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14화 (214/608)

제214화

“네? 아아, 맞아요. 카이테인 씨와 엔딜을 만나러 가야 해요.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 엘프는 나도 인상적이었거든.”

그러고 보니 엔딜을 만났던 곳에서 카노스와 처음 만났던가. 정확히는 루카르엠이긴 했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만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카노스도 그 당시를 상기했는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냐하하, 좋아. 인심 썼다. 가기 전에 한 달 치 만회해 줄게.”

“네? 그게 무슨…….”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싶더니, 한순간에 주변의 풍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 수림 안의 공터 안에 서 있었다.

찌르듯이 높은 절벽들도, 덤불 안에서 입구를 벌리고 있던 동굴의 모습도, 점차 흉흉해지고 있던 살기도 어느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울타리 쳐진 정원과 잘 가꾼 텃밭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초가 가득 심어진 마당 너머로는 낡은 지붕을 걸친 작은 집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다분히 묻어나는 정경은 아무리 봐도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숲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꺼풀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넋을 놓고 있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화창하기만 하던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주변을 맴도는 정령의 분포도도, 흐르는 공기의 냄새조차 달랐다. 나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 사실 이쯤 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꺼번에 다른 장소로 이동된 것이다.

“이게 대체…….”

“빠른 운행을 약속드리는 카노스 발 신속열차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착한 장소는 엔딜의 집, 엔딜의 집 앞이 되시겠습니다.”

“……!”

황망해하는 우리들을 향해 마치 기차역에서나 울려 퍼질 것 같은 안내 말이 떨어졌다. 아마 그 의미를 알아들은 건 나밖에 없을 테지만. 역시나 일행들은 생소한 용어들에 당황스러워하기만 했다.

나는 숨을 크게 삼킨 후 카노스를 올려다보았다. 엔딜의 집 앞이라니. 내 기억에 의하면 그의 집은 스왈트 제국의 국경 지대에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대륙을 껑충 건너온 것이다. 그가 들러야 할 장소를 새삼 확인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한 달 정도가 아니잖아요?”

“기간은 단축할수록 좋은 거 아니었어?”

“그, 그거야 그렇지만.”

“이왕 베푸는 김에 인심 좀 썼지. 말했잖아. 난 친절하다고.”

한껏 으스대는 얼굴도 이번만은 얄밉지 않았다. 아무튼 남을 놀라게 하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길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갔다(이때 데르온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몰래 빠져나온 거라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자리를 비운 걸 들킬 거야.”

“네,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서 가보세요.”

“응, 혹시 무슨 일 생기면……아, 그렇지. 엘, 손 내놔봐.”

“손이요?”

무심코 손을 내민 즉시 나는 바로 후회했다.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손을 다시 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손등에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헉!”

“흡!”

사방에서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길이 카노스를 향해 쏟아져 들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죠.”

“작별 선물.”

“하?”

작별선물이 손등 키스라. 이건 마지막까지 날 농락해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인가? 훈훈하게 헤어지나 싶더니 과연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신이다. 한껏 얼굴을 찡그리자 카노스가 푸흐흐 웃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인장을 새긴 것뿐이니까.”

“네? 인장……요?”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니까, 나랑 연락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지금 같은 시기에 스왈트 제국에 있으려면 그게 더 쓸모가 많을 거야. 네 아버지가 내려준 쓸데없이 눈에 띄는 인장보다.”

시선을 내리자 정말로 손등에 새하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원형의 테두리 안에 한 쌍의 박쥐 날개가 펼쳐진 모습이었다. 마신의 문장은 처음 보는 건데도 왠지 눈에 익었다. 물론 이쪽이 훨씬 더 화려하고 섬세한 형태긴 했지만, 기본 구조가 친숙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배트맨?”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하게 바라보는 눈길에 나는 급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이 상황에 실감이 들었다. 설마 마신의 인장을 얻게 될 줄이야.

그의 말대로 지금 시기의 스왈트 제국에선 마신관의 신분이 훨씬 편하긴 했다. 쓸데없는 추격도 받지 않을 거고, 무엇보다 마신전의 동태를 살피는 데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아마 그것까지 전부 감안해서 준 것이겠지만.

“이제 내가 친절하다는 걸 좀 믿겠어?”

“……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긴 한데요…… 근데 왜 하필 이런 방식이에요? 엘뤼엔은 그냥 손만 가져다 댔었는데. 혹시 신마다 인장을 새기는 방식이 다른 건가요?”

“아니, 방법은 상관없어. 그냥 어쩐지 너한테는 이런 식이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지. 여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잖아, 냐하하하!“

“……전 남자인데요.”

설마 이 말을 이 남자 앞에서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지금 막 마주친 시점도 아니고, 그 입으로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아들’이라고 언급했던 사람이 새삼 이런 식으로 나오니 배신감마저 들었다. 불퉁하게 노려보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에이~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어차피 정령은 무성인데. 성별 같은 건 그냥 둘 다 쓰면 되지.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얼마나 좋아? 이게 얼마나 큰 이점인데 그걸 제한하려고 해?”

“전 별로…….”

