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21화 (221/608)

제221화

“무슨 부작용인데?”

“아무리 재생되었더라도 일단 하나에서 둘로 나뉜 거니까. 기능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생명력은 현저히 약해져. 수명에 영향이 있을 거야.”

“수명이 짧아진다는 말이야?”

“그래. 뭐, 그래도 엘프니까 몇백 년은 살겠지만. 앞으로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오히려 동생 쪽은 엘프 혼혈들의 평균 수명보다는 오래 살지도 모르지.”

으음, 그 정도라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각오했던 것보다 가벼운 대가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관리에 따라 달라진다면 평소에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고 꾸준히 보양식만 먹어도 상당수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건지고 종족마저 바꿀 수 있는,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죽지 않아도 되는 치료법의 부작용치고는 심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나만은 아니었는지 엔딜과 카이테인의 얼굴도 밝아졌다.

심지어 세실은 본래의 평균 수명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다니. 마치 엔딜의 수명을 나눠 갖는 느낌이다. 실제로 심장을 나눈다는 점에서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할래?”

“네, 전 좋아요!”

처음부터 목숨을 건 녀석답게 엔딜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긴 했지만 이번엔 카이테인도 그를 막지 않았다. 라피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넌? 어쩔 거야?

“어? 아니, 그게…….”

“뭘 망설여. 네가 참여 안 하면 이 방법은 실행 불가능해. 엔딜도 죽으면 안 된다며. 그럼 남의 심장을 구해오는 수밖에 없네. 나가서 하이 엘프 한 마리 잡아와? 그러면 되겠어?”

“할게! 해! 하면 되잖아!”

여차하면 정말 납치해 올 기세라 나는 바로 소리쳤다. 동시에 라피스의 얼굴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참여한단다. 잘됐네.”

“엘 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엔딜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시작부터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더니 호흡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기뻐하는 엔딜을 어쩔 수 없는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라피스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근데 넌 갑자기 왜 이래?”

“뭐가?

“너무 순순히 도와주고 있잖아. 아직 조건을 걸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 부탁했을 때만 해도 드래곤의 자비심은 비싸다며, 대가 없이 도움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던 녀석이다. 세실을 살펴본다고 했을 때도 치료 가능성만 알려주고 나랑 흥정하려들 줄 알았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덥석 진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지금 같은 경우엔 녀석이 나를 설득한 셈이라 더 당황스럽기만 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불신과 의심을 담아 바라봤을 때였다.

“네가 친구라며.”

“어?”

“친구의 부탁이니까 그냥 들어줘도 되겠다 싶었을 뿐인데? 뭐 잘못됐어?”

“…….”

아무래도 오늘은 뒤통수만 맞는 날인가 보다. 라피스는 굳어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이내 카이테인과 엔딜에게 필요한 것들을 지시했다. 그들이 요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라피스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후, 그 피로 세실의 몸에 무언가를 적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던 그가 곧 찌푸린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뭘 그렇게 히죽거리고 있어? 시작할 준비 해.”

“아, 으응.”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라피스의 옆으로 다가서자 그는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하던 일에 마저 집중하기 시작했다.

‘헤헤.’

어떡하지. 이럴 때가 아닌데 마음이 자꾸 들떠서 큰일이었다. 얼굴 근육이 자꾸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몇 번이나 헛기침을 내뱉었다.

창밖으로 더욱 깊어진 어둠이 빗소리와 함께 녹아들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질 마법의 밤이었다.

* * *

굳게 닫힌 문틈으로 새하얀 빛이 들어왔다. 시야가 더 환해진 것 같더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점을 상기하자 긴 시간 유지하고 있던 집중이 처음으로 끊겼다. 몸은 피곤하지 않은데 정신이 지친 기분이었다. 나는 한숨을 돌릴 겸 방 안의 광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바닥을 비롯해서 천장, 그리고 허공까지. 공간 전체에 알 수 없는 숫자와 도형, 문자들이 검붉은 빛을 토해내며 번쩍이고 있었다.

