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제 할 말만 마친 카노스가 몸을 돌리려고 하는 것을 나는 다급히 붙잡았다. 그의 입장에선 용건이 다 끝났을지 몰라도, 아직 이쪽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내내 소외되고 있었던 나머지 일행들 말이다.
“다들 괜찮아?”
그들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굳어있는 상태였다. 카노스의 속도에 맞춰 길을 떠났으면 따라나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남겨졌을 게 뻔했다.
“으으, 아까부터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미안, 알리사. 나중에 전부 다 설명해 줄게.”
투덜거리는 알리사를 달랜 후 나는 이사나를 살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혼탁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내 시선을 깨닫자 차츰 초점이 잡혔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신탁도, 대공이 사제라는 것도 전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정말 충격이 컸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심란할 텐데 생각보다는 안정적으로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괜찮아, 이사나?”
“응, 오히려 잘됐어.”
잘됐다고? 의아해져서 바라보자 이사나는 기운 없는 얼굴로 웃었다.
“신탁이 진짜라고 생각했을 땐 늘 내가 틀린 건 아닌 건지 의심했었으니까. 그를 치는 게 정말 옳은 건지, 내가 얌전히 물러서는 쪽이 하늘의 뜻이 아닐까 고심했었어.”
“이사나…….”
“하지만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어. 하늘의 뜻도 아니었지. 오히려 그가 틀렸던 거야. 이제 아무런 잡념 없이 이 싸움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아.”
단호하게 말한 눈동자는 한층 깊어져 있었다. 처음 여행을 막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눈이었다. 문득 화려한 마법 아래 감춰져 있는, 그의 진짜 얼굴이 어떤 분위기를 풍기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벅찬 기분으로 바라보는 나를, 그가 조심스럽게 응시했다.
“그래서 말인데, 엘.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나한테 맡겨주지 않을래?”
“응?”
“이기적인 부탁인 거 알아.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내 방식으로 끝내고 싶어.”
이사나가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엔 그에게 맞춰 시작한 여정이었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대공은 이 세계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악신의 각성 가능성이 커진 이상 주술의 완성을 막기 위해서라도 마왕에게 협력하고 있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정령왕인 내가 직접 나서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럴 작정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인간들끼리.’
카노스가 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말했던 의미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지만, 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싸움은 이사나의 손에서 끝나야 한다. 내가 전부 해결하면 간단할 수는 있겠지만, 아마 그는 평생 제대로 설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핏값을 자신의 힘으로 받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따라붙을 테니까. 고지식한 이사나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자책할 것이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라도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내가 차분하게 응시하자 이사나는 각오를 다진 사람처럼 두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멈췄다. 극도로 긴장한 얼굴을 보자 실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해, 이사나. 설마 내가 안 된다고 할까 봐?”
“……! 그, 그럼 맡겨주는 거야?”
“말했잖아. 이 여행은 널 위한 거라고. 시작도 네가 했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끝날 거야. 원하는 대로 마음껏 복수하고 승리해.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볼게.”
“……고마워, 엘.”
내가 수락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사나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황금색 눈동자에 물기가 차오르더니 그가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훌쩍이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일단 검부터 찾으러 가자. 대공을 무찌르려면 네 사촌 형을 구하는 게 먼저니까.”
“응!”
고개를 끄덕인 후 이사나는 기운차게 몸을 일으켰다. 알리사는 이제 상황을 이해하길 체념한 모습이었다. 묵묵히 치맛단을 털어내던 그녀가 힐끗 옆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이쪽은 그렇다 치고, 저쪽은 어떻게 해?”
“저쪽이라니?”
“시벨 씨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시벨은…….’
가장 심란한 문제를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몸이 긴장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한 후로 시벨리우스는 계속 방치된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그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을 것이다. 힐끔 돌아보니 그도 우리 쪽을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맞았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내 얼굴을 보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시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엘의 존재 자체가 허상이 된 지금,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다지 희망찬 결말이 예상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만큼, 이 상황이 몹시 안타까웠다.
“아하~ 그러고 보니 아직 저 문제가 남아 있었구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노스도 이제야 문제를 파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사태가 급변했다. 종종걸음으로 시벨리우스에게 다가간 카노스가 그를 강제로 끌고 오기 시작한 것이다.
“자, 자~ 우리 고귀한 성마 씨는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이제 그만 툴툴 털고 일어나!”
“자, 잠깐! 지금 뭘 하는 거야?”
당황한 시벨리우스가 난색을 표했지만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무의미한 반항을 하는 철부지를 바라보듯, 카노스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훑어 내렸다.
“네가 하도 열심히 땅을 파고 있으니까 그렇지. 애들이 저렇게 신경 쓰고 있는데 가엾지도 않아? 착한 아이들을 울리면 벌 받는다?”
“큭!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글쎄, 누구 때문이려나?”
“그걸 몰라서 물어? 애초에 네가 속이지만 않았어도!”
“네가? 나 이래봬도 마신이거든? 아까부터 봐줬더니 너무 막말한다?”
“……젠장!”
의외였던 건 거칠게 소리치면서도 시벨리우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원래 신계에서 살던 종족이라고 하더니, 신의 존재감이 크긴 한 모양이다. 결국 그는 카노스의 손에 이끌려 내 앞까지 강제로 떠밀려왔다. 내가 바라보자 시벨리우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칠 것처럼 어색한 공기를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좀 괜찮아?”
“……응.”
“저기, 엘의 일은 안됐어. 이렇게밖에 말 못 해서 미안해.”
“아, 아니, 괜찮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시선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고분고분 대답하는 얼굴에 불쾌한 빛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겸연쩍어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정했어?”
