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그렇구나. 알리사와 이사나가…….”
과거에 스치듯이 지나쳤던 장면들이 다시 인상적으로 와 닿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강렬하게 마주친 시선이라든지, 궁지에 몰린 알리사를 돕기 위해 거리낌 없이 나섰던 이사나의 모습. 종종 서로 마주보며 웃던 얼굴까지.
어쩌면 우리가 이 제국으로 오게 된 것도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해 마련된 안배였던 건 아닐까. 당사자는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괜히 설렜다. 하지만 들떴던 기분은 곧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카노스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뭐, 그래도 너무 기대하진 마. 저 둘이 정말 결실을 맺을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할 문제니까. 순조롭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거든.”
“네? 왜요? 운명의 별이면 서로 이뤄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시대에 태어난 제왕의 별은 둘이라서 말이야.”
“엥?”
“한마디로 말해서 저 소녀에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두 개라는 소리지.”
“……!”
그 말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알리사를 쳐다봤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경직된 내 얼굴을 의아한 듯이 바라보던 그녀가 흥미를 다시 거두기까지, 묵묵히 견딘 잠깐의 시간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설마 삼각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
잠시 후 알리사의 시선이 떨어진 후에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질문하면서도 내가 오해한 것이길 바랐는데, 카노스는 야속하리만치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했잖아.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무조건 그렇게 된다고 봐야 할걸?”
“그럴 수가…….”
“각오 단단히 해둬. 그냥 귀여운 소꿉놀이 수준이 아닐 테니까.”
“그, 그건 또 무슨 뜻인데요?”
불안해하는 내게 카노스는 짓궂은 미소를 보냈다. 이후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는 크게 낙담해야 했다. 몇백 년 전에도 제왕의 별이 두 개였던 적이 있는데, 그들이 벌인 전쟁으로 수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반려를 차지하기 위해 시작된 다툼이 정복 전쟁으로까지 번진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 두 제왕을 낳은 제국은 알폰프와 카터스 제국이었다고 했다. 운명의 별을 타고난 두 제왕은 서로 부족한 구석 없이 매력적인 남성들이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 점이 문제가 됐다. 둘 다 괜찮다 보니 반려성이 그들 사이에서 갈 곳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두 제왕은 집권하는 동안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단다. 말이 좋아 ‘집권하는 동안’이지, 장장 60년이 넘는 기나긴 기간이었다. 지독한 전쟁은 반려성이 죽고 나서야 간신히 끝을 고했지만, 그 사이에서 백성들의 삶은 말도 못하게 피폐해졌다. 그래서 아직도 두 제국은 원수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의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라 나는 연신 신음을 흘렸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비슷한 상황에선 더더욱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즉, 머지않은 미래에 이사나에게 닥칠 상황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 이사나 말고 다른 제왕의 별은 어디에 있는 누구예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이전처럼 다른 제국에 있을 수도 있고, 또는 같은 제국 안에 있을 수도 있고.”
“하아아…….”
설마 그게 대공인 건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기분이라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공이면 문제겠지만, 그가 아니라고 해도 상황이 썩 낫다고 할 순 없었다.
도대체 이사나의 팔자는 왜 이렇게 사나운 걸까. 제위를 두고서도 싸워야 하는데 이젠 운명의 연인까지 다른 자와 두고 다퉈야 하다니. 아예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꼬여 있는 걸 보니 더 안타까웠다.
“……으음, 이렇게 된 거. 다른 쪽을 만나기 전에 일찌감치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해버릴까. 알리사가 아무것도 모를 때 낚으면 될 것 같은데.”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를 보며 카노스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지금 그 표정, 제법 정령왕다웠어.”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무튼 난 충고했으니 잘해 봐. 아아, 앞으로 일어날 재화를 미리 알려주다니. 나라는 신은 너무 쓸데없이 친절해서 탈이라니까.”
“……그것참 근심거리만 더 늘려주셔서 참 감사하네요. 이왕이면 다른 쪽 제왕의 별이 누군지도 알려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알아서 뭐하게? 네 성격에 그자를 찾아가 미리 제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윽, 그건 그렇지만…… 최대한 만남을 늦춰본다든가.”
“어차피 피할 수는 없다니까. 그런 걸 고민할 시간에 네 계약자더러 저 아가씨 마음이나 사로잡아두게 해. 그러는 편이 좋게 풀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으니까. 그쪽 입장에선 선수를 놓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약 오를걸? 네 둔한 계약자랑은 다르게 그쪽은 운명의 별에 상당히 관심이 많거든.”
“누군지 알기는 하는 거군요?”