공기 속에 가득히 스며든 짙은 피비린내. 간이로 마련한 수술대엔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두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공포 영화에서나 볼법한 기괴한 연출을 연상시켰다. 실제로 현재 두 사람의 상태가 시체와 별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현실감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심장은 제거된 채였고, 이미 생체 기능은 활동을 정지한 지 오래였다.

마법으로 만든 일시적인 현상일 뿐, 실제로는 살아 있는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끔찍한 광경이 끔찍하지 않게 되진 않았다. 이보다 더 처참한 사체를 본 적도 많건만, 아는 사람의 몸속을 보는 건 또 다른 기분이라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카이테인은 일찌감치 방에서 내보낸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심장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덩어리 두 개가 두 사람의 가슴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됐어.”

“……!”

가볍게 숨을 고른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손을 떼자 허공에서 모빌처럼 늘어져 있던 붉은 문자들이 우르르 세실의 몸에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적혈구가 혈관을 따라 이동하듯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지금.”

마지막 문자가 스며드는 순간에 맞춰 라피스의 신호가 떨어졌다. 나는 준비하고 있던 치유력을 곧장 두 아이의 몸에 쏟아 부었다. 자욱한 수증기와 함께 넘실거리듯 밀려나온 물이 빠르게 환부를 감쌌다. 몸속으로 파고든 새하얀 기운이 심장 부근을 집중적으로 맴도는 것을,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거쳐 온 험난한 과정들이 전부 이 마지막을 위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긴 밤 내내 고생한 라피스, 믿고 온전히 몸을 맡긴 엔딜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제발!’

스며든 치유력이 본격적으로 반쪽짜리 심장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둥그런 물 풍선이 덧씌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덩어리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올랐다. 여기저기 새 핏줄과 근육이 돋아나더니, 조립하는 것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땐 어느새 두 아이의 몸 안에 붉은 심장이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심장을 완전히 재생시킨 치유력은 이어서 다른 부분을 장악해 나갔다. 비워져 있던 공간에 살과 피가 차곡차곡 채워지고, 벌어진 피부까지 순식간에 봉합되어 갔다. 완전히 아문 가슴 위에는 작은 흉터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치유됐다…….”

깨끗해진 아이들의 맨살을 보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직 생체 기능은 멈춰 있는 상태였지만 모든 장기가 온전한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심장이 무사히 두 개로 나누어졌다. 내가 해놓고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멍하니 서 있는데 라피스의 주먹이 툭하고 가볍게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된다고 했잖아. 넌 네 능력을 왜 나보다 모르냐?”

“그, 그럼 다 끝난 거야?”

“그래, 이걸로 전부 끝.”

고개를 끄덕이는 라피스의 얼굴이 후련해 보였다. 그는 한차례 목운동을 마친 다음 짧게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바닥과 천장에 새겨졌던 숫자와 도형들이 환하게 빛나더니, 누워 있는 두 아이의 몸 위로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그 현상이 일으킨 효과는 이어진 광경이 바로 알려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처럼 미동이 없던 아이들의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마법으로 멈춰 뒀던 숨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대로 몇 시간은 안 깨어날 거야. 침대로 옮겨둬.”

그의 말대로 엔딜과 세실은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이었다.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얼굴은 이제 막 큰 수술을 끝마친 상태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평온하기만 했다. 여전히 잔여물이 남아 있는 현장만이 그들이 겪은 일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둘 다 괜찮은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치유한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한 뒤 라피스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꽤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왠지 신선한 기분이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아니, 네가 지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그걸 알면 그냥 보고만 있지 말고 나한테도 치유력 좀 써주지? 젠장, 하이 엘프라서 더 까다롭긴 하군. 생각보다 피를 너무 많이 썼어.”

엄살은 아닌지 투덜거리는 말투에 평소보다 기운이 없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시술하면서 그가 소모한 피가 상당했다. 세실의 몸에서 인간의 성분을 분리해 낼 때만 해도 그렇다. 그 과정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걱정이 될 만큼 버려지는 부분이 많았는데, 라피스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양의 피를 내어 세실에게 채워 넣었었다. 마지막에 세실의 몸에 스며들었던 붉은 문자들과, 방 안에 가득 그려진 마법진들도 전부 라피스의 피로 만들어진 거였다. 드래곤의 본체가 집채만큼 크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치사량을 몇 번이나 넘겼을 것이다.

