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이후로 그녀는 지나칠 만큼 이사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사나도 그 기분을 배려해서인지 묵묵히 그녀의 눈치만 살폈다. 물론 처음엔 그 나름대로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알리사가 격한 반응을 일으키는 바람에 별로 좋은 결과를 거두진 못했다. 말을 걸자마자 바짝 가시를 세우니 없던 용기마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별로 걱정이 되진 않았다. 아예 외면하고 있는 거라면 모를까, 알리사 역시 이사나를 다분히 신경 쓰고 있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를 흘끔흘끔 살피는 것이 그 증거였다. 바로 지금처럼.
“라피스 님한테 연락은 어떻게 하지? 통신구는 라피스 님 쪽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잖아.”
“정령을 보내면 될 거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가벼운 의논을 나누고 있으려니 쳐다보는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워낙 노골적이라 이사나 역시 금방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알리사, 왜? 물어볼 거 있어?”
피하기 바쁘던 소녀가 쳐다봐 준 것이 기뻤는지 이사나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시선을 맞추자 알리사의 얼굴이 단숨에 뻣뻣해졌다.
“아, 아무것도 아냐!”
빠른 대꾸와 함께 그녀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기대를 품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이 단숨에 흐려졌다.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엔 기운이 쭉 빠져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눈을 질끈 감은 알리사가 굳게 결심을 다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응?”
돌아보는 이사나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나는 아련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순하긴 해도 단순한 성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쉬운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래도 덕분에 알리사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망설이듯 벙긋거리기만 하던 입술이 뚜렷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최, 최종 목적지 말이야. 이곳에서의 용건은 끝났으니 이제 이사나 씨의 본국으로 가는 일만 남은 거잖아? 그런데 아직 어느 제국 사람인지 말해 준 적 없는 것 같아서.”
다소 굳어 있긴 하지만 제대로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상태긴 했으나 긍정적인 반응임은 틀림없었다. 자신이 주도해서 계속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왔으니 그녀 역시 미안하긴 했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똑바로 버티고 있는 고개에서 어떻게든 다시 화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행여 다시 흐름이 끊길세라 이사나 역시 서둘러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우리가 갈 곳은 스왈트 제국이야.”
“스왈트? 마신전의 본단이 있는 신성제국 스왈트 말이야?”
“응, 맞아. 알고 있구나?”
“대륙에서 신성제국은 스왈트 제국이 유일하잖아.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지금 거기 가도 돼? 곧 내전이 일어날 거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도 알아?”
“무, 무시하지 마. 서녀이긴 해도 백작 가문에서 자랐는걸. 아버님이 다른 귀족들과 국제 정세에 관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와, 그렇구나.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니 굉장하네. 알리사의 나이엔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텐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그 한마디에 알리사는 긴장을 완전히 푼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굳어 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 정도는 당연히 기억하지. 스왈트 제국의 황제는 나이가 어리다며? 정무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방탕하게 놀고먹기만 해서 주위에 황제를 이용해먹으려는 간신배들만 가득하다고 들었어.”
……비록 중심 화제가 이사나에게는 비극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알리사는 다시 예전처럼 친근한 태도로 재잘거렸다. 이사나는 거북해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는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 그래?”
“응, 그 사람들이 황제를 꼬여내서 숙부인 섭정왕을 제거하려고 했대. 하지만 전세가 뒤집혀서 오히려 섭정왕 쪽이 이겼다던데? 황제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달아나서 지금은 후일을 도모하는 중이라고 하더라고. 그래 봤자 이미 중앙 귀족 대다수가 섭정왕의 편이라 내전이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고 했지만.”
“으음,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구나.”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말에 나까지 식은땀이 흘렀다. 아마 알리사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장본인 앞에서 험담한 꼴이나 다름없다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순수하게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시선에 이사나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진지한 눈으로 알리사를 응시했다. 전부 털어놓을 결심을 굳힌 얼굴이었다.
“나이가 어리고 미숙한 황제였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숙부를 치려고 한 적은 없었어. 그런 유혹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반대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아. 오히려 가신들은 전부 반대하는 쪽이었지. 선황 폐하가 서거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럴 경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섭정왕은 평판이 좋은 사람이라 건드려 봤자 득보다 실이 더 컸거든. 어차피 성인이 되면 저절로 돌려받을 자리인데 괜히 무리해서 취할 필요가 없었어. 급습해 온 것은 오히려 섭정왕 쪽이야.”
“정말? 황제가 아니라 섭정왕 쪽에서 공격한 거라고?”
“그래. 그의 병사들이 새벽에 갑자기 쳐들어와 황궁을 점거했어. 눈치채는 게 늦어서 몰래 빠져나가는 게 고작이었지. 황궁의 시종들과 친위대 기사들이 몸 바쳐 지키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붙잡혔을 거야.”
“그렇구나. 근데 이사나 씨는 그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하하, 겪은 장본인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
“장본인?”
잠시간 어리둥절해하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설마…….”
굳어버린 얼굴에 사라졌던 경계심이 다시 뚜렷하게 떠올랐다. 이사나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사나 란느 스왈트. 이게 내 본명이야. 처음부터 밝혔어야 했는데 이제야 말하게 돼서 미안해.”
“……이사나 씨가 스왈트 제국의 황제 본인이라고?”
“그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알리사는 헛숨을 삼켰다.
“그, 그럼 그동안 거론되던 대공이라는 사람이 혹시…….”
