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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18화 (218/608)

제218화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제 와서는 딱히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누구하고든 이 갑갑한 심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엔딜과 만나서 동생을 치료해주기로 한 것, 그리고 재회한 후에 직접 살펴보게 된 세실의 상태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잠자코 듣고 있던 라피스는 모든 설명이 끝나자마자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넌 지금 스왈트 제국 안에 있다는 말이네?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는 거고.』

“……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

『나는 그게 더 거슬리는데?』

“아, 진짜! 너랑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이 와중에 논점 좀 흐리지 마! 그리고 내 위치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잖아! 추적 마법도 걸어놨으면서!”

『내가 직접 알아보는 거랑 네가 말해주는 거랑 같냐? 추적마법을 걸어놨다고 해서 내가 매시간 네 위치나 파악하고 있는 줄 알아?』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보이냐?』

솔직히 말하면 아닌 게 오히려 의외였다. 녀석의 집요한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물론 이렇게 말했다가는 단단히 사달이 날 게 분명하니 이번에도 참을 인을 새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라피스도 더 트집을 잡을 마음은 없었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하이 엘프와의 혼혈이라……. 꽤나 골치 아픈 일에 걸렸네. 거참, 수많은 엘프들을 놔두고 걔네들 중에서도 가장 극소수인 하이 엘프랑 엮이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녀석이야, 넌.』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 내가 엮이고 싶어서 엮인 것도 아닌데.”

『엮인 건 네 탓이 아니어도 지금 상황은 자업자득 같은데? 어차피 너랑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왜 억지로 고민을 떠안고 난리야? 치료술이 통하지 않는다, 이걸로 이미 얘기는 다 끝났구만. 그냥 안타깝게만 여기고 무시해.』

“어떻게 그래? 죽어가는 애가 불쌍하잖아.”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라고.』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한동안 눈앞에 보이지 않은 덕분에 주의력이 흐려진 나머지 이 망할 붉은 도마뱀이 입만 열면 속을 긁어대는 성격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내뱉는 말마다 이렇게 정이 뚝뚝 떨어지게 할 수 있다니.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 것 같다.

『……뭐,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

이어진 말에 나는 살짝 숨을 삼켰다.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방심하고 있다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녀석을 향해 차오르던 수많은 불만들이 일시에 사그라지고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방법이 있다고?”

누가 듣는다고 문제가 생길 것도 아닌데,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저절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숨죽이고 있는 내가 우스우리만치 라피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예 관련 없는 종으로 바꾸는 건 확실히 불가능해. 하지만 혼혈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여지는 있어.』

“아깐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여지라고 한 거 아냐. 정말 성공할지는 현재 상태를 제대로 살펴봐야 알아. 같은 혼혈이라도 되는 경우가 있고 안 되는 경우가 있거든. 그나마 이것도 나나 되니까 시도할 수 있는 거지. 다른 녀석들은 꿈도 못 꿀걸?』

갑자기 눈앞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라피스……!”

아마 지금 그가 눈앞에 있다면 얼굴에서 후광이 보이지 않았을까. 내 목소리가 밝아진 것이 느껴진 모양이다. 통신석 저편에서 라피스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도와주면 뭐 해줄 건데?』

“치사하게! 이런 일에 대가를 요구해야겠어?”

『내가 너 같은 자선사업가인 줄 알아?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움직이게.』

“자선사업가 아니거든! 넌 자비심이라는 것도 없냐!”

『드래곤의 자비심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내 감정은 비싸.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아무한테나 내줄 생각은 없어.』

아무튼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는 않을 텐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한숨이 연거푸 내쉬어졌다. 치가 떨리게 짜증이 나긴 했지만 저 거만한 도마뱀이 지금은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뭘 바라는데.”

『흐음~ 고분고분하니까 이상한데? 그냥 늘 하던 대로 하지그래? 계약 파기하겠다고 협박하는 거. 나한테는 그게 제일 잘 먹힌다는 거 알고 있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을 구하는 일인걸.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시키고 싶진 않아. 그건 치료받는 세실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것 같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넌 정말 특이한 녀석이야.』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너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시비는 그만 걸고 슬슬 원하는 걸 말하시지! 발끈하는 심정으로 대꾸하자 한동안 통신구가 잠잠해졌다. 설마 그대로 통신을 끊어버린 건 아니겠지? 평소 내가 자주 하던 짓이다 보니 가슴이 뜨끔해졌다.

“라피스?”