치유력을 불어넣어 주자 라피스는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근 것처럼 푹 늘어졌다. 예전에 태진이 몇 시간씩 힘든 연습을 한 후에 파스를 붙이면 딱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고되긴 했던 모양이다.

“좀 괜찮아?”

“한결 낫네.”

녀석의 표정에 만족감이 떠오른 걸 확인한 후, 나는 잠들어 있는 남매를 조심스럽게 침대로 옮겼다. 혼혈이라곤 해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온전한 하이 엘프가 된 세실을 보니 느낌이 조금 달랐다. 가장 뚜렷하게 느껴진 건 피부 톤의 변화였다. 이전의 피부가 미색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투명 감이 감도는 흰 피부가 되어 있었다. 엔딜이랑 똑같은 색인 걸 보니 이게 하이 엘프 특유의 피부색인 것 같았다. 머리 색이 더 밝아진 것도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전체적으로 색이 빠진 듯한 느낌인데 오히려 혈색은 더 좋았다. 옅은 장밋빛으로 영글어 있는 두 뺨에선 하루하루 죽어가던 소녀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 ‘인간의 부분’이 완전히 사라졌구나.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은 사실에 연거푸 감탄이 흘러나왔다. 세실에게서 빠져나온 ‘인간 쪽’은 지금 덩어리진 채로 바닥에 한가득 고여 있는 상태였다. 눈대중으로만 따져도 몸의 절반은 될 것 같았다.

저 많은 양이 빠져나가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건 전부 드래곤의 피 덕분이다. 어느 인종의 것이든 성분을 대신할 수 있다니. 과연 지상 최고의 종족다웠다. 라피스가 본인의 입으로 이 말을 했을 땐 코웃음 쳤었는데, 그걸 내가 스스로 인정하게 될 줄이야.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정말로 그랬다.

“아무튼 정말 고생 많았어, 라피스. 도와줘서 고마워.”

“흥, 당연히 감사해야지. 영광인 줄 알아. 날 이렇게 효과적으로 써먹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니까. 내 부모조차 나한테 무보수로 이득을 본 적이 없어. 알아?”

“네네,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친구 잘 둬서 기쁘다고 하면 될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 여기서 더 부려먹지나 말아. 이건 내 예감인데, 넌 언젠간 내 목숨도 내놓으라고 할 것 같아.”

“헐, 넌 날 진짜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놓으라면 주긴 하게?”

“줄 것 같냐.”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라피스의 눈이 단숨에 희번들해졌다. 누가 보면 내가 정말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 줄 알 것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가 기대를 배반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네 목숨 같은 건 필요 없거든? 준다고 해도 안 받아.”

“뭐? 왜 안 받아? 넌 내 목숨의 가치를 잘 모르나 본데!”

“그럼 받아줘?”

“안 준다니까?”

“아, 어쩌라고!”

실없는 트집을 잡는 걸 보니 이제 살 만해진 모양이다. 나는 떽떽거리는 라피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돈이 되고 나니 새삼 방 안의 상태가 눈에 밟혔다. 탁자 위에서 바닥까지 흐르고 있는 핏물과 공기 중에 배어나는 악취까지. 간밤에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혼절할 게 분명했다.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네.”

밤새 카이테인의 서성거림이 느껴지던 문 밖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더해졌다. 아침이 되니 다들 소식을 듣고 몰려든 것 같았다. 나가서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야 하는데 이런 상태로 놔둘 순 없었다. 방 안에는 별다른 청소 도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능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물을 일으켜 구석구석 닦아내고 공기를 정화한 후 오물은 하나로 몰아 깨끗이 소멸시켰다. 이른바 물 세척이었다. 그 사이에도 라피스의 헛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야! 친구라면 서로 목숨을 걸자고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친구라며!”

……대체 저 이상한 사상은 누가 가르쳐 준걸까. 원래 이상한 녀석이지만 갈수록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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