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문을 열고 나오자 눈앞에 화창한 하늘이 펼쳐졌다. 전혀 다른 장소일 거라 생각했는데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이 익었다. 마른 암벽과 그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길. 그리고 커튼처럼 내려진 무성한 덩굴들까지. 처음 던전을 발견했을 때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 그대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들어왔던 입구로 다시 나온 것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광경을 보니 마치 긴 꿈을 꾸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빠르게 현실감을 일깨웠다.
<아아! 이 후끈한 온도! 살랑거리는 바람! 드디어 밖에 나온 거군요! 언제나 이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이게 얼마만의 햇빛인가요! 아아, 이프리트 님! 기뻐해 주세요! 드디어 제가 해내고 말았어요! 저를 그 어두운 지하에서 구출해 준 용사님을 만났다고요!>
수다스럽게 떠드는 음성은 파이어 버스터의 것이었다. 짙은 먹색을 띤 장검의 존재는 우리가 지금까지 던전 안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품이기도 했다.
검 주제에 녀석은 바깥에 나온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보였는지, 이때만큼은 누구도 녀석의 부산스러움에 눈썹을 찌푸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주위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다들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내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와서 감격스럽기는 다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실 나 역시 그랬다. 던전 안도 꽤 넓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탁 트인 공간에 서 있는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피부에 와 닿는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게 선명히 느껴져 마음이 들떴다. 뭐랄까. 들어갔다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인 거 맞을걸? 한 달쯤 되었으니까.”
“……뭐라고요?”
“너희가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한 달 정도 흘렀다고.”
생긋 웃은 카노스가 엄청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충격적인 말이라 머릿속이 그대로 멍해졌다.
한 달이라니. 같은 공간을 맴돌기 시작한 이후로 시간 개념이 모호해진 느낌이 들긴 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 날을 머물렀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사나흘 정도이겠거니 했지, 그 이상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사이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고? 일주일도, 보름도 아니고, 무려 한 달?
“농담이죠?”
“내가 이런 걸로 왜 농담을 하겠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던전 안이 굉장히 크거든. 너희는 못 느꼈지만 한 층에서만 며칠씩 머물렀어. 물론 마지막 환상에 빠진 게 가장 시간을 오래 잡아먹긴 했지만.”
“하지만 그런 것치곤 다들 멀쩡한데요? 그동안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아, 그건 던전 안의 시간을 멈춰놔서 그래. 한마디로 그 안에서는 육체의 시간이 정지해 있던 셈이지. 네 일행들을 아사(餓死)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신경 썼다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카노스는 뿌듯한 어조로 으스댔다. 그 순간엔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러자 살벌한 시선을 감지했는지 그가 냉큼 내 옆에서 한 발짝 멀어졌다. 눈치 하나만큼은 비상할 정도로 빠른 신이었다.
“흠흠, 불쾌한 상황을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지. 누가 엘뤼엔의 아들 아니랄까 봐, 이런 건 아버지랑 똑같구나?”
“애초에 맞을 짓을 하지 말자는 생각은 안 하세요?”
“냐하하, 내 지론은 오래전부터 단 하나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것 참 당신다운 지론이긴 하네요.”
화를 내는 것도 상대가 어느 정도 받아줘야 가능한 일이다. 너무 뻔뻔하게 나오니 더 이상 따지고 들 기운도 나지 않았다. 부풀었던 분노가 한순간에 사그라지면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온몸이 파시식 늘어졌다. 무의미하게 흘려버린 한 달이란 시간이 그저 아깝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갈 길이 막막한데, 출발을 하기도 전에 기력을 다 써버린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이사나는 의외로 차분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엘. 지금도 그렇게 늦은 건 아니야. 중간에서 일정을 많이 단축하기도 했으니까 한두 달 정도는 지체해도 큰 차이 없어.”
“으음, 그거야 그렇지만.”
“괜찮아.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훨씬 더 빠를 거잖아. 라피스 님이 오기로 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라 나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건 사전에 미리 맞춰뒀던 부분이었다. 우리가 마검을 습득하고 나면 그 시점에 맞춰 라피스가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정확한 위치만 알면 그가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세운 계획이었다. 사실 여정에 들어가는 시간 대부분이 길에서 버리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가 데리러 오기만 해도 자그마치 반이나 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있는 능력을 이럴 때 활용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내가 갖고 있는 통신석엔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였다. 일종의 GPS랑 비슷한 방식인데, 이 마법을 걸어두면 언제든 물건이 있는 장소의 정확한 좌표를 알 수 있다는 모양이다. 지금도 우리가 머물고 있는 위치가 실시간으로 라피스에게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라피스라면 나와 연결되어 있는 마나의 흔적을 쫓아 이곳의 위치를 짚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라피스 그 녀석이 있었지.”
막막하게 여겨지던 앞날에 희망이 보이는 듯해 나는 한결 마음을 내려놓았다. 귀환 시점은 우리 쪽에서 정하는 것이니만큼 언제든 연락만 하면 된다. ……문제라면 지금 라피스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일 거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와 연락을 했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 던전에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꽤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비록 본의는 아니었지만) 한 달이나 말없이 잠수를 탔으니 지금쯤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약속을 했으니 맡은 역할을 때려치우진 않겠지만, 툴툴거릴 그를 어르고 달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라피스? 그게 누군데? 그도 엘의 동료야?”
시벨리우스의 질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오면 돌아가는 일정이 훨씬 편해질 거야. 공간 이동을 할 수 있거든.”
“마법사인가 보지?”
“마법사라면 마법사랄까. 정확히는 드래곤이야.”
“드, 드래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그 붉은 머리 남자 말씀이시군요.”
