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05화 (205/608)

제205화

“자, 잠깐만요. 근데 왜 신관만 처벌을 받아요? 다른 사람은 위조를 해도 괜찮은 거예요?”

“처벌이 아니라 숙명이라니까.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듯 그냥 처음부터 정해진 규칙 같은 거야. 그게 싫으면 언제든 그만두면 되고. 그리고 당연히 괜찮다곤 할 수 없지. 스스로 양심을 훼손하는 거잖아. 내세가 아주 괴로워질걸?”

“그것뿐이에요?”

“그게 아니면?”

“그야 당장 혼을 내줘야죠. 신벌을 내린다든가…….”

“하하, 귀여워라. 정말 인간처럼 생각하는구나?”

심각한 대화 중인데도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은 흔히 죄를 지으면 신에게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아니에요?”

“뭐, 아주 틀리진 않아. 신들이 생각하는 죄의 기준과 처벌의 방식이, 인간이 생각하는 거랑 좀 다르다는 것만 빼면?”

“……!”

“인간의 삶은 무수히 짧은 생의 연속이야. 그중 어느 것도 과거와 연결되지 않은 게 없고,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없어. 그러니 당장 눈에 보이는 형태가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돼.”

“결국 어떻게든 대가를 치른다는 건가요? 그래도 당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억울하잖아요.”

“그 또한 연속의 고리에 속해 있어. 억울한 건지 아닌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가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부 지나봐야 알 수 있는 문제거든. 너도 언젠가는 깨달을 테지만.”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둔다고요? 대공이 신관의 신분에 숨어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요?”

“응, 확실히 나쁜 인간이긴 하더라.”

기가 막혀서 바라보는 시선에 카노스는 묘한 웃음으로 마주했다. 물론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대공이 누구던가. 거짓 신탁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거나 괴롭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세월 동안 아이들을 납치해서 인신제사를 하는 작자다. 심지어 그 모든 일들이 마신의 이름하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지?

아무리 인간이 수많은 삶을 산다고 해도 지금 사는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돌고 도는 인과의 법칙 같은 건 모든 걸 아는 존재한테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공평한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에겐 현재가 가장 소중하고, 당장 눈앞에서 이뤄지지 않는 일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생의 악인이 후생에서 죗값을 치르더라도, 그에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보상이 돌아가진 않는다. 설령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받더라도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그걸로 족하다는 건가? 그저 모르고 있는 것뿐이니까?

카노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말한 대로 나도 언젠가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귀엔 그가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해 봤자 그저 변명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아는 세상은 아직 단순해서,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전부였다. 누군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알고도 묵인한다면 그저 공범자일 뿐인 것이다. 하물며 마신은 예전부터 대공이 하는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는 역시…….

“역시 마신이 배후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지?”

“……!”

생각하기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카노스는 내 반응을 즐기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과 마왕이 서로 작당해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고, 나도 그 일에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잖아? 내가 그들을 돕고 있는 것처럼 보여?”

“……아니에요?”

“흠, 차라리 그쪽이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네?”

“그럼 적어도 골치 아프진 않잖아.”

경계하며 쳐다보는 시선에 카노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내가 뭐라고 입을 벙긋거리기도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유감이지만 그 건에 관해서라면 오히려 반대쪽이야.”

“반대쪽이요?”

“그 둘을 막으려는 쪽.”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으로 들렸다.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엔 씁쓸한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길 바라는 쪽.”

“그냥 내버려둔다면서요.”

지금까지 한 말과는 전혀 맞지 않는 대답이라 막으려 한다는 말에도 의심부터 들었다. 떨떠름한 어조로 묻는 말에 카노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버려두는 게 아냐. 조치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거지.”

“그치만…….”

“인간들의 입장에선 수긍하지 못한다고? 그게 어때서? 신이 굳이 그들의 마음에 드는 방식에 따를 필요는 없잖아? 왜 신이 인간에게 맞춰야 하지? 인간들조차 타인의 방식에 억지로 따라야 하면 기분 상해하면서. 그렇지 않아?”

“…….”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저절로 입이 닫혔다. 잔인한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풀죽은 내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기라도 했는지 카노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할 수 없네. 내가 원래 이렇게까지 친절한 편은 아닌데, 네게 오해받는 건 슬프니까 확실히 얘기해줄게. 인과의 법칙을 떠나서도 원래 신은 중간계의 일에 가능한 한 직접 개입하지 않도록 되어 있어.”

