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24화 (224/608)

제224화

“저기, 엘이라면……혹시 폐하와 같이 떠난 소년을 말하시는 건가요?”

그나마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에이프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이가 반가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의 지인이니 스승님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요?”

“틀림없습니다.”

연거푸 떨어지는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누가 들어도 부족할 근거를 들어 가장 완벽한 증명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에이프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은 쭉 이런 태도였다. 황제가 혈혈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낯선 이국의 땅에 갔음에도 당황하거나 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단 한 가지만 확인했다. “엘 님과 함께 갔습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럼 됐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매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친위대야말로 목숨을 걸고 황제를 지켜낸, 이 세상에서 가장 그를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벽의 기습에서 황제를 구해 탈출할 때 적지 않은 수를 잃었다고 들었다. 큰 희생을 치르고 지켜낸 만큼 더욱 소중할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번도 황제의 안위를 염려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 물어도 ‘엘 님과 함께 있으니 괜찮다’ 고만 했다. 마치 엘이라는 소년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부적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사실은 부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처럼 여기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거기까지는 에이프릴이 알 수 없었다. 알았다면 더욱 황당했을 테니 모르고 있는 편이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좋긴 했다. 이미 지금도 그들이 엘이란 소년에게 보이는 맹목적인 신뢰를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폐하를 구출할 때 그 소년이 가장 큰 공훈을 세웠다고 하더니. 그래서인가.’

황제의 기사들이 알려준 건 단편적인 정보뿐으로, 그 이상은 자세히 밝히길 꺼려했기에 에이프릴도 묻지 않았다. 그마저도 제대로 모르는 공작의 가신들은 얼굴에서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기사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무지하다는 것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 엘의 지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은 애초에 라피스가 평범한 인간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대책 없이 빼어난 얼굴과 뛰어난 마법 능력을 보면 마법 생물이라고 알려진 드래곤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언젠가 그들에게 마법 무기를 내줬던, 그들이 드래곤이라 의심한 정체불명의 남자와도 분위기가 꽤 비슷했다. 그런 존재를 신뢰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탄식을 넘어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이 지을 표정들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처음엔 그 정체에 놀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드래곤같이 엄청난 존재가 평범한(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튀긴 하지만) 인간으로 변해 그들의 사회에 섞여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것이다. 그들 역시 엘을 만나기 전까진 초월적인 존재란 특별한 장소에만 존재하며, 특별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생김새도 특이할 거라 여겼지, 그렇게 완벽하게 인간처럼 보일 줄은 몰랐다.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지나칠 수도 있다고는 더 더욱이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가능한 말을 아끼는 게 좋을 텐데.’

공작 측 사람들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스몄다. 진실이 밝혀지면 지금 이 자리에서 했던 말들이 전부 가시처럼 본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 역시 엘을 처음 만났을 때 큰 실수를 저질렀기에 그게 얼마나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인지 알았다. 황제가 밝히지 않은 사실을 먼저 알릴 수는 없었으므로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이 상태에서 군대가 쳐들어오면 클모어는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한참 빗나가던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잠시나마 풀어졌던 분위기도 빠르게 굳어졌다.

“서한을 보내 회유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런 게 통할 리 없네. 라반과 아실란은 오래전부터 클모어를 노리고 있었네. 호시탐탐 기회를 탐했지만 공작님의 위용이 두려워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 그런 자들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움직이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내 생각이지만 그들은 이미 공작님의 상태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네.”

“큭. 마신관 놈들……!”

여기저기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공기는 질식할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이가 말했다.

“그들 쪽의 수뇌부를 흔들어 보겠습니다. 지휘관이 무너지면 아무리 대단한 군사라도 한동안은 방황할 테니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암살하시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허나 두 영주는 지금 라센 성에 있습니다. 라센 성은 요새 안에 있는 데다 이능력을 대비한 마법 결계까지 쳐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군사로도 뚫은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 안에 접근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일단 최후의 수단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수단이라시면?”

“명색이 친선 훈련이니 식솔들까지 데려가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을 쳐서 유인해 낼 겁니다.”

“…….”

공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공작의 가신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그들이 받은 충격을 이해했다. 기사는 귀족으로서 도덕적인 관념에 속해 있는 신분이었다. 목숨을 건 전장에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가 많다지만, 그럼에도 준수하는 사항은 있었다. 그것은 여인과 아이들을 비롯한 무장하지 않은 이를 해치거나 전쟁과 관계없는 자를 비겁하게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아직 선전포고도 오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명분이 없는 살인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배웠다.

평화로운 시절, 황궁에 있을 때는 케이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 수많은 고초를 겪어가면서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그게 곧 힘이 되지는 않았다. 비겁한 수단을 쓰는 상대와 정당하게 겨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었고,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그저 스러질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무슨 짓을 해서든 버텨야 한다. 의심이 가면 명분이 없어도 칠 것이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이용할 것이다. 소중한 군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러운 피를 묻힐 수 있었다.

“올곧고 깨끗한 자리엔 황제 폐하 한 분만 계시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나면 그는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황제의 옆에 있을 수도 없었다. 명예를 잃은 자를 곁에 두면 그 주인의 위신에도 문제가 생긴다.

카리브디스 공작, 대공의 개. 중앙 귀족들이 그를 꺼려하는 것엔 비단 그가 평민 출신이어서만이 아니라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가 대공의 앞길에 방해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잔혹하고 비겁한 방법을 썼는지 알려진 일화만 수십 가지였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다고 알고 있는 자들에게 그의 존재는 대공의 치부일 뿐이었다. 단지 소문에 불과함에도 그러한데 실제로 손을 더럽힌 기사가 어떤 시선을 받을지는 뻔했다.