『정했어.』

길어지는 침묵에 불안해지려는 찰나 가벼운 음성이 떨어졌다. 왜 이렇게 잠잠한 건가 했더니 조건을 고민하느라 조용해졌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렇지. 갑자기 인심을 쓸 리는 없고, 이런 기회를 놓치려 할 녀석이 아니다.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이젠 어떤 걸 요구해 올지 몰라 불안해졌다.

설마 호수의 분수대 역할을 백 년에서 이백 년으로 늘린다든가, 그딴 걸 제시해 오진 않겠지? 부디 오백 년이 넘지는 않아야 할 텐데. 이 녀석이 평소에 나한테 바라던 것이 너무 황당무계한 것이다 보니 각오를 다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졌다. 그런데 정작 이어지는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우러 와줘. 굳이 내가 요청하지 않더라도.』

“……어?”

나는 멀뚱히 눈만 껌뻑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그런지 머릿속에 바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그것뿐?”

『뭐, 나한테 그럴 일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건 알아. 그래도 걸어둬서 나쁠 조건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게 끝이라고?”

『왜? 더 제시해?』

“아니.”

바로 고개를 저으면서도 기분이 몹시 찝찝해졌다. 라피스라면 처음부터 엄청난 걸 요구해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그게 전부라니. 이 녀석이 왜 갑자기 착한 척을 하지? 내 입장에서야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긴 한데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껴입은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속으로만 중얼거린다는 것이 그만 입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통신석에서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대답이 참 기가 막혔다.

『누군가 날 위해 대가 없이 나서준다는 거. 어떤 기분인지 조금 궁금해졌거든.』

“……뭐?”

『이 경우엔 대가가 없는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와줄 거라고 믿을 수 있게 되겠지. 그 정도면 꽤 비슷한 기분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

허, 나도 모르게 허탈한 숨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라피스의 목소리는 미지의 세계를 조우한 사람처럼 들떠 있기까지 했다. 그 안에 흥미가 담겨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눈앞이 갑자기 멍해지는 게, 이런 게 바로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구나 싶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도 진정이 되지 않아서 나는 허공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완전히 캄캄해진 하늘이 지금 내 마음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걸로 해.”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줬더니 상당히 딱딱한 말투가 됐다. 내 딴에는 최대한 좋게 넘어가기 위한 나름의 시도였다. 하지만 애초에 라피스 앞에서 그런 노력이 오래갈 리가 없었다.

『뭐야. 고작 그 정도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싫어?』

뚱한 대꾸를 듣자 부글거리는 속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처음의 마음가짐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아냐!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딴 조건 걸지 않아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우러 갈 거야! 그런 당연한 일에 무슨 기분을 내고 앉아 있어?”

『뭐? 그게 당연하다고? 왜?』

“왜냐니?”

『우리가 계약관계이긴 하지만 도움을 주는 건 요청이 있을 때뿐이잖아. 부탁받지 않은 일에 나서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아, 그렇군. 나한테도 자비심을 베풀겠다는 건가? 네 자비심은 별로 비싸지 않으니까.』

“아니야, 멍청아! 누가 친구를 자비심으로 돕냐!”

『친구?』

“그래! 친구!”

『네가 왜 내 친군데?』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겼다. 애써 눌러 참고 있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너 진짜 짜증나!”

상실한 이성 앞에서 판단력이 성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바로 몇 초 후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대로 통신구를 꺼버리고 만 것이다.

* * *

“엘! 어이, 엘?”

갑자기 사그라진 기운에 라피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다급한 부름에도 상대 쪽에선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질반질하게 빛나던 구체는 다시 본래의 거무튀튀한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통신이 끊긴 것이다.

“……이 녀석. 뭐하자는 거야?”

사태를 파악했다고 해서 황당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엔 더욱 어이가 없었다. 부탁하는 입장인 주제에 통신을 꺼버리다니. 애초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마지막에 비명처럼 외치던 소리를 상기하면 굉장히 화가 많이 난 것 같기는 했다. 열 받으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점이 단순한 성격의 그답기는 했다.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지.

똑똑―

“스승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갈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들어섰다. 라피스의 마법으로 10대 소녀의 모습을 하게 된 에이프릴이었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눈치챘지만 라피스는 돌아보기는커녕 구슬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뭐야.”

“안에서 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혹시 폐하의 일행과 연락이 닿으신 건가요?”

