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19화 (219/608)

제219화

내가 진짜 미쳐!

충동의 순간은 짧고 후회는 길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려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오, 떠나간 배였다. 아니 차라리 진짜 저 두 가지 상황이면 내 힘으로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기나 하지. 관용어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건 되면서, 정작 눈앞의 사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게 더 암울했다.

빛이 사라지고 본래의 까만색으로 돌아온 구슬은 아무리 노려보아도 잠잠한 상태였다. 평소였다면 내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걸 용납할 녀석이 아닌데, 이번엔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라피스 쪽에서도 더는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틀림없이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 누가 몇천 년 묵은 도마뱀 아니랄까 봐, 어떤 게 더 효과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왜 거기서 통신을 끊어버렸을까. 다시 생각해도 어리석은 판단이었음을 통감하자니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직 화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나만 타격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기도 했다.

네가 왜 내 친구냐니! 그 말만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속이 울컥거린다. 물론 녀석과 나는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이고, 서로 알고 지낸 지도 얼마 안 되기는 했다. 그래도 그동안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나뿐이었던 건가?

라피스가 배려심이나 이타 정신이 있는 편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대놓고 부탁받지 않은 일은 안 한다고 선언하던 녀석이니 오죽할까. 하지만 그냥 타고난 천성이라 그런 줄 알았지, 그럴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더 충격이었다.

‘(계약을 했으니) 요청이 있을 때만 협력.’ 녀석에게는 우리 사이가 딱 그 정도였다는 거다. 이 얼마나 삭막한 관계란 말인가!

아쉬운 처지는 나니까 내 쪽이 접고 들어가긴 하겠지만, 그 부분만큼은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껄끄러운 마음으로 녀석을 달래려니 속이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과연 이런 상태로 녀석의 성가신 투정과 빈정거림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아, 대체 왜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걸까? 역시 그때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왕이시여, 괜찮으십니까?

다시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자니 근처에 있던 정령들이 슬금슬금 내 곁에 몰려들었다. 혼자서 후회했다가 화를 냈다가, 다시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내 모습이 매우 불안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시큐엘이 고개를 부비며 위로하려고 하기에 나는 툭툭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덕분에 상념에서 벗어나 좀 더 진취적인 부분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과할 거, 이대로 직접 찾아가서 마주 보고 이야기 할 것이냐, 아니면 시큐엘을 보내 그쪽에서 다시 연락을 해 오도록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내가 직접 가는 게 효과는 훨씬 좋겠지만, 아니 오히려 시큐엘만 보냈다간 그 녀석 성질에 무시할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이 후자 쪽을 더 강하게 충동질했다. 더불어 시큐엘을 형상화하는 데 들어가는 마나까지 녀석의 것으로 하면 아주 통쾌할 것 같았다. 비유하자면 뭐랄까. 상대에게 수신 요금 부담을 주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아주 비싼 국제전화로 말이다. 심지어 이건 무시해도 무조건 빠져나가는 요금이다.

“두 마리를 보내면 두 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히죽거렸더니 정말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나는 일단 그 자리에서 두 마리의 시큐엘을 형상화시켰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들어가는 마나가 별로 많지 않았다. 아마 이사나였다면 적당히 부담스러울 양이겠지만 드래곤인 그에겐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돈이 넘쳐흐르는 부자에겐 버스 요금이 30원이든 3천 원이든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것과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 두 마리를 더해 봤지만 여전히 부담을 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네 마리나 되는 시큐엘을 떡하니 지탱하고 있어도 여전히 풍부하기 그지없는 마나를 느끼고 있자니, 라피스의 얄미운 얼굴이 ‘고작 이거야?’라면서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덕분에 가벼운 기분으로 시도했던 것이 점점 오기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네 마리에서 여섯 마리, 그 배의 배수가 될 때까지. 나는 거의 홀린 것처럼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다섯 마리가 넘어서면서부터는 근방에 시큐엘이 더 없어서 정령계에서 불러와야 했지만, 그 사실이 나를 막지는 못했다. 하다 보니 재밌기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몰두한 면도 있었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사십여 마리의 시큐엘이 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연해졌다. 라피스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고갈되지 않은 그의 마나가 황당해서였다. 이 정도의 양이면 인간일 경우 이미 심장에 쇼크가 와서 숨이 멎고도 남는다. 드래곤일지라도 꽤 벅찬 수준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라피스의 마나는 홀로 예외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여전히 풍성하기만 했다. 앞으로 같은 양의 시큐엘을 더 불러내도 거뜬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드래곤이야? 살과 피가 전부 마나로 된 것도 아니고, 육체를 가진 종족이 맞기나 한 건지 정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전대 엘퀴네스를 수백 번 소환해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을 했어야 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정령왕을, 그것도 다른 속성의 정령왕을 소환하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닐 텐데 녀석은 마치 근처 동네에 마실을 가듯이 불러댔다고 해서 이상하긴 했었다. 평소 그가 귀찮을 정도로 자화자찬을 해댄 것이 처음으로 이해가 됐다. 아니, 이 정도면 오히려 가진 능력에 비해 겸손했던 편이었다.