“그가 내 숙부야. 신탁을 위조해서 내 아버지를 죽이고 피로 얼룩진 제위를 탐하고 있는 섭정왕, 유카르테 대공이지. 나는 돌아가는 대로 그를 끌어내리고 거짓된 소문을 바로 잡을 생각이야.”
“…….”
충격이 컸는지 알리사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혼란스럽게 일렁거리던 눈빛이 차분해졌다가 다시 복잡해지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사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 네 입장도 이전과는 달라졌겠지. 다시 한 번 물을게, 알리사. 아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이게 마지막일 거야.”
“돌이킬 기회라니…….”
“너도 알다시피 스왈트 제국은 내전을 피할 수 없어. 나와 함께 가면 너와는 상관없는 전쟁에 휘말리게 될 거야. 그래도 함께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갈 거야!”
돌아온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 선뜻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이사나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을 본 알리사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우린 이미 한 배를 탄 운명 아니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물어보는 게 오히려 더 섭섭해.”
“하지만……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설마 내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덥석 같이 가겠다고 한 줄 알았어? 이사나 씨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건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알았다고 말했잖아. 설마 황제일 줄은 몰랐지만. 새삼 결정을 재고할 정도는 아니야.”
“저, 정말?”
“당연하지! 엘 님이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아. 놀라기는 그때 이미 다 놀랐다고. 그리고 우린 약속도 했잖아.”
“약속……?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또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당신들을 그 자체로만 보겠다고. 그건 이사나 씨의 외모와 신분까지 전부 포함했던 거 아니었어?”
“기억……해 줬구나.”
이사나는 참았던 숨을 낮게 터트렸다. 알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울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약속은 나도 기억하고 있다. 그녀를 일행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날 이사나가 미리 내걸었던 조건이었다. 아마도 이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해 포석을 깔았던 거겠지만, 실제로 지켜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 그걸 벌써 잊었을까 봐? 뭐야, 없던 일로 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
이사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으면 돌아서기라도 하는 양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알리사가 활짝 웃었다.
“그럼 이사나 씨도 의심하지 마. 난 그 약속을 지킬 거니까. 뭐, 이사나 씨 원래 모습이 적응이 안 돼서 조금 서먹하긴 했지만. 이젠 괜찮아. 사람이 달라졌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까 성격은 여전한 것 같네. 내가 아는 이사나 씨 그대로라 안심했어. 황제처럼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랑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데 나야 손해 볼 거 없지.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장난스러웠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대꾸가 이어졌다. 그 순간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이사나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나갔다. 음울하던 공기가 걷히고, 주위가 빠르게 화사해졌다. 마치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에 갑자기 선명한 색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뻐하고 있는지 절절할 정도로 전해져서, 나까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의외였던 건 알리사의 반응이었다. 새삼 눈앞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듯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이다.
“다행이다. 난 알리사가 날 어려워하면 어떻게 하나 했어.”
“바, 바보 같긴. 내가 고작 그런 거에 쩔쩔맬 사람으로 보여? 내가 얼마나 담이 센 사람인데!”
“응,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알리사.”
북받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듯, 이사나가 알리사를 덥석 끌어안았다. 날 때부터 엄격한 예법을 익혀 온 그로서는 흔치 않은 행동이었다. 아마 정신이 들면 누구보다 가장 많이 당황할 테지만, 지금만큼은 체면이나 주위의 시선은 전부 잊은 듯이 보였다. 덕분에 알리사의 얼굴은 아예 붉게 타오르다 못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도 밀어내지 않고 얌전히 안겨있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흐음, 나이가 어려도 별의 결속은 강하다는 건가. 하긴 운명의 별들 중에서 가장 재밌긴 하지.”
“응? 그게 무슨 소리에요, 카노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사나와 알리사를 보고 있던 카노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 꼬마 아가씨를 가호하고 있는 별 말이야. 그녀가 제왕의 반려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건 알지?”
“어? 그게 진짜였어요?”
언젠가 대장장이 팔론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열렬히 설파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알리사는 푸른 별 아래 태어난 반려성이었다. 그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반쯤은 동화 같은 이야기로 여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운명의 별보다는 땅의 정령사로서의 특징이 더 부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인 카노스가 직접 언급할 정도면 그 운명이란 게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반려성은 혼자 나타나지 않아. 반드시 제왕의 별과 동시대에 태어나게 되어 있지. 그래서 반려성이 나타났다는 건 제왕의 별도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해.”
“으음, 그럼 처음부터 짝이 정해져 있는 거네요. 다른 사람이랑은 이뤄질 수 없는 거예요?”
“어느 한 쪽이 죽지 않고서야 거의 어렵다고 보면 돼. 운명에 속해 있는 별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겨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말거든. 마치 지금 네 계약자와 저 아가씨처럼 말이지.”
“그렇군요. 이사나와 알리사처럼……헉? 자, 잠깐만요! 이사나요? 그럼 이사나가 제왕의 별이란 거예요?”
깜짝 놀라 외치자 카노스는 빙긋 웃었다. 그것도 몰랐냐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을 보면서 강한 운명의 이끌림 같은 거 느끼지 못했어?”
“이사나가 유난히 신경 쓰는 눈치는 있었지만…….”
“하하, 하긴 이런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정령왕들 중에서는 트로웰 정도겠지. 나중엔 좀 더 구분할 수 있게 될 거야. 운명의 별을 타고난 아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튀거든.”
나는 조금 묘해진 기분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뒤늦게 정신이 든 이사나가 붉어진 얼굴로 알리사에게 거듭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운명이 정해준 연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서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매처럼 풋풋하게만 보이던 관계가 새삼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