그의 일족들은 전부 신계로 떠났고, 엘이란 친구도 잃었으니 이제 시벨리우스는 정말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왠지 그가 일족들에게 돌아갈 것 같진 않았다. 예상대로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엘을 찾을 거야, 계속.”
“엘을 찾는다고?”
“지워졌다고는 하지만 내 기억에는 남아 있으니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잖아. 어딘가에는 엘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하다못해 그가 남긴 흔적만이라도.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단호한 표정을 보니 이미 단단히 결심을 굳힌 듯했다. 역시 이렇게 헤어지게 되는 거구나. 이미 예상했던 일임에도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 여행, 우리랑 같이 하자.”
“으응?”
“어차피 당장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단서를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우리랑 같이하는 게 어때? 낯선 세상을 혼자 떠도느니 네게도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진심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내가 뭐?”
“……나한테……화 안 났어?……나 그동안 너한테 심한 말 많이 했잖아.”
알긴 아는구나.
묘한 기분으로 응시하자 시벨리우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피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미안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반짝이고 있는 눈빛은 끝까지 감추지 못한 그의 진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내게 한 짓이 있어 차마 솔직해지지 못했을 뿐, 그 역시 이런 결과를 바랐던 것이 분명했다.
‘정말 어쩔 수 없다니까.’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확실히, 좀 너무하긴 했지.”
모른 척 중얼거리는 말에 시벨리우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무작정 엘만 감싸고, 이름이든 인맥이든 전부 다 몰아 줘야 직성이 풀리고. 이쪽 입장은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도 않고. 어디 친구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진짜 굉장히 섭섭했어. 그래도 난 우리가 꽤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다른 친구랑 닮아서 잘해준 거였잖아? 우와,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래 이런 취급은 정말 처음이야.”
“미, 미안…….”
투덜거리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어깨가 움찔거리는 강도가 심해져갔다. 죽을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정말로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랑도 친구하자.”
“……어?”
“‘엘’이랑은 별개로, 나랑도 친구하면 되잖아. 그럼 둘 다 네 친구니까 서로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지? 그걸로 전부 용서해 줄게.”
그건 이전부터 그에게 쭉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가능하다면 나 역시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
시벨리우스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내밀어진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어지는 광경에 나는 당황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 시벨?”
그조차도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인지한 것 같았다.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그가 손으로 뺨을 더듬어보고는 괴로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시벨리우스의 떨리는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 미안해, 엘.”
“……어?”
방금 엘이라고 부른 거 맞지? 그가 이렇게 쉽게 날 다시 엘이라고 부를 줄은 몰라서 눈이 저절로 커졌다. 그런 날 보며 시벨리우스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분명한데, 처음부터 한결같이 똑같았는데……내가 왜 바보같이 널 의심했을까. 네가 분명히 말했는데.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하게 돼도 친구일 거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으응?”
“다시 친구가 돼줘서 고마워. 다시는 이런 실수 안 할게. 네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정말이야, 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사죄와 감사의 말들이 흐느낌을 담고 연거푸 흘러나왔다. 그가 붙잡은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들은 대부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만은 알 것 같았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그는 날 여전히 ‘엘’의 환생이라고 여기기로 한 듯 했다.
하긴, 가짜 ‘엘’이 있었을 때도 계속 헷갈린다고 했으니 그렇게 쉽게 분리해서 보기는 힘들겠지.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다가 이사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머리도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사실 이전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지독한 경험을 했고, 지우기 힘든 상처도 입었다.새로운 관계를 열어갈 것처럼 보였다가도, 결국 제 편한 대로 생각하고 마는 시벨리우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엘뤼엔이 날 인정해줬으니까.
마음이란 게 정말 신기해서, 누군가 날 소중히 여겨준다는 걸 확신하고 나니 더 이상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여유가 생기자 시벨리우스를 대하는 것도 한결 너그러워졌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 않던가. ‘엘’과 쌓은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앞으로 같이 쌓아 가면 될 거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겠지만, 시벨리우스도 곧 받아들일 것이라 믿었다.
짝짝짝, 우리가 서로 마주 보며 웃었을 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카노스였다.
“좋아, 좋아. 아주 아름다운 결말이야.”
방정맞은 말투에 훈훈하던 공기가 한순간에 식었다. 모두가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보든 말든 그는 한껏 도취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엘퀴네스라니. 난 정말 감동했어. 엘퀴네스들은 대대로 죄다 더러운 성격밖에 없다고 해도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치유와 화평의 표본인 듯한 엘퀴네스도 가능한 거였잖아? 이제야 체면이 좀 서겠어.”
“왜 당신의 체면이 서요?”
“응?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도 엘퀴네스 출신이거든.”
“…….”
“그것도 최초의 엘퀴네스였지.”
“…….”
방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 마음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데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신은 상급신이었지. 그리고 상급신은 반드시 정령왕의 임기를 거친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마신도 한때는 정령왕이었단 소리가 된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당연히 상급신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거기까진 연상해 보지 못했다. 사실을 깨달은 지금도 그의 정령왕 시절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심지어 최초의 엘퀴네스였다니. 한마디로 말해 저 사람이 내 시조 같은 존재라는 건가? 그런 건가?
눈이 마주치자 카노스는 생글생글 웃었다. ‘선배님이라고 불러봐.’ 놀리듯이 말하는 얼굴을 나는 조용히 외면했다.
지금 이야기는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야겠다. 그래, 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다. 자기최면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반복적으로 중얼거려 보았지만 이미 인식된 정보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뭐랄까. 아주 오랜만에 인생의 쓴맛을 느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