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23화 (223/608)

제223화

“에, 엔딜?”

“흐어엉, 죄,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해주실 줄은 몰라서……. 제, 제가 정말 감히 엘 님을 가족으로 여겨도 되나요? 저 같이 한심한 녀석도요?”

연신 닦아내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기분으로 그를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네가 왜 한심해. 넌 세실의 자랑스러운 오빠고, 내 시큐엘이 누구보다 소중하게 아끼는 귀한 사람이야. 카이 씨도 널 좋아하는걸.”

“에, 엘 님도요?”

“그럼 당연하지.”

“……! 고맙습니다! 너무 기뻐요. 저도 엘 님이 정말 좋아요. 저 진짜 착하게 살게요. 엘 님 이름에 누 끼치지 않을 거예요.”

“너무 무리하지 마, 엔딜. 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문득 엔딜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내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내 안에서 그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졌다.

누군가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이란 정말 굉장한 일이다. 인연을 맺는다는 건 서로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 같았다.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을 땐 그저 주위를 지나치는 수많은 배경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생명을 부여하는 순간 그 존재는 일부에서 벗어나 특별해진다. 나눠가진 생명이 커지면 커질수록 존재감은 점점 더 선명해지며 서로의 안에서 가치를 더해가고, 종래에는 완전히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소중해지는 것이 아닐까.

“뭔 놈의 작별 인사를 한나절이나 해? 난 먼저 나간다.”

한껏 훈훈해진 분위기를 식힌 건 이번에도 라피스였다. 다음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와 엔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의미 없이 지나치는 라피스와는 다르게 엔딜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굽혔다.

“드래곤 님께도 다시 한 번 인사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든지.”

열렬한 인사에 비해 돌아온 대꾸는 시큰둥했다. 다른 사람들이 당황해하든 말든 라피스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성의 없는 태도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엔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엔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떨더니, 은인이라 여겨서인지 이젠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해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라피스가 나가버린 탓에 자리는 자연스럽게 파장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한 일행들을 따라 나 역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사람은 이사나였다. 그는 똑바로 서자마자 진지한 표정으로 엔딜을 응시했다.

“엔딜, 악수를 청해도 될까요?”

“으응? 아, 응!”

이사나가 손을 내밀자 엔딜은 당황한 얼굴로 맞잡았다. 생소한 경험인지 악수를 나누면서도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사나가 말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한테? 무슨 부탁?”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이 제국을 두 사람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나라로 만들 겁니다. 그때는 다시 돌아와 주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엔딜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표정이 사라지고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럴게.”

“정말이지요?”

“응! 약속해. 그게 언제가 되든지. 꼭.”

긴장하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전부터 혼자서 심각해져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작은 부분을 지나치지 않고 고민할 수 있는 그가 황제라서 다행이었다. 이따금씩 이사나가 복권한 후에 만들어 갈 세상을 혼자서 그려보곤 한다. 강하고 다정한 군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겪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 추가할 부분이 하나 더 늘었다.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돼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면, 스왈트 제국은 굉장히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 같았다.

* * *

“루반과 아실란의 영주가 움직였습니다.”

지하로 연결되는 밀실, 원탁에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긴급회의를 소집한 클모어 영주의 가신들이었다. 클모어의 공녀 에이프릴과 황제의 친위 기사들도 자리에 함께 참석했다.

루반과 아실란은 클모어와 이웃한 지역으로, 서로 견제하며 겉으로만 친선을 다지던 관계였다. 그곳을 다스리는 두 영주가 최근 동맹 서한을 교환했다. 친선 훈련을 명목삼아 서로 군사를 합병했는데 그 수가 10만이 넘는다고 했다. 물론 여기 있는 누구도 그들이 표면으로 내세운 친선 훈련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칼날이 조만간 클모어로 향할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라고 봐야 했다.

“생각보다 이르지 않습니까?”

“이쪽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칠 생각이군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작 실권자인 공작이 자리에 없다 보니 다들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했다.

“저희들도 군사를 움직여야 합니다.”

“작전권은 공작님이 갖고 계시네. 우리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공녀께서 계시잖습니까. 공녀께서도 클모어 가문의 일원이십니다. 또한 현재까지 공작님의 유일한 혈통이시니 군사를 움직일 명령권 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공작의 가신들 중에서 가장 젊은 기사가 에이프릴을 가리키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가신인 나이 지긋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공작님이 공녀님을 알아보지 못하신다는 걸 잊었나? 그분이 공녀님이 병력을 쓰는 것을 그냥 가만히 놔두실 것 같은가? 자칫하면 우리들끼리 싸우게 될지도 모르네.”

“그럼 어쩌란 말씀입니까? 이대로 적들이 쳐들어오길 기다릴 수는 없잖습니까! 시국이 이런데 정작 공작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십니다! 저희들을 만나주지도 않으신단 말입니다!”

“그분을 탓하지 말게. 일이 이렇게 된 것엔 공작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 더 크네.”

“……알고 있습니다. 젠장, 세뇌를 걸다니. 그런 게 가능할 줄은…….”

불끈 쥔 주먹이 마음에 품은 분노를 반영하듯 부르르 떨렸다. 다른 가신들의 얼굴도 굳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그들 대다수가 대대로 클모어의 가주를 섬겨온, 가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자들이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공국, 그곳을 다스리는 강하고 인자한 주인. 그를 보필하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고, 한 치의 빈틈이 없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 자부심이 지난 몇 달 동안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카웰 공작이 한동안 칩거하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본인들 또한 자택에서 은둔하는 것을 택했다. 공작이 그렇게 하길 바라기도 했고, 가주와 뜻을 같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신관이 주기적으로 공작의 저택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공작이 독실한 교인이었기에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마신을 최고신으로 섬기는 신성제국에서는 빈번한 일이기도 했거니와, 칩거 중이라 신전을 직접 방문하지 못하니 마신관 쪽에서 오도록 청한 것이려니 했다.

