른 과오가 크긴 한가 봅니다. 살다 보니 악신 후보한테서 스카우트를 다 받아보고.”
“네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텐데?”
“글쎄요. 제법 신선하긴 합니다만, 그뿐입니다. 결국 끝까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군요. 그나마 이 자리에 내 잘난 친구가 없다는 게 다행이네요. 그가 알면 어이가 없어서 비웃지도 않을 겁니다.”
경멸하며 바라볼 얼굴이 눈에 선했다. 싸늘한 눈빛은 일말의 동정도 담지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요. 썩은 토양에서 자란 싹한테 무엇을 바랐느냐고 하겠죠. 아니, 이 경우엔 씨앗부터 잘못된 셈일까요. 왜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뭐 심은 데서 뭐 자란다. ……알면서도 심었으니 뽑을 일만 남았군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두겠다는 겁니다.”
쏴아아―
그 순간 주위를 훑는 바람과 함께 루카르엠의 몸에서 검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온몸을 죄여오는 압박감에 세르피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류안 역시 당황했지만, 그는 이내 여유롭게 웃었다.
“그대가 날 죽일 수 있을까?”
“이 경우엔 할 수밖에 없겠죠. 더 늦기 전에 수습할 겁니다.”
“이미 늦었다, 루카르엠. 그대는 날 막을 수 없다.”
“왜 그렇게 확신합니까?”
“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났다. 그대라면 내 변화를 알아보았을 텐데?”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루카르엠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성분과 밀도가 변했고, 전신에서 권능이 느껴졌다. 그 권능의 향기에 세르피스가 홀렸다. 심지어 그의 앞에서도 묶어둘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어지간한 신들조차 상대가 될 것 같지 같았다.
침묵하는 얼굴에서 동조의 기색을 읽은 카류안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 마족에 불과할 뿐! 내게 맞서려 할수록 절망을 맛보게 될 거다. 그래, 내가 그 열매를 통해 보았던 그 끔찍하고 무력한 절망감을 말이야!”
한껏 벌어진 입 안에서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오랜 원수를 눈앞에서 굴복시킨,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루카르엠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신을 넘어섰다고 하진 않는군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아주 늦은 것 같진 않네요.”
“뭐……?”
“내가 마족이라고 누가 그럽니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카류안은 자신을 휘감는 무형의 기운을 피해 황급히 물러서야 했다. 서걱, 바람이 지나치는 느낌이 이는가 싶더니 얼굴에서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카류안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쓸었다. 완전한 각성을 이루진 못했지만 이미 반신에 가까운 상태였다. 육신이라는 제약에 갇혀 있는 존재가 자신을 해칠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에게 스친 피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
카류안은 혼란으로 일그러진 채 루카르엠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었던 루카르엠의 눈동자가 지금은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원래 알고 있는 익숙한 외형 너머로 낯선 얼굴이 비쳤다. 지금보다 더 새카만 흑발이, 더 짙은 암흑의 눈동자가 보이자 숨이 막혔다.
“설마, 그대가……!”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얼굴을 보며 루카르엠은 씁쓸하게 웃었다.
“적당히 하자, 카류안. 나를 더 슬프게 하지 마.”
쿠구궁!
“……!”
멀리서 들려온 폭음에 데자크는 흠칫 몸을 떨었다. 루카르엠이 향한 곳, 본성이 있는 방향에서 난 소리였다. 그는 서둘러 높은 곳으로 올라가 최대한 안력을 높였다. 저 멀리 희미하게 자리 잡은 본성의 모습이 보였다.
데자크의 얼굴이 굳었다. 본성이 있는 중앙은 마왕의 마력으로 감싸여 있어 언제나 맑은 날씨를 유지했다. 그곳이 지금은 짙은 회색빛의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도전자들이 본성에서 전투를 치렀으나 이런 현상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이건 다른 변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루카르엠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인내했다. 굳이 혼자 가겠다고 언급한 건 어떤 경우에도 따라오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 지시를 어길 순 없었다.
“루카르엠 님……!”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거듭 중얼거리면서도 데자크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바뀔지언정 루카르엠이 패배하는 결말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시 나타나 줬으면 했다.
그러나 데자크의 바람과는 다르게 본성을 감싸고 있는 안개는 끝내 걷히지 않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마족들이 접근을 시도했지만,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 어둠과 밀어내는 힘에 가로막혀 아무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루카르엠도, 마왕 카류안의 행방도 그 속에 파묻혀 사라졌다.
“라데카!”
그 시각 운명의 여신 라데카의 궁처에 두 남녀가 뛰어들었다. 천신 이오웬과 명계의 신 섀넌이었다. 달빛이 스며든 듯한 은발, 검은색 피부를 지닌 소녀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그들을 돌아보았다.
찾아온 사람도, 맞이한 사람도 서로 굳은 얼굴로 마주 보기만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인지 시작인지 알 수 없는 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불안정한 소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