“예?”

“그들의 삶이잖아. 문제가 벌어질 때마다 신들이 전부 해결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해결하는 게 가장 좋아. 그게 옳기도 하고. 특별한 상황, 예를 들어 그 안에서 자력으로 해결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엔 나서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 역시 매우 드문 편이고, 대다수의 일에 신은 간접적으로 돕는 조력자 선에서 그쳐. 그래서 신관이 있는 거야. 그나마 아크아돈은 신관의 권한이 크기 때문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더 크긴 하지만.”

“그, 그런 거예요?”

“그래. 방관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거지.”

뭐야,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괜히 복잡하게 말해서 의도를 헷갈리게 할 건 뭐람? 얼굴을 찌푸리자 카노스는 히죽 웃었다. 그제야 그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날 골리려고 그런 것이다.

“……진짜 취향 나쁘시네요.”

“냐하하, 놀리는 재미가 있어서 그만. 엘뤼엔한테 이를 거야?”

“이르긴 뭘 일러요. 제가 무슨 10살짜리 꼬맹인 줄 알아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잖아? 10살보다 더 어린 꼬맹이 맞지.”

윽,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난 아직 정령왕으로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 게다가 전생의 기억이라고 해봤자 고작 17년일 뿐이니 신의 입장에서 보면 까마득하게 어려 보일 게 뻔했다. 나는 일찌감치 반발하는 것을 단념하기로 했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대공을 막으려고 시도하시긴 했나요?”

“당연하지. 마신관을 사칭했을 때도, 신탁을 내렸을 때도. 난 신관들의 마음을 움직여 여러 차례 대공에게 경고를 전했어. 그러자 그가 내 신관들을 모조리 죽였지.”

“……!”

아,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다. 대공이 자신을 반대하거나 신탁을 의심하는 신관들을 전부 다 죽였다고 했었지. 그제야 떠오른 기억에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그의 입장에선 꽤 분할 일인데도, 카노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이제 그의 곁엔 내 사람들이 없어. 교단은 많이 변질됐고, 남아 있는 신관이라고 해 봤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뿐이야. 토질이 오염되면 새 싹이 트는 것도 쉽지 않지. 언젠가는 복구되겠지만 꽤 오래 걸릴 거야. 아쉽지만 내가 신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야.”

“그럴 수가…….”

“하지만 어차피 대공은 오래 버티지 못해.”

실망하려는 순간 이어진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처음부터, 라고요?”

“순리와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섭리에도 어긋나거든. 그래서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의 의지는 곧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뜻을 움직이지.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맞서는 자가 생겨나게 되어 있어. 지금 네 계약자가 그를 치려는 것처럼.”

“……!”

그 말을 듣자마자 나와 이사나는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았다. 즉, 대공을 치려는 이사나의 행보가 세상의 섭리에 속한 것이고, 그의 손에서 대공의 악행이 끝날 거라는 소리였다. 인간의 일은 인간끼리 해결하라는 게 바로 이런 뜻이었나 보다. 카노스는 눈매를 휘어 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대공은 결국 현재의 생에서 죗값을 치를 거야. 물론 저지른 죄의 깊이가 너무 크니 후생도 순탄하진 않겠지. 이게 정확한 결론이야. 이제 원하는 답변이 되었어?”

“……깨우쳐 주셔서 참 감사하네요.”

“천만에.”

비꼬는 말도 느긋하게 되받아치니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해졌다. 불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견고한 성벽 같은 그의 표정을 흩트리기엔 턱도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야.”

“시간이 없다니요?”

“금지된 주술.”

“……!”

“정말 그 주술이 부활한 거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거든.”

카노스의 입술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켜보는 나까지 몸이 저절로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바로 이해했다. 대공이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 악신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암흑주술에 대한 것이다.

“그 주술이 끝까지 완성되면 모든 결과가 뒤집힐 거야. 세상의 정해진 섭리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돼. 인과응보 따윈 없는 세상이 되겠지.”

감정을 담지 않은 단조로운 어조 때문에 더 섬뜩하게 들렸다. 이사나가 부르르 떠는 것이 보여서 나는 황급히 물었다.