그들 역시 마신관이 전해주는 말들을 맹신했고, 공녀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땐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녀는 황제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황제의 친위 기사들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모든 진실을 듣고 나서 얼마나 놀라고 황망해 했던가.

물론 처음부터 그 말을 전부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대다수가 황당무계한 소리로 치부하고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공녀를 가짜로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사안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공작을 찾았다. 그저 진위여부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카웰 공작은 일에서는 엄격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온화한 성정이었다. 그런 그가 여동생과 황제의 이야기를 꺼내자 격노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쫓겨나다시피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니 그날부터 어디선가 감시가 따라붙었다. 마신의 성기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끌고 가려는 것을 간신히 뿌리치고 탈출한 사람도 있었다.

그때서야 가신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중 몇몇은 삼엄한 감시를 뚫고 공작을 찾아가 이에 대해 알리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공작 본인이 전부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가신들 중 몇 사람은 아예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쯤 되니 그들도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카웰 공작은 적들의 인질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가장 큰 적이었다.

“저주만 풀리면 괜찮을 거예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에이프릴이 애써 의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신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들의 두 눈으로 직접 가주의 심각한 상태를 확인했다. 말 한마디로 낙관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너무 염려 마세요. 폐하께서 저주를 풀 방법을 반드시 찾아오실 테니까요.”

“마검 말입니까?”

“네, 맞아요. 마검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허나 폐하께서 가신 곳은 하필이면 그 악명 높은 바론 사막 아닙니까? 그곳에 들어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이렇다 할 호위도 없이 가셨다니. 그 생각만 하면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힘을 북돋기 위해 한 말이 분위기를 더 가라앉혔다. 공작에 대한 근심이 황제에 대한 염려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던 에이프릴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괘, 괜찮으실 거예요. 얼마 전에도 연락이 온 것 같았거든요. 스승님이 통신하시는 것을 보았어요.”

“공녀께서 말씀하시는 스승이라시면, 그 화려하게 생긴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 말입니까?”

“네, 맞아요. 라피스라는 이름이세요.”

“흠, 폐하와 소식이 닿았다니 다행이군요.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은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네? 아…….”

에이프릴이 웃는 얼굴 그대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신들은 공녀의 표정 변화를 예민하게 눈치챘다.

“설마 또 자리를 비운 겁니까?”

“으음, 그게…….”

예상했던 대답에 가신들의 얼굴이 일제히 찌푸려졌다. 사실 그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황제가 마검을 구하러 떠나 있는 동안 공녀의 호위를 맡았다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굉장히 오만했고, 사납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게 다루기 힘든 맹수 같았다. 성격도 그러한데 성실하지도 않아서 툭하면 자리를 비우고 사라졌다 나타나기 일쑤였다. 다들 아무 말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정말 무책임한 자로군요.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그에게 호위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겁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전 그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나이에 비해 이룬 성취가 크긴 하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 아닙니까? 도저히 신임할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 거만한 태도는 어떻고요. 외모는 또 왜 그렇게 쓸데없이 화려한지. 그렇게 눈에 띄는 자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합니다.”

수군거리는 소리들에 에이프릴의 표정은 더욱 흐려졌다. 이번엔 단순히 자리를 비운 정도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 사실을 알릴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스승을 향한 비난에 마음이 무거워졌으나 가신들을 나무라지도 못했다. 그녀 역시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마법 능력을 인정했을 뿐, 실력을 제외하면 그녀의 스승은 여전히 수상한 구석이 많은 존재였다. 신분도, 출신지도, 하다못해 학파조차도.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다. 전시나 다름없는 형국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무한정 신뢰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게다가 그의 독선적인 태도는 너무나 쉽게 사방에 적을 만들었다.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 일쑤고, 눈만 마주쳐도 빈정거리는 자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공작의 가신들 중에서 그에게 면박을 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들이 라피스에게 싫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쌓인 것들이 많다 보니 불만을 토로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어느새 회의 장소는 무례한 마법사를 험담하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점점 산으로 향하는 대화에 동조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 황제의 기사들뿐이었다. 가신들 중 한 사람이 슬그머니 그들을 향해 물었다.

“경들께서는 그자를 어떻게 보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기사들 쪽을 향했다. 대놓고 탐탁지 않아 하는 그들과는 달리 황제의 기사들은 늘 라피스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해 왔었다. 경어를 썼고, 그가 무례하게 굴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는 그 자체로 계급이 높지만 타고난 신분 또한 낮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정체도 모르는 마법사를 대우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전부터 알던 사람인가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도 라피스는 이곳에서 처음 만난 낯선 마법사였다.

“확실히 화려한 외모긴 합니다.”

친위 대장 케이가 가뿐하게 대답했다. 실컷 험담하던 이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게 아니라……그자의 수상한 행실을 논하는 겁니다.”

“논할 게 뭐 있습니까? 불성실한 편이긴 해도 우리를 돕는 쪽인걸요.”

“허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 자 아닙니까? 아무리 폐하께서 정하셨다고는 하나 출신도 알 수 없는 자를 어디까지 신뢰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될 겁니다.”

그의 거침없는 대답에 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들께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확신을…….”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 물어봤습니다. 그는 엘 님의 지인이라고 하더군요.”

“예? 엘……?”

“그러니 괜찮습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공작의 가신들은 전부 어리둥절해졌다. 케이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보니 가신들 쪽이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엘이 누구냐고 물어봤다가는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타박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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