불만스럽게 응시하는 시선에 카노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하긴 명색이 마신인데 그 정도도 모르진 않겠지. 답해줄 의사가 없는 상대를 향해 괜한 진을 뺄 생각은 없어서 나는 빠르게 단념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안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카노스의 말처럼 이사나를 부추길 수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운명에 관한 것들은 싫어하는 녀석인데, 이 사실을 알면 오히려 알리사를 밀어내려고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으면 상관없지만, 그렇게 쉽게 거부할 수 있는 거라면 애초에 운명이란 이름으로 정해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사나는 이미 알리사에게 꽤 많은 마음을 내주고 있었다. 섣불리 밀어냈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돼서야 후회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지금은 모르고 있는 게 오히려 약이었다.
그래도 일찌감치 연이 닿았으니 다행인 건가. 서로 감정도 싹튼 것 같으니 이대로 좋은 분위기를 끌어간다면 은근슬쩍 결혼을 추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알리사의 나이가 어리니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이긴 했다. 다른 제왕의 별이 어디에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두 사람이 이뤄진 후에야 나타나길 바랄 뿐이었다.
* * *
<용사님!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이제 출정할 시간이에요! 이 파이어 버스터! 모처럼 섬기게 된 주인님을 위해 끝까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자, 용사님! 얼른 마왕을 물리치러 가요! 네? 네?>
한 장소에서 지체하는 동안 어느새 꾸역꾸역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바깥 공기에 웬만큼 적응이 되었다 싶었는지, 파이어 버스터가 본격적으로 본성을 드러냈다. 재촉하는 소리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이사나가 조곤조곤 타일렀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알리사가 나섰다.
“야, 시끄러! 용사는 무슨 용사야? 이사나 씨한테 억지 좀 부리지 마.”
<뭐라고요? 외부인은 빠지세요! 나와 용사님의 교감을 방해하지 말라고요!>
“내가 왜 외부인이야? 난 이사나 씨의 친구라고!”
<친구? 배신하면 남보다 못한 그거요? 어머나, 알량하기도 해라.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용사님과의 관계를 내세우고 싶나요? 정말 어리시네요.>
“뭐어? 무슨 이딴 검이 다 있어? 네가 정령검이면 다야? 정령검이면 다냐고!”
<물론 정령검이면 다죠! 이래 봬도 저는 이프리트 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는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라고요!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 여자와는 차원이 다른 몸이에요!>
“하! 이거 왜 이러셔! 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거든? 재능이 무궁무진한 땅의 정령사라고! 이게 어디서 사람을 차별하고 난리야?”
가볍게 시작한 말다툼이 어느새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이사나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두고 가자.”
두고 가자는 건 물론 검이다. 알리사에게 잘 보여도 모자를 시기에 오히려 점수를 깎아 먹는 짓을 하고 있다니. 물을 흐리는 검 따위, 동의만 얻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던전에 집어 던지고 올 의향이 충분했다. 그러자 용케 그 낌새를 파악한 파이어 버스터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네에? 절 놔두고 가자뇨! 안 돼요! 싫어요! 나빴어!>
“네 의사 따윈 상관없거든?”
<히이잉, 그런 게 어딨어요! 엘퀴네스 님은 너무 차가워요! 본인이 엘퀴네스 님이라는 것도 속이시더니! 저한테 진짜 왜 이러세요오!>
높아지는 목소리에 원성이 섞이는 걸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원래도 칭얼거리는 편이긴 했지만 내 정체를 알게 된 후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딱히 내가 녀석에게 정체를 알려줬던 건 아니었다. 이사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인 후 파이어 버스터가 저절로 깨달은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에 대한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에고 소드 중에서는 주인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들이 있는데, 파이어 버스터가 바로 그런 종류라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정령왕이란 걸 알았다 해서 태도가 정중해지진 않았다(마신한테도 막 나가는 강심장이니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본인을 이그니스라고 알고 있다 보니, 다른 이들보다 날 대하는 시선이 훨씬 호의적이긴 했다. 그게 너무 과한 나머지 응석으로까지 이어져서 문제였다.
“난 속인 적 없어.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어쨌든 서운해요! 정령왕이시라면 이럴 땐 제 편이 되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불의 정령이라 차별하시는 거죠? 정말 너무하세요오!>
“시끄러. 너무한 건 너잖아. 얌전히 따라가겠다더니 왜 말이 바뀌어?”
<그, 그치만 용사를 모시는 건 제 로망이었단 말이에요!>
“그건 네 사정이고.”
<헉!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엘퀴네스 님은 바보! 바보예요!>
“한 번만 더 떠들면 진짜 두고 간다.”