살다 보니 내가 라피스를 겸손하다고 표현할 날이 올 줄이야. 황당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데 정말로 사실이 그랬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골탕이고 뭐고 넘치던 의욕은 오히려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쉽게 체념하지도 못했지만.

“……확 전부 역소환이나 시켜버릴까.”

그 정도면 아무리 녀석이라도 조금은 타격을 입지 않을까. 정령왕이 된 입장에서 멀쩡한 정령들을 역소환시키자니 꺼려지기는 하는데, 까짓것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이미 초반의 목적에서 상당히 벗어난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암살 시도는 좀 더 우아한 방법으로 하는 게 어때?”

이어진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정말 실행으로 옮겼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온 음성에 나는 기세 좋게 역소환을 시도하려다가 움찔했다. 슬그머니 돌아보니 근처 나무기둥에 무언가가 기대어 서 있는 것처럼 긴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그것이 사람의 형태라는 건 금세 알아보았다. 누군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기척을 느끼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본능적으로 경계부터 했다.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은 희뿌연 별빛조차 허용하지 않아 사방은 먹물을 채워둔 것처럼 캄캄했다. 그 탓인지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상대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설마…… 그 녀석은 아니겠지.”

아니다. 아닐 거다. 애초에 날 약 올리기로 작심했을 녀석이 겨우 이 정도에 그 귀하신 몸을 친히 움직일 리는 없었다. 물론 시기상 그밖에 답이 없다는 건 아는데, 감정이 필사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부정했다.

“그 녀석?”

휘이잉.

때마침 부는 바람에 먹구름이 흐트러지면서 그 사이에 갇혀있던 달빛이 조금 고개를 내밀었다. 덕분에 시야가 조금 밝아지면서, 시커먼 덩어리에 불과하던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키에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미미한 바람이 불 때마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은 짙은 핏빛을 띠고 있었다. 안 그래도 화려한 얼굴은 은은한 달빛을 머금어 요사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아무리 세상에 같은 얼굴이 셋은 있다지만, 이렇게 생긴 사람은 전 차원을 뒤져도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피스.”

* * *

물의 정령을 잔뜩 머금은 채 크기만 부풀리던 먹구름은 자정이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래는 땅만 살짝 적실 정도의 가랑비만 내릴 예정이었는데, 시큐엘들이 모여 있던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 굵은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날뛰는 정령들의 기세를 보아하니 내일 아침까지는 줄기차게 내릴 것 같았다.

“눅눅해.”

습해진 공기에 투덜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닫혀 있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들어선 곳은 세실이 한창 잠들어 있는 방이었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카이테인과 엔딜이 나를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가, 뒤따라오는 사람을 확인하곤 눈을 크게 떴다. 엔딜이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표정이라면, 카이테인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존재를 발견한 놀라움과 반가움을 드러낸 얼굴이었다.

“라피스 님?”

확인하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내 뒤에 있던 남자― 라피스가 대답 대신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그래도 안면을 익혀둔 사이라 그런지 조금은 친근한 태도였다.

“라피스 님이 어떻게 이곳에…… 엘 님께 연락을 받고 오신 겁니까?”

서둘러 몸을 일으킨 카이테인이 앞으로 나서며 그가 들어오는 것을 맞이했다. 엔딜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라피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나를 향해 기묘한 미소를 던졌다.

“이 녀석 때문에 오긴 했지. 나도 목숨은 아까우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날 죽이려고 했거든.”

“예에?”

……지금 막 든 생각인데, 아무래도 저 녀석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당황한 카이테인이 내게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며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미 다 끝난 얘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망신을 주다니. 그렇게 달래뒀건만 기어이 내 복장을 뒤집는 녀석이었다.

“계속 이러기야? 사과했잖아!”

“사람 죽일 뻔해 놓고 사과만 하면 다냐? 그거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네.”

“주,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니까?”

“아, 그래. 넌 단지 내 마나가 어디까지 버티나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겠지. 수십 마리나 되는 시큐엘이 역소환되면 아무리 나라도 폐인이 되거나 죽는다는 자각까진 없었을 거야. 때론 무지가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봤는지 모르겠네.”