에이프릴의 눈동자가 라피스가 들고 있는 구슬을 힐끔힐끔 살폈다. 물어본다고 대답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엘 일행이 꽤 오랫동안 소식을 전해오지 않는다는 걸 눈치껏 파악하고 있었다. 점점 신경질적이 되어가는 라피스의 태도만 보아도 명백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구슬을 들고 방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안쪽은 늘 조용했고, 몇 분이 지난 후엔 찌푸린 얼굴로 다시 문을 박차고 나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때의 그는 건드리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로 살벌한 기운을 내뿜어서 아무도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전엔 분명히 대화 소리가 들렸다. 혼잣말로 떠들었다고 하기엔 오가는 고성에 다른 사람의 음성이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라피스의 기분이 평소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그녀의 부름을 무시하지 않고 대답한 것이 그 증거였다.

“폐하께선 무사하신 건가요? 어디까지 가셨대요? 이쪽의 상황에 대해선 알려 주셨어요?”

연락이 닿았다고 확신하자 에이프릴의 얼굴이 상기됐다. 황제의 기사들이 온 이후로 클모어의 상황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작이 칩거하는 동안 함께 칩거했던 가신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회유하는 것은 물론, 마신전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곳곳에 사람을 심어두었다. 또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은밀하게 병력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주축이 되어야 할 공작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여동생인 에이프릴이 그 중심에 섰다. 덕분에 요즘 그녀의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과나 다름없는, 라피스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일조차 중단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을 이사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지금쯤이면 낯선 여정에 몹시 지쳐 있을 황제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기운을 차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야속하고 애타서 에이프릴은 그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스승니임~”

“아, 시끄러.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부리지 말랬지.”

“지금은 아줌마 모습도 아니잖아요. 소녀인데 좀 봐주세요.”

“겉모습이 어려졌다고 정신연령까지 낮아졌냐?”

“진짜 너무해.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겠어요?”

“그건 됐고. 넌 친구가 뭔 것 같아?”

“네? 친구요?”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어, 에이프릴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럴 때 머뭇거리면 금방 내쳐진다는 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익혀둔 바였다. 그녀는 바로 대답을 이었다.

“으음, 글쎄요.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요?”

“가족 다음? 흥, 뭐야, 애초에 가족이랑도 가깝지 않은데 그것보다 멀다면 별거 아니네.”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는 얼굴이 어째선지 불퉁해 보였다. 에이프릴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보편적인 이미지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보통의 사람들에게 혈육은 제일 가까운 존재니까요. 그 다음으로 가까운 존재인데 결코 먼 사이는 아니죠.”

“……그래?”

“그럼요. 하지만 이것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요. 어떤 사람들은 혈육보다 친구를 더 아끼기도 하거든요. 사랑보다 우정을 택하기도 하고요. 자신의 전부나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어요.”

“목숨이라…….”

라피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느긋해진 얼굴을 보아 그녀의 대답이 꽤 흡족했던 게 분명했다.

“친구는 대가가 없어도 도와주나?”

“아무래도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친구를 몹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흐음.”

이번엔 명백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건지, 에이프릴은 도저히 그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당연한 부분들을 모르고 있는 그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곧 그의 과거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한평생 산속에 틀어박혀 마법만 연구하고 살았다고 했던가. 홀로 보낸 시절이 많았다고 하니, 인간관계에 무지한 것도 당연했다.

“소중한 친구라 이거지.”

“네?”

“그냥 혼잣말.”

흘러가듯이 대꾸한 후 라피스는 다시 구슬을 확인했다. 새카만 표면은 언제든 마력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통신을 연결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계획을 세웠다.

“에릴, 네가 들어온 지 3분쯤 됐나?”

“네, 그 정도쯤 되었을 거예요.”

슬슬 화가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올 시간이다. 라피스는 자신이 엘을 꽤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드래곤 세계에서는 한창때의 청년이라고는 하지만 몇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다. 애초에 감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는 데다 허술한 구석이 있는 엘이 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수가 뻔히 보이는데도 반쯤은 져주는 기분으로 어울려준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게 썩 좋지만은 않았는데, 왠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지금쯤 후회에 몸부림치고 있을 녀석을 구제하러 가볼까.”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는 몸놀림이 가벼웠다.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에이프릴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일어섰다.

“스승님? 어딜 가시는 거예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향해 당혹감을 담은 목소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멋대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야 언제나 있었던 일이지만 에이프릴은 직감적으로 그가 이곳을 아예 떠난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돌아왔을 땐 더 이상 그녀의 스승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라피스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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