“그게 다 아직 경험을 안 해봐서 그런 거야. 생활해 보면 의외로 여성 쪽이 더 마음에 들지도 몰라. 또 알아? 나중엔 여신이 된다고 할지.”

“그게 말이 돼요?”

“왜 안 돼? 나도 원래 여성체였는데 남신이 된 건데?”

……뭐라구요.

나도 모르게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젠 어지간히 굉장한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히 여겼던 모양이다.

저 훤칠하게 큰 남자가, 정령왕 시절엔 여성체였다고? 묘하게 소녀 같이 굴던 말투들이 실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건가? 그런 건가?

어느새 주위가 지나치게 고요해져 있었다.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라는 증거라서 왠지 마음이 놓였다.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며, 카노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정도야?”

“……차라리 엘뤼엔이 여성체였다고 하는 게 충격이 덜할 것 같아요.”

“아, 확실히 그쪽이 더 어울리긴 하지.”

카노스는 아무렇지 않게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라 이번에도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근데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왜 엘뤼엔을 엘뤼엔이라고 불러?”

“네? 그야 엘뤼엔이니까요?”

“아니, 그거 말고. 네 경우엔 좀 더 친근한 호칭이 있잖아. 아버지라고 안 해?”

아, 그런 의미였나. 생각지 못한 질문이라 머릿속이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니. 왜였지? 처음엔 익숙지 않아 이름으로 불렀고, 그게 고정이 되다 보니 이젠 새삼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를 시기를 놓쳤다. 내가 대답을 잇지 못하자 카노스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다음에 만나면 아버지라고 불러줘. 별말은 안 하고 있어도 그 녀석, 은근히 서운해하고 있을걸?”

“서, 설마요. 그런 호칭에 연연해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가 그렇게 여기고 싶은 것뿐은 아니고?”

그 말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저 나 혼자만의 판단일 뿐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아버지라는 점을 강조하던 모습을 봐서는 오히려 호칭에 신경 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강요하지 않는 건 내가 그럴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겠지. 강압적으로 부자 관계를 맺은 주제에, 이런 부분은 섬세하게 다루는 게 왠지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든가?”

“아뇨! 그건 아니에요!”

짓궂은 표정으로 하는 질문에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부르라고 하면 몹시 창피할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쑥스러움의 문제이지 싫어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 벽을 넘어서는 게 의외로 어려웠다. 복잡해진 기분으로 서 있는 나를 보며 카노스는 묘하게 웃었다.

“……하긴 그 시절엔 이미 편하게 부르고 있었지. 애초에 의미가 없는 시험이었나? 그게 자각을 전부 마친 후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딱히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단 말이지.”

골똘히 생각이 잠긴 그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어가 생략된 문장이긴 했지만 왠지 직감적으로 나한테 하는 말이라는 걸 알 것 같았다.

“무슨 얘기예요?”

“응~ 엘뤼엔이 전부 옳았다는 얘기.”

“네?”

“귀여운 후배를 둬서 기쁘다는 뜻이야.”

“그게 대체 무슨…….”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화법이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카노스는 친절하게 설명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돌연 그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말했다.

“아아, 이제 정말로 가야겠다. 그럼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엑? 잠깐만요, 카노스! 무슨 뜻인지는 설명을……! 카노스?”

갑작스러운 인사에 나는 서둘러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카노스의 모습은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진 뒤였다. 정말 그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여운을 남길 겨를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나버린 작별이었다.

“…….”

“…….”

나는 물론 지켜보던 일행들 역시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그들은 곧 비틀거리며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거친 바다를 표류하다 온 것처럼 지친 모습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타격이 커 보이는 데르온을 살폈다.

“괜찮아요?”

“예? 아아, 네, 아뇨. 아니, 네. ……으으음. 죄송합니다. 사실 저도 제가 지금 어떤지를 모르겠습니다.”

횡설수설한 어조로 대답한 후 데르온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받아들였다고 생각은 하긴 했는데 말입니다. 저렇게 혼을 빼놓고 사라지는 모습이 루카르엠이랑 너무 똑같아서. 뭔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랄까요. ……정말 루카르엠이 마신이었군요. 새삼 그게 왜 이렇게 충격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그럴 만도 해요. 그리 오래 접하지 않았던 저도 그 사실을 되새기면 당황스러운 걸요. 데르온은 저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루카르엠을 알아왔을 테니 여운이 더 길게 갈 수밖에요.”

“서로 알고 지낸 지만 몇천 년이 넘었습니다. 워낙 제멋대로인 남자라서 부딪히는 일이 종종 있었죠. 마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니 똑바로 좀 살라고 하소연한 적도 있었는데…… 크윽!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는 창피한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다른 일행들도 비슷한 시선이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마족에 관해서라면 좋은 인식이 없는 시벨리우스조차 동정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마 데르온은 앞으로도 한동안 기나긴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새삼 카노스가 얼마나 악독한(?) 짓을 했는지 실감이 들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막 귀가 중인 걸로 보이는 남자가 양손에 바구니를 든 채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약초로 보이는 마른 풀들이 한가득 담겨 있는 상태였다.

“여러분은 누구신데 이곳에…… 엘퀴네스 님?”

경계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살피던 남자가 일행들 사이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나는 혼란에 빠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카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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