놀라서 숨을 삼키는 알리사에 이어 데르온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승부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남자만큼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정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마력을 지닌 자였죠. 보이지 않기에 떠난 줄 알았는데 놔두고 오신 거였군요.”
“그는 따로 맡은 일이 있었거든요. 이쪽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흐음, 그렇군요. 다음을 기약하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해후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와는 언제 한번 제대로 겨뤄보고 싶었지요.”
“……제발 참아주세요.”
“안 됩니까?”
멀뚱하게 눈을 깜빡이는 데르온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일행, 정말 괜찮은 걸까.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안 되죠. 예전엔 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얼굴 보며 지내야 할 사이라고요.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안 할 테니 최소한 거친 행동은 삼갔으면 해요.”
“그건 엘의 말이 맞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동조를 표했다. 그게 이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지금까지 이사나는 데르온과 직접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상대가 마계 공작이란 사실이 부담스러워서인지 늘 거리를 두고 대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데르온을 마주하고 있었다.
“데르온 공,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그럼 공, 말이 나온 김에 저도 당부해 두겠습니다. 마계의 생태계가 인간들의 세상과는 많이 다르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앞으로 주로 접하게 될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일 겁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동안에는 불편하더라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배려해줬으면 합니다.”
“흠, 이곳의 규칙에 따라달라는 말이군요?”
“제도를 전부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들만큼은 지켜주십시오. 특히 살인은 절대 안 됩니다.”
단호한 음성은 거의 경고에 가까웠다. 데르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강조하지 않아도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 사회에 섞여 있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걸요. 하지만 모처럼 당부까지 하시니 좀 더 조심하도록 하죠.”
“그 약속을 믿겠습니다. 저 또한 공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할 겁니다.”
담담하면서도 정중하게 답하는 이사나의 모습에선 전보다 더 많은 여유가 느껴졌다. 원래도 의연한 편이긴 했지만 조금은 상대에게 끌려가는 듯한 인상이 없잖아 있었는데, 지금은 본인이 주도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던전에서의 경험들에 감화를 받은 것 같더니, 변화가 점점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라 그런지 그 차이가 더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사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짙은 태양 빛 같은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의 조화가 참 잘 어울리는 소년이 내 시선을 느끼고 빙긋 웃었다. 변장했을 때만큼 화려한 느낌은 아니라도 충분히 시선을 끌 만큼 잘생긴 얼굴이다. 아니, 오히려 특유의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인상 자체는 더 강렬해진 것 같았다.
이 얼굴이 이렇게 눈에 띄는 편이었나? 분명 예전에도 준수한 편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그의 외모가 변한 건 아니었다. 조금 더 키가 커졌을 뿐 여전히 십 대 특유의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고, 얼굴 역시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이루는 분위기가, 사소한 몸짓이나 시선 같은 것들이, 그를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사나는 삶에 몹시 지쳐 있었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였다. 나와 함께하는 동안 점차 안정되어 가긴 했지만 대체로 자신 없는 얼굴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당하게 전방을 주시하는 얼굴은 빛이 날 듯이 화사했고, 굴욕을 모르는 사람처럼 전신에서 고귀한 태가 흘렀다. 과연 한 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다웠다.
처음엔 검의 주인이 된 효과인 건가 싶었는데 이제 막 받아들인 상태인 만큼 이렇게 당장 영향을 받을 리가 없었다. 이건 이사나 스스로 일으킨 변화였다. 태도에서 묻어나기 시작한 자신감이 얼굴에 생기를 일으켜 그의 인상까지 바꾼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그는 점점 더 달라질 것이다. 아직 멋모르는 내 눈에도 그것만큼은 분명히 보였다. 기특하고 뿌듯한 마음이 더 크긴 한데 동시에 어딘지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바람직한 성장임은 틀림없지만, 갑자기 훌쩍 자란 것 같은 이사나가 조금 낯선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이럴 정도니 다른 일행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시벨리우스와 데르온이 그를 대하는 게 한층 조심스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알리사는 아예 그와 눈조차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어, 알리사…….”
“어어? 뭐, 뭔데……!”
“……으음, 아니야.”
말을 걸 때마다 화들짝 놀라다 보니 심지어 그녀와는 대화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리는 대화가 벌써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오래가네.’
나는 축 처진 이사나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의젓해진 그도 이런 일만큼은 시무룩해진 티를 감추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정말 저 사람이 이사나 씨라고?>
황당해하다 못해 경악에 가득 찼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귓가를 맴돌았다. 모습이 달라진 이사나가 검을 들고 내려오자, 알리사가 기겁하면서 외쳤던 말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처음 한동안 이사나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내가 거울을 보여주고 나서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해서 허둥거리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변명은커녕 말 한마디도 잇지 못했다.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붉어질 수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단지 검을 잡았을 뿐인데 마법이 풀렸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사나에게 걸려 있던 폴리모프 마법이 풀린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고였다. 카노스의 설명에 의하면, 파이어 버스터의 힘이 이사나의 몸에 각인됨으로써 그가 지닌 기운의 성질이 달라진 탓이라고 했다. 즉, 처음 마법을 걸었을 때와 발동 조건이 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법 수식이란 게 복잡한 계산이 들어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섬세하고 정밀한 분야인 것 같았다. 본래는 이런 것까지 감안하고 마법을 설계한다는데, 이사나의 경우엔 처음부터 가볍게 걸어둔 거라 쉽게 풀린 거라고 했다. 물론 상황 자체가 매우 특수한 편이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타고난 기운의 성질이 바뀔 일이 몇이나 되겠는가.
어차피 언젠가는 풀어야 할 마법이라 시기를 조금 앞당겼다고 생각하면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다른 일행들도 대체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알리사의 입장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남자답게 준수해진 이사나의 얼굴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워낙 스스럼없는 성격이라 쉽게 납득할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배신감이 컸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