“…….”

“너 앞으로 어디 가서 함부로 계약하지 마. 드래곤들을 전부 비명횡사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빈정거리는 말에 이가 저절로 갈렸다. 화가 치미는데 차마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게 더 짜증났다. 왜 하필 그때 나타나서는! 아니, 안 나왔으면 멈추지 않았을 테니 더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온 게 차라리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원망의 시선을 보내자 라피스 역시 지지 않고 마주 응시해 왔다. 얄밉게 웃고 있는 얼굴 위로, 막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가 지었던 살벌한 얼굴이 겹쳐졌다.

“라피스.”

장식품처럼 미동이 없던 형체는 내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주문이 풀린 것처럼 활기를 띠었다.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몸을 일으키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벅저벅, 한 걸음씩 다가설 때마다 그를 가리고 있던 그늘들이 꺼풀을 벗듯이 치워졌다. 눈앞에 이르렀을 땐 화사한 달빛을 조명처럼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온전하게 드러나 있었다. 빈말로도 잘못 봤다고 우길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존재감이 주위를 가득 장악했다. 덕분에 나는 다시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라피스가 왔다는 것을.

‘이 녀석이 왜?’

물론 통신이 그렇게 끊겼으니 단단히 화가 났기야 했겠지만, 설마 직접 찾아오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얼빠져 있느라, 나는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범죄의 증거(?)들을 처리할 생각도 못 했다. 죄 없이 불려나온 수십 마리의 시큐엘들만 내 감정에 동화한 탓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 그들을 돌아보는 라피스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넌 가끔 나를 황당하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우글거리고 있던 시큐엘들의 모습이 일시에 사라졌다. 그가 소환을 해지하고 전부 정령계로 돌려보낸 것이다. 심지어 나를 유지하고 있는 마나조차 없애려 들기에 재빨리 이사나의 것을 가져와야 했다.

“아, 이건 좀!”

“이게 뭐. 너무하다고? 그게 남의 마나 갖고 장난 친 놈이 할 말이냐?”

“벼, 별로 큰 타격도 없었잖아.”

“타격이 없긴 왜 없어? 온몸에서 힘이 쭉쭉 빠져나가는데 그게 괜찮을 것 같냐? 그것도 모자라서 역소환까지 시키려고 했던 거, 다 들었거든? 설마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낮게 윽박지르는 눈빛이 흉흉해서 어깨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화가 나서 깜빡 잊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상당히 위험한 짓을 저지르긴 했다. 전체 마나량을 계산해 보지도 않은 채 무한정 정령을 소환해대다니. 버텨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생목숨을 잡을 뻔했다. 마나를 회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난리 쳐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잖아? 내 잘못이 분명한 상황인 건 아는데, 상대가 라피스다 보니 순순히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라피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만!

“그,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마나가 넘쳐나는 게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역소환을 시도해? 그만한 마나가 한꺼번에 역류하는데 내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냐?”

“결국 안 했잖아!”

“말은 똑바로 하시지? 안 한 게 아니라 내가 말을 걸어서 ‘못 한’ 거겠지.”

“그, 그건…….”

아니라고 하기엔 묻어 뒀던 양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무리 변명하려고 해봤자 내가 저지른 일이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입만 벙긋거리다가 나는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했다.

“미안해.”

“됐거든? 너 솔직히 말해. 지난번에 마나 역류시킨 것도 일부러 그런 거지?”

“지난번?”

“몰라? 감히 내게 피를 보게 해놓고 잊어버리셨다?”

무슨 소린가 싶다가 나는 예전에 마신관들로부터 공격당한 일을 상기했다. 쓰러진 이사나를 감싸다가 대신 맞았는데, 너무 정통으로 당해서 상당량의 마나가 역류했었다. 어렴풋이 라피스가 내상을 입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때 정말로 피를 토했던 모양이다.

“아니거든! 그땐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어!”

“어쨌든 난 너 때문에 하루하루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야. 당분간 너한테 내줄 마나는 없어. 쥐꼬리만 한 이사나의 마나로 어디 한번 잘 살아보시지.”

“크으윽!”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이후로 내가 그의 마음을 풀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는지, 누군가 그 광경을 지켜봤다면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난 라피스의 기분만 살피느라 정작 그가 나를 상처 준 사실에 대해선 사과를 받아내기는커녕 항의조자 할 수 없었다. 괜히 어설픈 복수를 시도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셈이었다.

그래도 라피스가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날 따라온 것은 의외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먼저 세실을 보러 가기를 요청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이왕 온 김에 세실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요구였던지라 냉큼 안내해 준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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