진심을 다분히 실은 협박에 파이어 버스터는 울먹거리면서도 조용해졌다. 나는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잠잠해진 검을 찝찝한 기분으로 노려보았다.
“저걸 정말 데려가도 괜찮을라나 몰라. 미안해, 이사나. 나 때문에 괴상한 녀석을 떠맡게 돼서.”
“하하, 아냐. 난 괜찮아. 말이 좀 많긴 하지만 파이어 버스터는 좋은 검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응. 직접 잡아보니까 확실히 알 것 같아. 평범한 검과는 기운 자체가 달라. 아무리 대단한 장인을 찾아다녀도 이렇게 훌륭한 검을 얻긴 쉽지 않을 거야. 한 사람의 검사로서 영광이라고 생각해.”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강한 검이었다고 하더니, 그래도 쓸모가 있긴 한 건가. 사실 난 아직 좋은 무기를 알아보는 눈은 없어서인지 파이어 버스터의 대단함이 잘 와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사나가 저렇게 칭찬할 정도면 꽤 좋은 검이긴 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주인인 그의 마음에 들었으니 앞으로 쫓겨날 염려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저 수다만은 확실히 봉해둘 필요가 있어서 나는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아무튼 너, 우리랑 한 약속 어길 생각하지 마. 있는 듯 없는 듯이 얌전히 지내. 알리사나 다른 일행들한테도 함부로 굴지 말고. 여기서 네가 무례하게 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명심해 둬. 알았어?”
<치이, 알았어요.>
파이어 버스터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여전히 불손한 말투이긴 했지만 한결 맥이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엘, 라피스라는 녀석한테는 언제 연락하는 거야?”
시벨리우스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날이 저물어가서인지 찌르듯이 선명하던 수풀의 색감이 한층 낮은 톤으로 변해 있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하긴, 여긴 장소가 좀 그렇지.”
그는 내 말에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나와 같은 것을 의식한 듯했다. 이 지역의 터줏대감인 지옥 땅거미들 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도 다수의 살기가 지척에서 느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함부로 덤벼들지는 않는 상태였지만 점차 전세를 갖춰가고 있는 것이 곧 공격할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수가 최소 수천은 되어 보였다.
어지간하면 우리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을 텐데, 무모하게 덤비려는 걸 보면 상당히 많이 굶주려 있는 모양이다. 하긴 저렇게 숫자가 많아서야 먹잇감이 부족하긴 할 것이다. 금역으로 지정된 지 꽤 되었다고 하니 사람의 발길도 뚝 끊겼을 테고.
어쨌거나 이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순식간에 둘러싸일 것이 분명했다. 라피스에게 당장 연락을 보낸다 해도 그가 도착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때 아닌 전투를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한번 시작하면 소탕까지 가야 할 것 같아서 일단 귀찮다) 이왕이면 안전한 장소로 이동한 후에 연락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에 앞서 나는 일단 마족의 알부터 배낭 안에 챙겨 넣었다. 아무리 깨지지 않는다지만 그냥 들고 다니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카노스 님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 카노스를 돌아보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난 다시 루카르엠으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마저 진행해야지. 너희들은 데리러 올 사람을 기다린다고?”
“네, 제가 모두를 데리고 공간이동을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에요. 언령으로는 저밖에 움직일 수가 없으니 불편하네요.”
“정령왕도 할 수 있긴 해.”
“어? 정말요?”
생각지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뜨자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배우면 되거든. 뭐, 정령은 애초에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존재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익힐 수 없지만. 편법을 사용하면 배울 수 있다고 들었어. 궁금하면 네 아버지한테 물어보든지.”
“아버지? 엘뤼엔 말이에요?”
“응, 정령왕들 중에서도 그가 이룬 마법 수준이 가장 높았을 거야. 공간 이동 정도는 할 수 있었을걸?”
헉, 그랬단 말이야?
엘뤼엔은 역대 최강의 엘퀴네스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마법에도 능통했을 줄은 몰랐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라는 건 바로 그 같은 존재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어쨌거나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삶에서 청출어람은 영원히 꿈도 꾸지 못할 단어라는 거 말이다.
애초에 차이를 알아서 그런지 새삼 비참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쉽게 배울 기회가 생긴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엘뤼엔이라면 적어도 가르치면서 이프리트처럼 자존심을 긁어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가르쳐달라고 해봐야지.’
마법을 배우면 이사나한테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굳게 다짐한 후 나는 배웅할 생각으로 카노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이 묘하게 웃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는 길에 들를 곳이 하나 있었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