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26화 (226/608)

제226화

“굉장히 특이한 천이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은백색의 무늬가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마치 살아 있는 세포가 퍼져 있는 듯했다. 이 세계보다 공업과 염색기술이 발전한 지구에서도 이런 재질의 천은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 천이 만들어지나 싶어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시벨리우스가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 그거 천 아니야. 가죽이야.”

“어? 가죽이라고?”

“응, 정확히는 인어의 비늘이지.”

“…….”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비늘 같다고 생각했던 무늬가 진짜 비늘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이 시대에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진 인어의 비늘이라니! 그 가치를 환산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증발하는 것 같았다.

“이,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냐? 이렇게 막 써도 돼?”

“괜찮아. 어차피 쓰려고 구한 거니까.”

“그, 그래도…….”

“하하, 정말 괜찮아. 그나저나 역시 잘 어울린다. 네 머리카락을 볼 때부터 딱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짐작이 맞았어. 파란색을 구하려고 노력한 보람이 있네.”

“응? 구하려고 노력했다고?”

“아.”

원래 가지고 있었던 걸 꺼냈던 거 아니었나? 마치 일부러 가죽을 구해온 것 같은 말투에 어리둥절해져서 쳐다보자 그는 잠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망설임을 담은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구르더니 이내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나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미안. 으음, 그게 그러니까, 예전의 엘……도 장갑을 꼈거든. 그래서 구해둔 거였어. 새로 장갑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더니, 파란색을 갖고 싶다고 해서.”

“아……!”

“앗, 그치만 오해하지 마. 네가 누구인지는 이제 상관없으니까. 필요한 시기에 어울리는 사람한테 간 것뿐이야. 네 마음에 들었다면 그걸로 충분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그의 부드러운 눈빛만 봐도 알았다. 그래도 왠지 미안한 마음에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그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악신이라고 하니까 궁금해졌는데, 지금 마계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돌아가는 대로 마왕과 겨룰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쯤이면 시작했겠지?”

“으음, 글쎄. 근데 마왕이 정말 악신이 되려고 한 걸까? 오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드러난 정황만도 명백한걸. 마신이 나서려고 할 정도면 거의 사실이라고 봐야 할 거야.”

“역시 그런가. 데르온은 어떻게 생각해요?”

“카류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자이긴 합니다.”

대답하는 어조는 담담했다. 데르온은 웅크려 앉은 자세에서 품 안의 알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전처럼 적의가 느껴지는 모습은 아니었으나 마왕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래전부터 마신의 지배를 받는 걸 불만스러워했죠. 자신만이 다스릴 수 있는, 오롯이 홀로 영광을 독차지하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왕좌에 오르는 이들은 대다수 과한 자신감을 갖고 있긴 합니다만, 그는 유독 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루카르엠과의 사이는 어땠어요?”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류안 쪽에서 일방적으로 견제하긴 했으나, 루카르엠 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죠. 그래도 한때는 친하게 지낸 적도 있었긴 합니다만.”

“어? 그래요?”

“네, 유체 시절엔 거의 대부분. 뭐, 그런 마왕도 어릴 땐 사랑스러웠으니까요. 그때는 루카르엠 님을 통해 마신의 계시도 많이 내려졌습니다. 설마 그 루카르엠 님이 마신 본인이실 줄은 몰랐지만.”

그러고 보니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마왕도 어릴 때는 마신의 사랑을 받았었다고. 그저 어렴풋한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아꼈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 걱정스러웠다.

‘카노스는 괜찮은 걸까.’

비록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에 대해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 루카르엠과 어울리는 동안 알 게 모르게 들은 정이 꽤 깊은 모양이다. 왠지 기분이 초조해지는 것 같아 나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이젠 보이지 않게 된 마신의 문장이 오히려 보였을 때보다 더 신경 쓰였다.

모든 일이 원만하게 끝났으면 좋겠다.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밖에 바랄 수가 없어서 입맛이 썼다.

* * *

마계의 밤은 짙은 군청색을 띤다. 마치 깊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하늘 위에는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 거대한 은하수가 존재했다. 유리조각이 흩뿌려진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그 안에서 수시로 위치를 바꾸는데, 그 모습이 정말로 별이 흐르는 것처럼 보여서 뭇 신들은 마계의 밤을 ‘마신의 어항’이라 부르곤 했다.

이 화려한 별의 군무는 마계의 한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생명의 숲 카르텐. 마계에서 유일하게 살생이 금지된 성지이자, 금역인 땅이었다. 바로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잘 단련되어 있는 육체와 훤칠한 키를 지닌 남자에게선 강한 마력이 풍겼다. 등 뒤에서 넘실거리는 그의 긴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부서질 듯이 반짝거렸다. 그 색은 마계의 밤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이 짙푸른 색을 띠었다. 수많은 마족들 중에서도 이 색을 지닐 수 있는 건, 허락받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북쪽 영토의 주인이며 카르텐의 숲지기. 데자크 룬이었다.

데자크는 무거운 얼굴로 주위를 훑었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하늘과는 다르게 숲 안은 음침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황폐하기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밤하늘만큼이나 화사한 빛과 충만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신이 깃든 죽음의 땅 같았다. 숲이 품고 있던 알들이 전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것은 부스러진 껍질의 잔해들뿐, 그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대부분이 부화를 앞둔 시기였다.

“빌어먹을 카류안 놈.”

몇 번을 보아도 짜증이 나는 광경에 데자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무엄하게도 마왕을 삿된 말로 칭했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원래도 충정 따윈 없었지만 알을 파괴한 유력한 용의자인 이상 그에게 마왕은 당장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에 불과했다. 아니, 이제 와서는 정말 마왕의 짓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알이 파괴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는 것 자체로 이미 증오의 대상이었으니까.