“진짜 그 주술이에요?”

“글쎄. 의식 자체는 비슷한데 지금은 확언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야.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어린 아이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생기를 빼앗겼다는 건데……그 힘을 흡수하고 있는 거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반드시 그 주술이라고 볼 수는 없어. 한마디로 말해서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태지.”

“으음……. 대공의 생각이나 기억을 읽어본다든가, 그런 건 안 되나요?”

“그건 이미 해봤지.”

“해보셨다고요?”

“그게 가장 알아내기 쉬운 방법이잖아. 기본적인 부분은 다 확인해뒀어. 대공은 소원을 이루는 주술이라고만 알고 있는 상태야. 세간엔 아이들만 노리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성인도 상당수 제물로 쓰고 있었어. 제단에 설계된 진법도 그다지 특이할 건 없는 형태였고. 아마 대공의 역할은 미끼에 불과하겠지. 그게 아니면 정말 기우일 뿐이거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얼굴이 진지했다. 휴가라고 하더니, 사실은 주술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내려와 있었던 건가 보다. 이제야 엘뤼엔이 그를 얌전히 놔두고 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막는 쪽’이었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카노스를 바라보았다. 마신처럼 대단한 존재가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설렜다. 장난치고 곤란하게 만들 땐 마냥 행실이 의심스럽기만 하더니, 지금은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잠깐, 그런데 방금 카노스가 한 말이 무슨 뜻이지? 대공의 역할이 미끼였다고? 다른 생각을 하느라 깊게 짚어보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서둘러 정신을 수습하며 물었다.

“대공이 미끼라니요? 그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아니. 그자는 의식의 일부를 돕고 있을 뿐, 주술을 실행하는 주체는 아니야.”

“대공이 아니면…….”

“그야 그자의 뒤를 봐주고 있는 존재겠지. 그에게 가짜 신의 문장을 주고, 신관이 될 수 있도록 도운 존재.”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떠올린 건 대공의 뒤에 서 있다는 한 존재였다. 데르온을 보내 우리를 감시하게 하고, 루카르엠에게는 이사나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존재. 바로 마왕 말이다.

“설마…….”

“참고로 마족의 마력은 마신관의 성력과 비슷한 기운을 풍겨. 계급이 높은 마족의 것일수록 더욱 그렇지. 마왕 정도면 대신관의 성력을 흉내 내기엔 충분했을 거야.”

“……!”

내 짐작을 읽었는지 카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혼란한 머릿속이 결론을 도출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며 다시금 상황을 확인했다.

“그럼 마왕이 악신이 되려고 하는 건가요?”

“아직 거기까지 밝혀지진 않았다니까.”

“마왕의 기억은 안 읽어본 거예요?”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야. 지금 마왕은 날 때부터 정신을 방어하는 능력이 유난히 강한 편이었거든. 거의 신과 비슷한 수준이라 그의 생각은 잘 읽히질 않아. 작정하고 감추면 알아낼 재간이 없어.”

“그럴 수가…….”

“아, 악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탄식하며 중얼거렸을 때, 데르온이 당황하여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오간 대화의 내용만으로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듯,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한때 신의 권능에 도전하려고 해서 금기로 정해진 주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마왕 전하, 아니 카류드리안! 설마 그자가 그 금기를 어긴 겁니까?”

묻고는 있었지만 이미 확신을 담은 말투는 자신의 판단을 확인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상대가 마신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다그칠 기세였다. 그게 재밌었는지 카노스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그걸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데르온. 꽤 높은 확률로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말이지.”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그의 행보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그자를 심문하시어 자백을 받아내시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건 불가능해. 증좌도 없이 무작정 심문할 순 없거든. 인간들의 왕에게조차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카류안은 마왕이다. 어지간한 신들조차 예의를 갖추고 대하는 존재지.”

“하지만!”

“애초에 넌 마족의 일원이면서 너무 쉽게 그를 의심하는구나. 카류안은 모든 공작들의 승인을 받아 정당하게 권좌에 오른 왕이다. 네가 보기에 미덥지 못한 구석이 많더라도, 모시는 이를 신용하지 않는 건 좋은 버릇이 아냐.”

“……마신께선 그를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나는 잠시 어이없어하며 카노스를 바라보았다. 데르온과 이사나, 심지어 알리사마저도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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