케이도 자신이 내뱉은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스스로 그림자가 되는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에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그 말은 간과할 수 없군, 케이. 난 내 기사의 명예를 훼손할 생각이 없다.”

“……!”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그들은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뻗었다. 다급히 돌아본 그들은 곧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존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폐, 폐하?”

“폐하!”

경악한 기사들이 바로 기립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공작의 가신들은 그저 허둥거리고만 있었다. 그들을 향해 화사한 금발의 소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모두 오랜만이다.”

* * *

“엘 님?”

복도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곳에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어딘가를 다녀왔는지 외출복 차림을 한 페리스였다.

“와아, 오랜만이에요, 페리스. 잘 지냈어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그가 크게 헛숨을 삼켰다.

“마, 맙소사! 정말 엘 님이신 겁니까? 제가 지금 선 채로 꿈을 꾸는 건가 했습니다.”

얼굴 가득 반가움을 드러내면서도 그는 당황해서 뻣뻣해진 몸을 풀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전에 봤던 기사들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이사나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들 역시 페리스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먼 나라로 떠난 황제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아왔으니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국경 부근에 있었으니 정말 ‘갑자기’이긴 했다. 걸었다면 몇 달은 필요했을 거리가 공간이동 마법으로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고 보니 한창 심각한 회의가 진행 중이라 이사나만 들여보냈는데, 마침 시기가 잘 맞아떨어진 덕분에 상당히 극적인 등장이 됐다. 회의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지금쯤이면 마음껏 해후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귀환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그들을 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라피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수도에 있던 그들에게 에이프릴이 와달라고 요청했다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는 대로 연락해볼 생각이었던지라 수고를 던 셈이었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새벽까지만 해도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방금 도착했어요. 페리스는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는 거예요?”

“아, 저는 공작 저(邸) 부근과 근방 지역들을 정탐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클모어에 온 이후로는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고생이 많네요. 그나저나 벌써 진과 계약했군요?”

“아, 알아보시겠습니까?”

“당연하죠. 바람의 인장부터가 달라졌는걸요. 역시 성취가 빠르네요.”

부끄러워하던 페리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완벽하게 끝마친 숙제를 검사받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기특한 기분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바람과 물의 상급 정령사가 된 걸 축하해요, 페리스. 해낼 줄 알았어요.”

“저, 전부 엘 님 덕분입니다.”

“페리스가 노력한 결과죠. 이사나도 기뻐하겠네요. 아, 이사나는 지금 회의실에 기사들과 함께 있어요. 페리스도 들어가 보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엘 님은 어디에 가시는 겁니까?”

“함께 온 동료들이 있거든요. 한꺼번에 몰려가면 비좁을 것 같아서 다른 방에 놔두고 왔는데, 늦지 않게 들여다보러 가려고요.”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목례하는 그를 뒤로하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난 덕분에 걸어가는 동안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도착지에 이르러 문고리를 잡았을 때, 불현듯 엄청난 깨우침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열심히 걸어온 걸까. 혼자면 그냥 공간이동을 해도 되는데.’

“으으…….”

한심한 기분이 마구 차오른 나머지 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자세 그대로 문에 이마를 기댔다. 자해하는 사람의 기분을 이해해본 적은 없었는데, 딱딱한 나무의 감촉이 느껴지니 머리를 마구 찧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일일이 걸어 다니는 정령왕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멍청한 짓인지 모르겠다. 인간이면 운동이 필요하니까 일부러라도 걷는다지만, 정령이라 그럴 필요도 없는 나는 그냥 길 위에 멀쩡한 시간만 버린 셈이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제대로 정령왕답게 살 수 있을까. 어중간한 자의식 때문에 카노스한테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그 덕분에 페리스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싶기도 했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낙관적인 것을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먼 모양이다.

“나 왔어. 오래 기다렸…….”

“엘!”

“으헉!?”

우울한 기분으로 문을 여는데 누군가 요란하게 튀어나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물러서고 보니 시벨리우스였다.

“뭐, 뭐야? 왜 그래, 시벨?”

“엘, 나 저 녀석 싫어! 쟤랑 계약 해지하면 안 돼?”

“어어? 뭐?”

“쟤가 나한테 덜떨어진 엘프래! 진짜 무례한 자식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시벨리우스가 방 안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곳에 시큰둥한 표정을 한 라피스가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가 먼저 나한테 이렇게 화려하게 생긴 드래곤은 처음 본다고 했거든?”

“그건 욕이 아니잖아!”

“내가 불쾌했으니 욕이야.”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여전히 내게 매달린 채로 시벨리우스가 부들부들 떨었다. 슬쩍 올려다보니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라피스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었고, 노려보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강력한 전류가 튀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그 사이에 일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대체 뭐하는 거야? 특히 라피스. 다 커서 그런 식으로 시비 거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흥, 다 컸으니까 이러는 거지. 철부지 어릴 때야 아무하고나 어울리지만 성인쯤 되면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법이거든.”

“저게 진짜!”

당장 달려들 기세인 시벨리우스를 제지시키고 있으려니, 한구석에서 멀뚱히 서 있는 알리사와 데르온이 보였다. 사태가 이런데 두 사람은 이쪽의 상황에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데르온은 품에 알을 꼭 끌어안은 채 대놓고 흥미진진하게 둘의 공방을 관람하고 있었다.

“좀 말려보지 그랬어.”

“농담이지? 저 사이에 어떻게 끼어들어? 난 아직 살아갈 길이 창창한 나이라고.”

“전 단지 미래의 주군께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

아, 그래. 말릴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건 알겠다. 새삼 한탄할 기분도 아니라 나는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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