“빌어먹을, 이라. 우리 북의 공작님이 정말 많이 화가 나시긴 했군요.”

“……!”

그 순간 느긋하게 울리는 음성에 데자크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밤하늘의 영향을 받아 푸르스름한 색으로 뒤덮인 숲을 배경으로 익숙한 모습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루카르엠 님!?”

데자크는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중간계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이후 루카르엠은 한동안 자택 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불안하던 차였는데, 그가 이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카르엠 님! 몸은 좀 어떠십…….”

반가운 기분으로 안부부터 확인하려던 데자크는 곧 말끝을 흐렸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루카르엠이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데자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상기했다. 두 팔이 떨어졌고, 봉합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그냥 마무리해야 했다. 당시 끝까지 남아 치료를 도왔던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잘못 기억할 리가 없었다. 마왕이 보고받는 시간을 질질 끌어서 이렇게 된 거라고 얼마나 이를 갈았던가. 그런데 그때 사라졌던 루카르엠의 두 팔이 지금 그의 어깨에 멀쩡히 붙어 있었다.

그의 혼란을 읽은 루카르엠이 보란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양 팔을 붕붕 돌리고 늘어지게 기지개도 켰다. 그 모습에 데자크는 다시금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때 봉합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아직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르엠의 움직임에선 아무런 군더더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잘린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데자크는 어떻게 된 건지 묻는 대신 그냥 미소 지었다. 애초에 그에 관해선 감히 판단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상대가 루카르엠인데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그를 끊임없이 신임하는 이유였으며,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했다.

건재한 그의 모습에 내심 안도하며 다가서던 데자크는 다음 순간 발견한 것에 걸음을 멈췄다. 루카르엠의 오른쪽 팔에 검은색의 둥근 고리가 걸려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팔찌처럼 보였으나 마력이 응축된 형태였다. 데자크는 저 물건이 무엇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데르온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당황해서 건넨 질문에 루카르엠은 씩 웃으며 팔찌를 흔들어 보였다.

“이번 동의 증명서를 제대로 본 건 지금이 처음인데, 꽤 촌스럽지 않나요? 우직하고 투박하기만 한 게, 데르온다운 모양이라고 해야 하나.”

요점을 벗어난 대답이었지만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데자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데르온에게 그런 센스는 없죠. 옷은 몸에 걸칠 수만 있으면 되고, 장신구는 왜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녀석이니까요.”

“저런, 그렇게 심각한 상태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래도 꽤 멀쩡하게 입고 다니는 편이었잖아요?”

“다행스럽게도 시종들의 감각이 훌륭한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권하는 대로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이군요.”

가벼운 잡담과는 다르게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눈빛은 진지했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넘실거렸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는 별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자크의 것은 꽤 멋졌죠. 예전부터 한번 받아보고 싶었어요.”

“…….”

내밀어진 손을 보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데자크는 맹수처럼 포효하고 싶은 기분을 꾹 눌러 참은 채 루카르엠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증명서는 여러 방면에서 쓰이지만, 같은 공작이 다른 공작들의 증명서를 모으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왕의 주권에 도전할 때다.

데자크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루카르엠이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덜덜 떨리는 팔이 그의 마음속 동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루카르엠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듯이 태연했다.

이윽고 데자크에게서 일어난 마력이 루카르엠의 손 위에 모여들었고, 진한 남색이 감도는 반지를 남겼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조각과 문양이 곁들어진 세련된 형태였다.

“역시.”

루카르엠이 가볍게 웃었다.

“데르온은 자크를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군요.”

그가 반지를 손에 끼우는 것을 보며 데자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흥분을 애써 억눌렀더니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울고 싶은 느낌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수많은 세월을 고대하고 또 고대해 왔는지 모른다. 그가 숭배하는 단 하나의 마족이 언젠가는 모두의 위에 군림하기를. 루카르엠을 주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를 찾아와 증명서를 받아가는 마족들을 볼 때마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운 속을 삼켜야 했다. 그런데 그의 평생 절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심지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왕이 되려는 건 아닙니다.”

그의 생각을 뻔히 읽은 루카르엠이 제지하듯이 말했다. 데자크는 잠시 멈칫했으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동안 루카르엠은 그 어떤 마계의 일에도 대부분 철저한 방관자였다. 특히 마왕이 하는 일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여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경고이든 징벌을 위해서이든,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적어도 그는 카류안을 더 이상 왕좌에 앉혀둘 생각만은 없어 보이니 마왕은 교체될 것이다.

그의 손에서 지금의 마왕이 끌어내려지기만 하면 된다. 그럼 다음 왕이 누가 되든지 그자는 반쪽자리 왕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계의 모든 이들이 진정한 군주는 남공작 루카르엠이라는 것을 알 테니까. 그동안 소수에게만 알려진 그의 위대함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분이네요. 내가 질 거란 생각은 안 합니까?”

그의 노골적인 속내를 알아챈 루카르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데자크는 정색하며 대꾸했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만약 내가 진다면요?”

“그럼 카류안이 더 이상 마족이 아닌 거겠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은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루카르엠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시선으로 데자크를 바라보았다. 일평생 숲지기로서 카르텐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는 자였지만, 이 마계 안에서 데자크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마족은 없었다. 누구보다 본능적이고, 상황 판단 또한 빠르다. 아마도 가장 진실에 접근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충정은 각인된 순종에 가까웠다. 본인이 그것을 의식하지도, 의심하려 들지도 않는다는 것이 카류안과는 다른 점일까. 루카르엠은 손을 들어 데자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뚝뚝한 남자의 얼굴이 예상치 못한 일을 맞이해 당혹감을 드러냈다.

“루, 루카르엠 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